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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인사 기사가 삭제돼 발매된 <시사저널> 870호.
<시사저널>이 삼성그룹의 인사 문제를 다룬 기사로 인해 내홍을 겪고 있다.

이윤삼 편집국장이 '삼성 인사' 기사가 삭제된 것에 항의해 19일 사표를 낸 가운데 <시사저널> 편집국 기자들은 21일 오전 비상총회를 열어 이 국장의 복귀와 금창태 사장의 퇴진, 최고경영진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시사저널> 기자협의회와 경영진의 얘기를 종합하면,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의 인사 스타일을 비판한 기사가 이번 사태를 촉발시켰다.

이아무개 기자가 쓴 3쪽 분량의 기사는 당초 19일 발매예정이었던 <시사저널> 870호에 '이학수 부회장 권력, 너무 비대해졌다'는 제목으로 실릴 예정이었으나 16일 저녁 심상기 회장이 주재한 간부회의를 거쳐 인쇄 직전에 삭제됐다.

<시사저널> 기자협의회에 따르면, 광고팀장이 17일 새벽 인쇄소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이미 제작부서와 얘기가 다 됐으니 기사를 빼고 광고를 넣어달라"고 요구했고, 인쇄소는 이 말을 듣고 기사를 삭제했다.

이 국장은 그때까지 "내가 안팎의 외압을 모두 꺾었다"고 기자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는 17일 오후에야 기사가 삭제된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이 국장은 19일 오전 편집국 회의에서 '기사 삭제'에 대한 항의로 사표를 냈고, 경영진은 20일 정오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의 단초를 제공한 기사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시사저널> 기자들에 따르면, 문제의 기사는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이 계열사 사장단 인사에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반발하는 목소리가 그룹 내부에서부터 흘러나온다는 내용이다.

기사는 "삼성그룹의 주요계열사 사장단이 이 부회장과 인연이 깊은 사람들로 채워진 지 오래이고, 최근에는 CFO들마저 전략기획실 재무팀 출신 인사로 배치되고 있다"는 삼성그룹 내부인사의 전언과 함께 이 부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인사들의 실명과 사진을 실었다.

이 부회장이나 삼성그룹에 달갑지 않은 기사이지만, 지난해 'X파일'처럼 경천동지할 만한 특종도 아니고 이 회사 출입기자들에게는 오래 전부터 상식으로 통하는 내용을 기사화했을 뿐이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삼성그룹은 이 기사에 대해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시사저널>의 이 기자는 15일 오후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의 반론을 받기 위해 전화를 걸었는데, 두 시간도 안돼 전략기획실 간부들이 회사로 직접 찾아와 기사를 빼줄 것을 요구했다.

<중앙일보> 출신 사장이 기사 삭제 주도

삼성그룹의 한 간부는 이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기사는 이건희 회장에 대한 기사보다 우리에게는 더 아프다. 기사를 빼달라"고 호소했다. 기사에 이름이 거론된 당사자들이 명예훼손으로 거액의 소송을 걸 수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금 사장도 이 국장과 이 기자를 직접 만나 "기사를 안 내보내는 게 좋겠다"고 말했고, 16일 오후에는 심상기 회장이 이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라는 게 원래 잡음이 많고, 더구나 사기업의 인사 내용이라면 기사화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 국장은 경영진의 이 같은 요구에 불응했고, 경영진이 자신의 동의 없이 기사를 삭제하자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삼성이라는 거대자본이 독립언론의 편집권에 영향을 미치는 매커니즘의 한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라며 이번 사태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기자들은 더 나아가 <중앙일보> 출신의 금창태 사장에 대해 "<시사저널> 사장보다 옛 삼성그룹맨으로서의 자의식이 여전히 그의 머리를 지배하는 게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1965년 <중앙>에 입사한 금 사장은 80년 사회부장, 85년 편집국장 직무대리, 2001년 사장을 지내는 등 오랫동안 <중앙>에서 일하다가 2003년 4월 <시사저널> 사장으로 부임했다.

기자들이 20일 발표한 성명서에 따르면, 금 사장은 이전부터 삼성그룹 관련 기사가 기획될 때마다 기사를 뺄 것을 요구하거나 자사 기자의 기사를 '함량미달'이라고 깎아 내렸다고 한다.

2005년 4월 <삼성 구조본 '매직 파워'의 비밀>, 2006년 2월 <구설 오른 '이건희 슬로프'> 등의 기사가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나왔다. 2005년 9월 책의 90% 이상을 삼성 관련 기사로 '삼성' 특집호가 나온 뒤 이 국장이 삼성과 회사 측으로부터 적잖은 압력을 받았다는 얘기도 나왔다.

편집국의 한 기자는 "'삼성' 기사들로 인해 누적된 갈등이 이 국장의 사퇴로 이어졌다"며 "금창태 사장이 퇴진하지 않으면 똑같은 문제가 계속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게 기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금 사장은 21일 <오마이뉴스> 기자를 만나 "익명의 제보로 취재가 이뤄졌고, 기사의 정확성에도 문제가 많아서 보충취재를 하라고 했지만 (이 국장이) 듣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반면, <시사저널> 기자협회장을 맡고 있는 안철흥 기자는 "삼성그룹의 반론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는 기사였다"고 말했다.

금 사장은 지난해 12월 경영진과 기자들이 체결한 합의서("대표이사는 편집·기획 내용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회사에 손실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등의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편집권에 관한 국장의 권한을 존중한다")를 근거로 경영진의 판단이 옳다는 논지도 폈다.

삼성그룹 "해당 언론사에 찾아가서 이해를 구하는 건 당연"

▲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건물앞에 내걸린 삼성그룹 깃발.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 조항을 뒤집어보면 해당 기사가 삼성그룹 임직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곧바로 이어질 소송으로 인해 회사가 손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에서 기사가 삭제되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합의서에는 "편집국의 질서와 문화를 존중한다"는 조항도 있다. 기자들의 입장에서는 금 사장이 편집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편, 삼성그룹은 이번 사태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언론사의 내부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럼에도 삼성그룹이 기사 삭제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점에서 불편한 감정도 내비치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시사저널> 기자들과 경영진 사이의 갈등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면서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이어 "<시사저널>이 최근 삼성그룹 인사와 관련해 취재를 요청해 온 것은 사실"이라며 "인사에 불만을 품은 제보자의 일방적인 주장에 일부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단의 실명이 거론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룹 사장들의 명예훼손이 우려되는 기사에 대해 홍보팀 사람들이 해당 언론사에 찾아가서 정중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면서 "이를 두고 마치 기사 삭제에 우리가 영향력을 행사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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