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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제법 아이들을 잘 다룬다(?)고 생각하며 지내왔다. 그런데 요즘 내 아이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돌이켜보니 아이의 키가 나보다 커지는 그 순간부터 그랬지 싶다.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고. 흔히들 “아이들만큼은 부모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에게도 그대로 다가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요즘 우리 아이는 완전히 투덜이가 되었다. 한 날은 집사람에게 자기의 방의 휴지통을 비워 놓으란다. 하도 어이가 없었지만 못 들은 체하였다. 학교에 돌아와서 자기 방 휴지통을 비워 놓지 않았다고 집사람을 나무란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다음날 집사람이 휴지통을 비워 놓았다. 만약 네 방 휴지통은 네가 비워야 하는 것 아니냐면, “그래, 알았다”고 말은 하겠지만 그 말투가 곱지 않았을 것이다. 말투가 그게 뭐냐고 하면 곧바로 맞받아친다. “내가 비운다고 그랬는데 뭐가 문제냐”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이제 매를 들 때도 지났고 그렇다고 같이 맞서자니 소리만 더 높아질 것이고. 해서 그냥 슬며시 빠지고 만다. 하지만 걱정은 많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며칠 전 이청준의 <축제>를 읽고 쓴 독후감을 보고나서 마음을 놓았다.

▲ 이청준의 <축제>
ⓒ 정호갑
1년 전만 하여도 나는 일가친척들과 연락을 일체 하지 않고 나 혼자 부산에서 자그마한 단칸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작년에 할머니 장례식을 치르면서 준섭이 삼촌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삼촌이 나보고 같이 서울로 올라가 살자고 하기에 마지못해 가는 척 하며 삼촌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살게 되었다. 1년 째 서울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 곳 생활은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 내가 삼촌네와 같이 살게 되면서 삼촌이 큰 아파트 하나를 구했는데 내가 살고 있던 단칸방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뿐 만이랴. 내가 살았던 동네와는 달리 예쁜 옷들도 많이 팔고 맛있는 음식들도 많이 판다. 서울에 오길 참 잘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서점에 갔는데 삼촌이 얼마 전에 쓴 소설 <축제>가 베스트셀러에 올라와 있었다.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삼촌이 쓴 소설은 다 읽어왔던 나라 이번에도 이 소설을 사서 읽어 보았다. 이 책을 읽으니 지난 일들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 아주 어릴 적에 할머니와 같이 살다가 집을 나갔다. 돈을 많이 벌어 와서 할머니와 즐겁게 지내려고 나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하고 결정한 것인데, 나중에 할머니 장례식 때문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친척들은 모두 나를 욕하였다. 하긴, 어릴 때 나가서 할머니 걱정만 시켜드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왔으니 욕 들어먹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나도 나 나름대로 잘 살아보자고 한 것인데 아무도 이것을 인정해주지 않으니 섭섭하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그 때 집을 나간 뒤 곧장 부산으로 갔었다. 일단, 할머니 집에서 가지고 나온 돈으로 자그마한 단칸방을 얻었다. 그리고는 일자리를 얻으려고 나름대로 애 써봤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나이도 어리고 여자라 그런지 일자리를 얻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였다. 그러던 중 어렵게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고 틈틈이 돈을 모아 할머니께 보내드렸다. 그렇게 세월이 몇 십 년 지난 것이다.

나도 할머니를 되는 대로 빨리 찾아 가 뵈려고 했지만 차마 할머니 얼굴 바라보기가 부끄러워 그렇게는 하지 못하였다. 잘 살아보겠다고 할머니 돈은 가지고 나왔는데, 이 모양으로 어떻게 할머니 얼굴을 본다 말인가. 그래서 준섭이 삼촌께 돈을 얻으러 찾아갔었다. 소문에 의하면 준섭이 삼촌이 쓴 소설 <눈길>이 세종문학상을 탔다고 하기에, 상금도 받았겠지 하고 찾아갔었다. 그 돈 가지고 사업해서 돈 많이 번 다음에 할머니께 당당한 모습으로 찾아가려고. 하지만 준섭이 삼촌은 돈을 한 푼도 빌려 주지 않았다. 솔직히 그 때 준섭이 삼촌을 마지막으로 믿고 있었는데 그랬던 삼촌마저 그렇게 해서 많이 속상하였다. 하지만 나는 오로지 할머니 생각만 하며 살아갔다. 틈이 날 때마다 준섭이 삼촌이 쓴 소설들을 읽으면서. 준섭이 삼촌은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가족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준섭이 삼촌이 나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니 많이 속상하였다.

그렇게 세월은 또 흘러갔고 나는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곧장 할머니 집으로 찾아갔다. 할머니 집으로 찾아가니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할머니께 죄송했다. 할머니는 나를 그렇게 기다려 주셨는데 나는 그런 할머니 마음도 모르고 이제야 찾아왔으니. 할머니께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었다. 친척들도 모두 나보고 욕만 하였다. 어릴 때 할머니 돈을 훔쳐서 집나간 나쁜 년이라고. 하지만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다. 할머니께서는 나를 귀여워 해주시고 엄청 잘해주셨는데 나는 어떻게 보답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도시로 나가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은혜에 보답을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 할머니 장례식에서 장혜림 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이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삼촌이 나를 한 가족으로 생각해주었고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할머니 역시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이런 것들을 알게 된 후 나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삼촌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할머니에게 고생만 시켜드린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할머니 장례식에 올 때만 하여도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가족으로 생각해주지 않았기에. 하지만 나는 할머니 장례식을 치르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 후부터 지금까지는 모든 친척들과 연락을 하며 잘 지내고 있다. 그리고 나도 준섭이 삼촌처럼 할머니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볼 생각이다. 내 자랑스러운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줄거리를 쓰고 자기의 느낌을 조금 덧붙여 놓은 것이 아니라 용순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 먼저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글을 쓰는 것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반항만, 불평만 하는 줄 알았는데.

또 하나 힘든 삶을 살아간 용순의 입장에서 글을 다시 전개시켰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사춘기인 현재의 자기 입장과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용순은 의붓어머니 밑에서 가족으로 함께하지(할머니만 용순이에게 따뜻하게 대해 줌) 못하고 마치 식모살이 하는 것처럼 힘든 삶을 살았다. 어려운 사람의 입장에 서서 글을 펼치면서 생각을 말하고 그리고 풀어나가는 것에 믿음이 갔다.

용순이의 꼬이고 서운한 마음이 풀어지는 것도 자기가 가족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이다.

<오마이뉴스>에서 좋은 기사 한편을 읽었다. 나 또한 자식을 키우고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기에 아이 문제에 대해서는 늘 눈길이 간다.

"방황하는 사춘기 자식에게 부모가 처방할 수 있는 최고의 처방과 명약은 강요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부모님들은 내편이 되어 줄 거라는 확실한 믿음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윤수 기자님의 <가출한 딸을 15개월 만에 만났습니다> 기사에 있는 글이다. 평소 임 기자님의 기사를 읽으면서 그 삶을 따르고 싶었기에 울림이 더 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기사는 나에게 다시 기다림과 믿음이 아이들의 교육에 가장 좋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아이에게 많은 잔소리를 하면서 이것저것을 요구하며 가르치려고 하기보다는 아이가 기분 좋을 때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며 슬며시 책상에 한 권의 책을 놓아두는 것이 아이의 교육에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우리 아이들을 믿고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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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행복에서 물러나 시골 살이하면서 자연에서 느끼고 배우며 그리고 깨닫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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