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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정규명 박사. 정규명 박사는 동백림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970년 특사로 풀려난 뒤 독일에서 민주화 및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지난해 12월, 지병으로 별세했다.
ⓒ 정일련씨 제공
"아버지는 그저 평범한 물리학자이셨을 뿐이다."

지난달 말,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가 국제적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졌던 1967년 동백림 사건이 확대 과장됐다고 발표한 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고 정규명 박사의 아들 정일련씨가 한 말이다.

재독 물리학자이자 재야운동가였던 고 정규명 박사는 동백림 사건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물리학 박사학위를 끝마쳐 가던 평범한 유학생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졸업 후, 1958년 독일유학을 시작한 고 정규명 박사는 장인의 부탁을 받고 동베를린 소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처남이 북에 생존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이들을 만나기 위해 1965년 북한을 방문했다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었다.

당시 재판에서 고 정규명 박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3년6개월간 수형생활을 하다 1970년 말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1971년 독일로 돌아온 고 정규명 박사는 학업을 마친 후 민주화, 통일운동에 투신, 민주사회건설협의회 회장, 해외민주화운동 연합단체인 한민련 유럽의장 등을 역임했으며 전신 신경마비 등 지병으로 오랜 병고를 치르다 동백림 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기 한 달여 전인 지난 2005년 12월 별세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동백림 사건의 재평가 소식을 듣게 된 가족들의 심정을 어땠을까. 정일련씨는 지난 7일(현지시간) 그의 베를린 자택에서 있었던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진실위 조사결과에 대해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반가운 소식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번 발표가 난 만큼 피해자들에 대한 정식사과와 아버지를 포함한 관련인사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를린에서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는 정일련씨는 아버지가 고초를 겪는 것을 보면서 성장한 탓에 한때 한국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기도 했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히기도 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내 아버지는 원래 간첩이 아니었다"

▲ 고 정규명 박사의 아들 정일련씨. 정씨는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의 발표에 환영하면서도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공개사과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 강구섭
- 38년 만에 동백림 사건이 북한과 단순 접촉한 사람들에게까지 무리하게 간첩죄를 적용해 사건의 범위와 범죄사실을 확대 과장한 것이었다는 재평가를 받았는데, 관련자의 가족으로서 심정이 어떤가.
"발표 소식은 반가웠다. 그렇지만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번 발표로 인해 특별히 새로워진 것도 없지 않은가. 또 이제야 진실규명 작업이 이뤄졌다는 것도 문제다. 늦은 감이 많다. 여하튼 이번 발표가 난 만큼 피해자에 대한 정식사과와 명예회복이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 고 정규명 박사는 당시 어떻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던 건가.
"아버지의 장인어른인 외할아버지께서 6.25때 월북한 두 아들이 북한에 생존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하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베를린 장벽이 생기기 전이라 동서 베를린 간, 왕래가 가능할 때였는데 아버지가 동베를린에 있던 북한대사관에 가셔서 두 분의 생존을 확인하셨다. 그 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오빠들을 만나러 가자고 제안하셨고, 그렇게 두 분이 가족을 만나고 돌아왔다. 그게 전부다. 동백림 사건으로 연루될 당시 아버지는 박사학위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동백림 사건이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는 1958년~1967년 사이 독일, 프랑스 등 유럽에 거주하던 유학생, 교민, 학자 등 200여명이 동서독 분단 당시 동베를린에 소재한 북한대사관을 통해 북한과 접촉하거나 북한을 방문한 후 대남적화 활동을 벌이다 적발되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이 사건 관련, 재독음악가 고 윤이상 선생을 비롯, 독일에서 거주하던 17명을 포함해 총 30여명의 유럽 거주 유학생, 교민, 예술가 등이 한국으로 연행됐다.

당시 사법부는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모두 무죄를 선고했지만, 반공법 위반 등을 적용해 2명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등 총 36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1970년까지 모든 관련자들이 석방됐다.

지난 1월 26일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는 사건 연루자들이 동베를린, 북한 등을 방문하는 등 당시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은 인정되나 사건이 확대 해석된 채 무리한 법적용이 이뤄진, 정치적 악용의도가 짙은 사건이었으며 대규모 간첩사건은 아니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 사건 이후 독일에서의 삶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당시 높은 경쟁률을 뚫고 독일학술재단(DAAD)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로 공부를 하러 온 학생이었다. 동백림 사건 이전에는 정치적 활동은 전혀 하지 않으셨는데 동백림 사건 이후로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갖고 관련 활동에 적극 참여했고, 90년대 이후에는 통일운동에 적극 관여하셨다."

- 원래 학업을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것 아닌가.
"물론이다. 당시 학위를 거의 마쳐가는 상황이셨던 아버지는 모교인 서울대 교수직도 제안 받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건 이후 한국에 대해 한이 많은 듯했고, 한국에 갈 생각은 전혀 안하셨다. 하지만 독일에서 연구자로서 잘 풀린 것도 아니었다. 이쪽에서 잘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쌓인 감정이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학연구소 연구원 생활을 마치신 이후 아버지는 독일에서 전공과 무관한 회사생활을 하셨고 상점, 두부공장을 하시기도 했다. 학위마치고 돌아가셨으면 학생들 가르치면서 순탄하게 생활하셨을 분인데 동백림 사건 이후로 삶이 이렇게 된 것이다. 91년도에는 목 아래 전신신경마비가 와서 수개월간 고생하신 이후 계속 휠체어와 지팡이에 의지해 생활하시다가 작년에 돌아가셨다."

- 동백림 사건으로 어머니도 고초를 겪으신 것으로 아는데.
"북한에 갔다 오신 후 함께 연루되셔서 고생 많이 하셨다. 1년간 감옥에 계셨는데 감옥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안하셨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는 잘 모른다. 어머니는 그저 지극히 평범한 분이다. 독일로 돌아오신 이후에도 어머니는 줄곧 아버지와 가족 뒷바라지만 하셨다."

"아버지 고초 겪는 것 보면서 한국에 대한 원망 키웠다"

▲ 국정원 과거사진실위는 지난달 말, 동백림 사건이 확대 과장되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사진은 관련뉴스를 보도하고 있는 KBS뉴스 화면캡처.
- 사건 발표 후 고 윤이상 선생은 독일에서 빨갱이로 낙인찍혀 어려움이 많으셨다고 하는데 정규명 박사는 어땠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찌 어려움이 없었겠나. '독일에서 정규명 박사라는 사람은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한국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에도 무슨 일만 생기면 아무런 연관 없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론됐었다. 89년 임수경씨가 베를린을 통해 북한에 갔을 때도 그랬고, 서경원 전 의원 방북사건 때도 아무 이유 없이 아버지 이름이 신문에 나온 것을 보고 외할머니가 전화를 하시기도 했다."

- 가족으로서 정일련씨 또한 독일생활이 순탄치 않았을 것 같다.
"특별히 아주 나쁜 일을 경험했던 기억은 없다. 당시 남북한이 갈라져 있던 것처럼 교포사회도 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항상 같이 활동하던 분들과 지내셨고 나도 같은 친구들하고만 주로 지냈다. 10살 무렵에 또래 한국 친구가 두 명 생겼는데 늘 그 친구들하고만 지냈다."

- 아버지가 당시 정권에 의해 감옥살이를 하는 등 고초를 겪는 걸 보면서 한국에 대한 반감은 없었나.
"어렸을 적에는 정말 한국인, 한국과 관련된 거는 무조건 싫었고 무조건 피하려고 했다. 무의식에 남아 있는 기억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서른이 될 때까지 양복을 입은 한국남자를 보면 적지 않은 거부감이 있었고 기분이 아주 안 좋았다. 그러다가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한국에 대해 마음이 열렸고 한국출신 음악가들을 만나면서 점차 다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국에 대해 이전처럼 무조건 싫은 마음은 많이 없어졌다."

- 한국에는 다녀온 적이 있는가.
"94년에 처음 다녀왔고 2003년 무렵에 두 번째로 다녀왔다."

"국정원 관계자에게 '잘못했다'는 말 듣고 싶다"

- 아버지로서의 정규명씨는 어떤 분이었나.
"학업에 열중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기억난다. 아버지 방에는 늘 뜻을 알 수 없는 복잡한 수식이 써 있는 수많은 쪽지가 붙어있었고 공부하시는 것을 즐기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성적인 면을 갖고 계셨지만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셨고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셨지만 필요할 때는 간결하면서도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 고 정규명 박사와 부인 강혜순 여사.
ⓒ 정일련씨 제공
- 독일에서 태어난 2세라고 느끼기 어려울 만큼 한국어를 잘 하시는 듯한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
"아버지가 옥고를 치렀던 3살 반 때부터 7살 무렵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풀려나신 후 다시 독일로 왔는데, 당시는 동양인이 많지 않던 시기였기도 하지만 어렸을 적에는 늘 나 혼자였다. 그 속에서 한국어를 거의 하지 않으면서 한국말을 거의 다 잃어버렸다. 19살 때 다시 관심을 갖고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함께 교민문화행사에 자주 참여했는데 행사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전통음악을 접하면서 매력을 느꼈고 그 때부터 풍물 등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때부터다."

-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활동할 의향도 있는지.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아버지가 고생하셨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여전히 억울한 것,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과 내 삶을 일정 부분 분리해서 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한국사람, 정권, 문화는 각각 다른 것이고 서로 분리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차츰 한국에 대한 갈등이 많이 줄어들었다."

- 정부차원의 공식적 사과와 보상을 요구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 건가.
"아버지뿐 아니라 동백림 사건에 관련되어 피해를 당하신 분들이 많다. 아버지는 대표적 희생자의 한 분이다.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당장은 정부나 사건 관련기관인 국정원 관계자로부터 시원하게 '잘못했다, 아버지가 하신 일은 나쁜 일이 아니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당장 이런 발표도 신문을 통해서나 듣지 정부나 국정원 등으로부터 통보를 받은 적이 없다. 명예회복 관련 계획 중인 것이 있는데 차차 실행해 옮기려고 생각 중이다."

▲ 정일련씨는 작곡가다. 그는 한국의 풍물에도 관심이 많아 김덕수 사물놀이패로부터 사물놀이를 배운 뒤 베를린에서 장구교습 교실을 열기도 했다. 그의 베를린 자택에 놓여있는 한국 전통악기들.
ⓒ 강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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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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