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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영주 시내

주황색 신호등이 꿈뻑일 뿐, 4차선 차도는 사람의 통행을 인위적으로 막지 않는다. 경북 북부 지역의 시가지들은 대개 이렇게 읍내 같은 편안한 느낌을 준다. 길을 묻다 보니, 봉화 가신다는 할머니와 자연스레 동행이 되었다. ‘니껴?’라는 이쪽 사투리가 이채로웠다.

“어디서 왔습니껴?” “아, 인천에서..” “멀리서도 왔네. 희방사에는 무슨 일로 갑니껴?” “놀러요.” “예쁜 처녀랑 같이 가야지, 혼자서 재밌겠니껴?” 이런, 짖궂기도 하셔라.

영주의 시내교통은 영주여객이 전적으로 맡고 있다. 시가지를 돌아다니는 노선은 채 열 개가 되지 않는데, 흰색 파란색 도색이 되어 있다. 시가지 바깥으로 향하는 노선들은 흰색 노란색 도색이 되어 있다. 희방사로 향하는 버스 25번은 그 중 하나로, 안정면과 풍기읍을 거친다. 인삼을 그린 풍기역 앞의 급수탑이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소백산 풍기온천에서 내린다. 아래 철로가 있는 것이 심상찮아 기사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여기 아래로 내려가면 희방사역이란다. 어쩐지, 여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학생 둘이 여기서 버스에 올라탄다. 희방사역에 내려 여기까지 걸어온 다음 버스를 타고 희방사 앞까지 갈 요량이겠지.

희방사역의 기억

작년 겨울, 청량리에서 새벽 일찍 출발하는 기차를 탄 적이 있다. 빨리 가려 했다면 버스를 탔겠지만, 그보다 풍경을 음미하려고 여러 역들을 경유하는 기차를 골랐다. 이 선택은 환상적이었다!

어두움을 헤치고 검은색 하늘을 조금씩 남색 그리고 진파랑으로 바꾸는 태양은 팔당에 가서야 조금씩 그 양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얀색 글씨에 검은색으로 쓴 '팔 당 역' 아래 '八 堂 驛' 아래 'Paldang Station', 그리고 그 큼지막한 역명판에 비하면 지나치게 자그마한 역사가 뒤로 한강을 보이고 있었다.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강과 그 위에 미처 녹지 않은 눈과 잎도 없으면서 가지를 뻣뻣하게 쳐들고 있는 나무와 강 사이에 들어서있는 섬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겨울의 풍경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중앙선을 지나는 풍경 하나하나를 음미하다가, 마침내 죽령역. 죽령 고개를 넘기 전 숨고르기라도 하려는 모양인지, 열차가 정차하였다. 네칸짜리 열차가 서있고, 죽령역이 서있고, 역무원이 서있고, 내가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 아래로 소백의 산줄기가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죽령을 지나 저 산 너머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네칸짜리 열차가 깜깜한 어둠을 지나 처음 만난 것은, 뒤로 높은 봉우리를 끼고 있어 마치 절벽에라도 위태위태하게 서있는 듯한 아담한 희방사역이었다. 깜깜한 어둠을 뚫고 만난 그날 희방사역의 풍경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그 희방사역, 지금은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다. 나는 옛 선인들이 걸었을 죽령옛길에 나의 발자국을 하나하나 더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길가에는 사과가 탐스럽게 열렸다. 고운 분홍 빛깔에 복숭아로 착각할 뻔했다. 사과라는 과일도 탐스러워 보일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맛은 어떨까?

▲ 희방사역 내려가는 길에 탐스럽게 열린 사과
ⓒ 정국진
희방사역, 옆을 지나는 고속도로

열차 안에서 희방사역 안쪽 역사만 볼 수 있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지금은 희방사역 곳곳을 둘러볼 수 있음은 물론이요, 희방사역에서 반대편 소백줄기도 바라볼 수 있다. 소백산의 가운데 높이쯤 서 있는 희방사역이 간신히 너른 공간을 찾아 서 있었고 거기에 바싹 붙어 몇 개의 철도가 산줄기를 따라 놓여져 있었다.

여기 야트막한 봉우리 뒤편에서 봉우리 옆선을 따라 철도는 급하게 휘어 들어온 다음, 저기 야트막한 봉우리 뒤편으로 봉우리 옆선을 따라 휘어나간다. 그리고 이 풍경을 우악스러운 저 콘크리트 더미가 망쳐놓았다.

2001년 12월 개통된 중앙고속도로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강원도와 경북 북부 지역 경제에 활력을 주며, 이 지역의 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녁은 곡선을 모른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모른다. 고속도로에 있어서 최고의 미덕은 속도이며, 이녁이 죽령을 넘을 때도 이러한 미덕에 충실하다. 그래서 이녁은 조화를 모른다. 주변 자연 환경이나 풍경이 어떻건 상관없다.

사실 내가 죽령을 처음 넘은 것은 원주에서 영주까지 바로 저 콘크리트 더미 위로 지나갔었던 때이다. 그 위를 지나는 버스 안에서 볼 수 있는 건 옆 차선의 자동차, 앞으로 매끈하게 잘 닦여진 도로, 이것들이 단절시킨 반쪽짜리 풍경, 나는 잠이 들었다. 두 번째로 죽령을 넘었을 때, 중앙선 무궁화호 안에서 보았던 아름다움이 유난히 강렬했던 것은 그 덕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저 녀석이 망쳐놓은 것을 보상할 순 없지만….

▲ 기찻길 위편으로 중앙고속도로가 지난다. "여기 야트막한 봉우리 뒤편에서 봉우리 옆선을 따라 철도는 급하게 휘어 들어온다. 그리고 이 풍경을 우악스러운 저 콘크리트 더미가 망쳐놓았다."
ⓒ 정국진
인삼갈비를 먹으며 주세붕을 생각하다

풍기읍내에는 마침 장이 열렸다. 인삼상설시장도 보이고, '중국인삼 몰아내자'는 구호도 보인다. 풍기역 급수탑과 스탬프에 그려진 인삼은 공연한 것이 아닌 것이다.

▲ 풍기역 급수탑. 풍기인삼이 그려져 있다.
ⓒ 정국진
소백산의 영(靈)은 유난한 데가 있나보다. 신라시대부터 당나라에 이 지역의 산삼 200근을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로도 이 지역에는 산삼을 캐며 생활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조선 중종 때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간간이 나오는 산삼으로는 백성들의 안정적인 삶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대량으로 인삼재배를 시작하게 한다. 타 지역보다 수확량은 많지 않았지만 약효는 유별났던지 조정에서는 풍기인삼만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주세붕! 최초의 사액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덕에 국사 교과서 한켠을 장식하는 인물이다. 훗날 당쟁의 온상으로 변질되긴 하지만, 성현에 제사를 지내고 상대적으로 교육의 기회가 적은 지역민들을 위해 유학을 보급하려는 서원의 목적까지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훗날 이황의 건의로 국왕이 사액을 내려 소수서원으로 이름이 바뀐 백운동서원은, 여기서 멀지 않은 영주시 순흥면에 위치하고 있다.

애민(愛民)에 바탕해 인삼을 재배하고 서원을 세운 주세붕. 덕분에 현대를 살고 있는 지역민들에게까지 그 사랑이 미치고 있다. 풍기인삼과 소수서원이 창출해 내는 소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인삼갈비 식당 주인은 주세붕에게 감사할 일이다.

보문역도 일체의 법을 포섭하고 있다

▲ 보문역 역사. "창문도 거의 온전하고 잔뜩 녹슨 집표대도, 수돗대도 남아 있다."
ⓒ 정국진
보문역은 여기 말고 하나 더 있다. 여기 경북선 보문역은 폐역이 되었지만, 다른 한 역은 지금도 살아서 많은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있다. 지하철 6호선 보문역 말이다. 그런데 두 역은 공통점이 있다. 이름이 같다고? 자, 뻔한 농담 그만두고 정답을 말하겠다. 바로 주변에 위치한 보문사(普門寺)의 이름을 땄다는 것이다.

그럼 두 절의 이름은 왜 또 같을까? 우연치곤 같은 이름을 가진 절이 더 있다.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나오는 석모도란 섬에 가면 나오는 보문사가 가장 유명한 곳이며, 치악산 아래 원주시에 위치한 보문사도 있다. 관광지로 유명한 경주 보문단지도 옛 보문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밖에도 전국 곳곳에 숨어있는 보문사를 찾으면 한보따리 될 것이다.

이쯤하면 눈치 채신 분들이 많겠지만, 보문은 불교 용어이다. 화엄종에서 우주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일체(一切)의 법을 포섭하고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모두에 미치는 보편적인 문호(普門)를 가진 부처님, 대일여래의 다른 말로도 쓰인다고 한다. 예천군 보문면 보문산에 위치한 보문사는 화엄종의 창시자 의상대사가 667년 세웠으니 첫 번째 의미이리라. 훗날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할 정도였으니, 오랫동안 이 지역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모양이다.

다시 보문역을 본다. 창이나 문이 나 있는 곳은 긴 나무 막대로 박아놓았다. 보문역은 그렇게 나무창살 안에 수감되어, 아름다운 내성천의 풍경도 간간이 지나는 열차도 나무창살이 제공하는 세로줄 시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 옛 보문역 안. "보문역은 그렇게 나무창살 안에 수감되어, 아름다운 내성천의 풍경도 간간이 지나는 열차도 나무창살이 제공하는 세로줄 시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 정국진

▲ 옛 보문역 앞, 집표대. 잔뜩 녹슬어 있지만, 남아 있어준 것이 기특하다.
ⓒ 정국진
그래도 보문역은 운이 좋은 편이다. 마을주민들이 창고로 사용한 덕에 일년에 몇 번은 마을 방향의 문을 활짝 제치고 기지개를 펼 수 있다. 창문도 거의 온전하고 잔뜩 녹슨 집표대도, 수돗대도 남아 있다. 수돗대에는 먹을 잔뜩 묻혀 붓으로 쓴 듯한 ‘보문역’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기특하다.

경북선의 수많은 역들을 단체로 폐역할 때에도 남아 있어 준 보문역이 기특하고, 돌보는 이 없이 풍화(風化)를 속으로 삭이면서도 자존심마냥 ‘보문역’이란 글씨를 남겨준 수도대가 그렇다.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함께 새겨놓고 현판 안에 보호받아 잘 관리되는 그 글씨들보다 소중하다. 나는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을 생각한다. 입을 벌려 그 물을 받아먹는 나를 생각한다. ‘보문역’ 선명한 수도대 뒤로 보이는 열차를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오래도록 보문역을 떠나지 못하였다.

▲ 옛 보문역 수돗대에 쓰여져 있는 글씨, '보문역'. "돌보는 이 없이 풍화(風化)를 속으로 삭이면서도 자존심마냥 '보문역'이란 글씨를 남겨준 수도대…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함께 새겨놓고 현판 안에 보호받아 잘 관리되는 그 글씨들보다 소중하다."
ⓒ 정국진
아름다운 모래사장은 눈썹을 그리고

미산역은 보문역에서 김천 방향(남쪽)으로 채 1.5km가 못되는 곳에 있다. 코앞이다. 사실, 예천군 보문면의 중심은 보문역 쪽이 아니라 미산역이 위치한 미호리(眉湖里) 쪽이다. 보문역 쪽의 마을은 사실 산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지역으로, 예전에도 그리 많은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다. 보문역이 66년에, 미산역이 68년에 세워졌으니까 보문역의 이용객 저조 때문에 2년 사이에 면의 중심이 되는 미호리 쪽에 새로 역을 세우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 옛 미산역 터에서 보문역 방향으로 바라본 풍경.
ⓒ 정국진
미호는, 내성천이 마을 앞을 눈썹처럼 둘러서 흘러 생긴 이름이라 전한다. 내성천과 평행선을 그리며 나 있는 작은 포장도로를 따라 도착한 미산역, 역시 내성천과 평행선을 그리며 나 있는 철로 앞에 서서 내성천을 바라본다. 어제 내린 비에도 내성천의 수량은 많지 않다. 경북 북부 지역은 대표적인 소우지(少雨地)이다. 상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고운 모래사장이 형성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다. 아름다운 모래사장은 미호천 유원지를 이룬다. 이 아름다운 내성천을 바라보는 미산역이 지금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철거되기 전의 미산역사 안에서, 강 쪽으로 나 있는 창으로 내성천을 바라보는 상상을 해 본다.

▲ 옛 미산역 터에서 바라본 내성천. 경북선 철길은 내성천과 평행한다. "어제 내린 비에도 내성천의 수량은 많지 않다… 아름다운 모래사장은 미호천유원지를 이룬다."
ⓒ 정국진
보문역 VS 미산역

그런데 왜 미산역이라고 이름지었을까. 이 동네의 이름을 따서 ‘미호역’이라고 하는 게 일반적일텐데. 저기 앞에 보이는 산이 ‘미산’이라서 그 이름을 붙인 건가? 아니면 다른 동네의 이름에서 ‘산’을 따와 미호의 ‘미’와 합쳐 이른 것일까?

여기서 면소재지 쪽으로 가다보면 ‘미산학사’라는 곳이 나온다. 이 마을 출신의 유학자 김이도(金以道)가 “학사가 없으면 뜻을 펼 수 없다(不有舍側 志不事業)” 하여 1670년 세운 서당이다. 김이도는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으로, 장흥효는 퇴계의 제자인 김성일·류성룡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사제관계를 부자관계로 놓고 본다면 김이도는 퇴계의 증손자뻘 되는 셈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을 좋아하였고, 자신은 종9품의 말단 관직(:장사랑)에 올랐을 뿐이지만 아들 영진이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죽은 뒤에 벼슬을 주거나 높임)된다. 그의 호는 미산(眉山)이었다.

보문사가 고려 시대까지 이 지역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왔다면, 조선시대에 그 역할을 한 것은 유학이었다. 산과 물로 둘러싸인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까지 유학을 가르치고 아들을 장원급제시켰다. 요즈음에도 시골에선 고시에 합격하면 마을 입구에 플래카드를 걸고 잔치를 연다. 그 당시에는 어땠을까. 그때부터 미산 김이도는 이 마을의 자랑이었음에 틀림없다. 물론, 마을의 이름을 따서 호를 지은 김이도도 이 마을을 사랑했으리라.

사실 이 동네에 미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 터에서 마을 편을 바라보니 내력이 오래 되어 보이는 사당이 보인다. 별동(別洞) 윤상(尹祥)의 것이다. 그는 예천군의 향리로 출발하여 대사성까지 역임한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다. 샐러리맨에서 시작해 최고경영자(CEO)가 된 사례에 비길 수 있으리라. 정몽주에게 가르침을 받은 그 역시 이 지역에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고 한다. 이 지역의 유학적 전통은 굳이 미산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보통이 아닌 셈이다.

▲ 옛 미산역 터에서 바라본 별동(別洞) 윤상(尹祥)의 묘. 이 지역의 유학적 전통이 오래되었음을 알려준다.
ⓒ 정국진
앞서 나는 보문역의 수요 부족으로 미산역이 신설되었을 거라는 가정을 한 바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68년 이 역이 만들어졌을 당시 이 지역의 어르신들은 불교 용어를 딴 ‘보문역’에 대항하는 의미로, 마을 이름이 아닌 마을을 대표하는 유학자 김이도의 호를 따 ‘미산역’이라 이름하지 않았을까?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60년대, 유·불이 갈등하는 이러한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보문역과 미산역은 탄생과정부터 이름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묘한 긴장 관계를 가진다.

덧붙이는 글 | 열차사랑(http://ilovetrain.com) 동호회의 모임을 통해 10월 8일 다녀온 곳들입니다. 같은 누리집의 [회원답사기]에 정모후기 형식으로 연재하였으며, 싸이월드 페이퍼 '몽상(夢想)하는 리얼리스트의 인。문。학 이야기'(http://paper.cyworld.com/realistbydream)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10월 여행 이벤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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