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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남편과 같은 회사에 다니는 호주 직원의 저녁 초대를 받았다. 집에서 마련하는 식사라 함께 마실 음료수와 와인을 한 병 준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외곽에 자리잡은 그 사람의 집은 들어서는 순간 마치 고즈넉한 산사에 온 것처럼 바깥 세상과는 차단된 듯 운치가 있었다.

서양사람들은 집으로 사람을 부를 때 안주인은 앉아서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고 주로 남자가 음식도 만들고 손님들의 빈잔을 채우는 등 부지런히 식탁 수발을 든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곤 한다.

실상 여러 번 들었던 말이라 이제는 별로 새롭지도 않지만, 그 집 역시 남편이 주가 되어 부엌을 들락거리며 손님접대를 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인상적이었다.

부인 말에 의하면 그 집 남편의 주특기 요리는 인도와 태국 쪽의 고유음식이란다. 카레와 코코넛,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나라의 전통 소스를 가미하여 매콤 달콤 새콤한 맛 위주로 풍성하게 차려진 그 날의 식탁은 순전히 남편 혼자의 솜씨라고.

아내가 이렇게 추켜세우자 그는 평소에도 음식 만들기를 좋아해서 요리책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실습도 하고 이따금 응용도 해서 가족들에게 맛있는 것을 만들어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어 수준급의 요리 솜씨뿐 아니라 집안 곳곳에 장식되어 있는 크고 작은 도자기들의 다양한 문양도 남편이 직접 고안해서 그려넣은 것이라며 부인이 또 자랑을 했다.

도자기에 새겨진 섬세하고 독특한 감각이 도저히 아마추어 수준이 아닌 것 같다고 칭찬하자 실은 도안 작업을 10년 넘게 해왔다며 내친 김에 자신의 작업실을 보여주겠노라고 했다.

정원 한 켠에 마련된 정자에 잇대어 지어진 10평 남짓한 공간에는 벌거벗은 모습으로 옷이 입혀지기를 기다리는 항아리를 비롯해서 장식장에 들여앉힐 대형 접시, 팔각형의 과자 상자 등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들이 즐비했다.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염료와 크기 각기 다른 붓들, 아이디어 발상에 도움이 될 디자인 계통의 미술서들로 빼곡히 메워진 그의 작업실은 소박한 아마추어 작가로서의 열정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혼자 익힌 도자기 공예가로서 10년 남짓 제작한 그의 작품은 200여 점에 이른다는데 한 작품을 끝낼 때마다 카메라에 담아 모아 둔 사진의 부피만도 여간 아니었다.

그의 작품을 찬찬히 둘러보노라니 직장에서의 중간 간부로서 책임이 적지 않은 자리에 있으면서 언제 이렇게 평생 취미를 개발했는지 감탄조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온 그의 대답은 요리는 주말에 한번씩 가족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고, 도자기 도안은 퇴근 후에 한두 시간씩 틈틈이 하다 보니 어느새 적지 않은 숫자를 가지게 된 것이란다.

직장 일을 마친 후 다섯 시 반 무렵에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기 전 한두 시간을 자신의 취미에 몰두하며 생업과는 또 다른 성취를 이루어가는 삶이란 누구나 꿈꾸며 누리고 싶어하는 풍성하고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40줄에 들어선 직장 남성으로서 가정과 일, 이렇다할 취미생활까지, 속된 말로 인생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그 사람의 사는 모습만 보고 호주 중년 직장인들의 평균적인 삶을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를 통해 호주 중산층의 한 전형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이 꾸려가는 삶과는 동떨어진 비교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비슷한 연배의 한국 중년 남성의 일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같은 출근길을 시작으로 자정이 넘어서야 곤죽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지친 일상의 반복, 지속적으로 공을 들여 내 것으로 할 만한 취미생활은 아예 엄두를 낼 처지가 못되니 여가가 생겨도 으레 술자리로 보내는 타성, 일주일 동안 가족들과 얼굴 맞대는 날이라곤 손꼽을 정도의 공허함 등, 편견이라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이 같은 비생산적인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었다.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한국도 의식에 변화를 드러내고 있지만,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삶 또한 물질적 풍요에 대한 갈구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그렇다치더라도 새벽잠을 설쳐가며, 혹은 올빼미족이 되어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을 여가 선용으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가 바로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직장일은 아니지만 퇴근 후 외국어나 자격증 취득에 매달리는 또 다른 의미의 노동의 시간으로 고단한 삶을 보낸다면, 삶의 질이나 풍요의 개념에 비추어 여전히 각다분한 생활의 연속일테니.

선진국 국민들의 삶의 양태에서 느끼게 되는 '체감 웰빙'이라 할까, 이른바 '잘 산다'는 뜻은 물질적 풍족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한국과 호주, 두 나라 직장 남성들을 비교해 볼 때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아직도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있다. 남보다 좀 낫게 살든, 그렇지 않든 지금보다 조금 더 잘 먹는 문제가 초미의 관심이라는 얘기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내 남편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가족들을 위해 일주일에 단 한끼 밥이라도 직접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치열한 현실은 이렇다 할 취미를 가질 정신적 여유조차 녹록치 않다.

남의 나라살이에서 오는 지친 심신과 습관화된 긴장, 항시 따라다니는 언어적 부담과 문화적 장벽에 맞서며 현지인들보다 두 배, 세 배 노력할 수밖에 없는 이민자의 처지에서, 직장에서는 같은 직급을 가진 내 남편이지만 속속들이 호주 사람인 그 사람처럼 여유로운 삶을 '엔조이' 한다는 것은 아직은 사치에 가까운 일이니.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늦은 밤, 그 집을 나서면서 한국 사회가 추구하는 선진국이란, 소위 말하는 웰빙이란 어떤 기준을 두고 칭하는 것일까 문득 의문스러워졌다.

혹여 물질적으로 많이 가지는 것만이, 자기 계발이란 미명하에 은연 중 돈 버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오히려 먹고 살만해질수록 더욱 굳어져 가는 것 같은 우려도 든다.

'잘 산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한 인간의 생이 삶의 어떤 요소에도 치우침 없이 균형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물질적 소유와 정신적 여유, 나 이외의 존재에 대한 배려와 나눔을 자연스럽게 배양하는 삶의 습관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른바 선진국의 궁극적 모델은 결국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전형이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글 | <한민족 네트워크> 4/5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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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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