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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에서 직장을 다니는 P(27)씨는 최근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났지만 적극적인 자기고백을 미루고 있다. 자신의 혈액형이 B형이어서 상대방이 싫어할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안동에서 대학을 다니는 K(23)씨는 미팅으로 한 여성을 만났는데, 상대방이 혈액형 궁합을 보더니 연락을 끊었다. K씨의 혈액형도 역시 B형이다. 의대생인 C씨(21)는 마음에 드는 여성이 혈액형을 물으면 O형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B형의 수난이 끝나지 않았다. 2004년 영화 'B형 남자친구'와 가수 김현정의 'B형 남자' 노래 이후 B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젊은층들 사이에서는 아예 기정사실화 되어버린 것이다.

단순히 B형 혈액형만을 타고 났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가져야 하는 현실, 도대체 그 황당함의 진원지는 어디인가?

아시아 차별에 악용된 혈액형 인종주의가 일본에 수출

▲ 혈액형은 적혈구(둥근 도너츠모양) 항원의 차이에 따라 결정된다.
ⓒ 오기현
20세기 초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황색 인종이 유럽 문명에 위협을 주므로 황색 인종들을 국제무대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의 부상이 유럽의 아시아 제국주의 정책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인 황화론(黃禍論)이 탄생한 것이다.

그 무렵, 1900년 오스트리아의 젊은 병리학자 '란트슈타이너'가 ABO 혈액형을 발견한 후 유럽에는 혈액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의 혈액형에는 A형과 O형이 많지만 아시아에서 온 노동자들의 혈액형에는 B형이 많은 것이 발견된다.

황색인에 대한 차별의 근거를 찾던 유럽인들은 혈액형을 인종주의와 자연스럽게 결합시켰다. B형에 대한 편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역설적으로, 일본인 몰아내기로 시작된 인종주의는 일본에 전파됐다.

1911년 일본인 의사 하라 키마타가 독일의 병리학자 듄겔른이 일하던 하이델베르크의 한 연구소로 유학을 갔다. 듄겔른은 혈액형이 유전된다는 사실을 발견해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고, 혈액형 인종주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1914년 세계 제1차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돌아온 하라는 일본인들의 혈액형을 조사했는데 일본인이 유럽인에 비해 A형은 상대적으로 적고 B형은 많은 것을 발견했다. 서양제국을 모델로 발전하던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불쾌한 일이었다.

하라는 B형 혈액형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16년 일본의 한 신문에 발표한 논문에는 A형은 순종적이고 B형은 난폭하다는 내용을 게재했다. '혈액형 성격학'이 일본에서 탄생한 것이다.

혈액형 비율로 민족성을 계산할 수 있다?

▲ 가장 서양적인 동양인이라는 일본인.
ⓒ 오기현
인종론의 영향으로 시작된 혈액형 성격학은 일본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27년 일본 나가노현의 교육학자인 후루가와 다케이치는 직관을 이용해 '혈액형 기질 상관설'이라는 이론을 구성하고 1932년 '혈액형과 기질'이라는 책을 냈다. 'A형은 내성적이고, B형은 외향적이며, O형은 의지가 강하고, AB형은 이중적'이라는 기본적인 이미지가 완성된 것이다.

후루가와는 혈액형을 이용해 '민족성 계수'라는 괴상한 공식을 고안했다. O형의 비율(%)과 B형의 비율을 더한 수치를 A형 비율과 AB형 비율을 더한 수치로 나눈 것이다. 즉 (O+B)/(A+AB)로 구하는 공식인데, O형과 B형의 비율이 높으면 활동적이고 A형과 AB형의 비율이 높으면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후루가와가 B형을 부정적인 혈액형으로 분류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혈액형성격론을 신봉한 그는 혈액형과 기질(성격)의 관련성을 체계화시켰다.

그는 영국·프랑스·독일·미국을 '구미 이상국'이라고 규정하고 일본인들이 이들과 가까워지기를 절실히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성 계수가 높아져야 하지만 당장 국제결혼을 장려할 수는 없으므로 학교교육을 통해 적극적인 국민을 육성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군대 지휘관은 O형, 교사는 A형이 적합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혈액행 성격학은 군대조직에도 활용됐다. 1934년 교토의 한 군의관이 혈액형을 이용해 수송부대를 편성한 것.

이 군의관은 인원 각 67명으로 혈액형별 배합을 통해 2개 중대를 편성했는데 '행동적인 집단' '견고한 집단' '견고함과 유연성의 균형이 맞는 집단' 등의 4개 반을 아래에 두었다. 그러나 그 부대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본은 서양과 동양의 중간 피"

후루가와 다케이치의 학설은 1933년 일본법의학회 제18회 총회의 대논쟁을 계기로 쇠퇴했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약 40년이 지난 1971년 한 방송작가가 '혈액형 인간학'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일본사회에 다시 부활했다.

노미 마사히코라는 이 작가는 수십만에 달하는 데이터를 토대로 자신의 이론을 세웠다고 하는데, 1930년대 후루가와의 성격 분류법과 내용이 매우 유사해 보인다. 노미 마사히코와 그의 아들 노미 도시다카가 발행한 책은 100권이나 된다.

"일본인은 외국인들로부터 성실근면하고, 집단의 질서를 중시하고, 예의 바르며, 절도가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A형 성격과 닮았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노미 도시타카가 <혈액형-재미있는 인간테스트(2005년)>라는 책의 서두에서 쓴 내용이다. A형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일본인의 국민성이 A형 성격과 유사함을 밝힌 것이다.

이 책을 더 읽어보자. 아래의 글을 보면 일본인들이 왜 혈액형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일본을 가리켜 '반은 동양, 반은 서양'이라고들 하는데 이것은 혈액형 구성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일본의 혈액형 구성을 보면 서구와 비슷하게 A형과 O형이 주류를 이루지만, B형의 비율은 10%도 안 되는 서구에 비해 높은 편이다. 서양과 동양의 중간에 위치하는 특이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 노미 도시타카. <혈액형 비즈니스 파워(동서고금 번역)>

일본보다 B형적인 한국

▲ B형 지도. 유럽에는 B형이 거의 없지만 아시아 쪽으로 올수록 B형이 많아진다.
ⓒ 오기현
취재진은 지난 7월 초, 혈액형별 교육을 실시하는 일본 사이타마현의 한 보육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만난 한 혈액형 이론가는 한국인의 B형 혈액형이 일본보다 많은 것은 '유의미'한 일이며, 일본의 A-O-B-AB 혈액형간의 비율은 4:3:2:1로서 완벽하게 균형이 잡혀 있다고 이야기했다.

도쿄에서 만난 한 의사는 한국은 일본보다 B형 혈액형이 약 10%나 많으며 AB형이 세계에서 제일 많은 나라라는 사실을 강조했다(실제로 A-O-B-AB 혈액형간의 비율이 일본은 37.3%-31.5%-22.1%-9.1%이고 한국은 34%-28%-27%-11%였으며, 한국의 B형 비율은 일본보다 약 5% 더 많다).

취재 당시에는 그 말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취재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인종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의 말을 종합하면, 한국은 일본보다 'B형'과 'AB형'이 많다(일본에서는 B형뿐만 아니라 AB형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일본은 혈액형에서조차도 4:3:2:1이라는 질서와 균형을 보여준다. 한국은 일본보다 B형적인 요소가 월등히 강하다.

심심풀이 혈액형 성격학, 언제든지 무기로 돌변?

따지고 보면, 일본의 혈액형 비율은 한국과 도토리 키재기다. 일본은 한국보다 A형이 3% 정도 많지만 구미 각국에 비해서는 훨씬 적다. 또 B형은 구미에 비해 월등히 많다. (영국의 혈액형 비율은 A-O-B-AB가 43.4%-46.3%-7.2%-3.1% 비율이다) 우연의 수치인 4:3:2:1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혈액형별 성격분류를 신뢰할 경우 그 최후의 피해자는 우리 한국인이 될 수 있다. 인종주의의 타깃이었던 B형이 상대적으로 많고, 일본인들이 싫어하는 AB형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기 때문이다.

혈액형별 성격분류의 부정적인 면만 볼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잘 활용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비과학적인 믿음이 언제든지 약자에 대한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현대적인 사고체계를 세워나가야 한다. 혈액형을 재미로 보기에는 그 피해가 너무 심각하다. 유럽에서 시작되어 일본에서 만개한 '인종주의적 혈액형 성격분류론'은 언제든지 우리를 피해자로 몰아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오기현 기자는 SBS 스페셜 담당 PD이다. 8월 20일 밤 11시에 방송되는 '혈액형의 진실'이라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취재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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