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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딴 앵두. 올망졸망한 앵두 형제들의 고운 얼굴이 눈에 선하다.
ⓒ 최성수
주말, 보리소골에 내려가니 철 늦은 이곳도 늦봄까지 피어있던 꽃들은 다 지고, 이제부터 여름이라는 걸 알려주듯이 금계국이 노란 얼굴로 초록 그늘 속에 숨어 피고 있다. 잡초들도 한 주 사이에 부쩍 자라 매줄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무성하다.

채소를 뜯고, 겉절이를 담글 생각에 아내와 함께 봄에 심은 배추를 뽑다가 앵두나무를 뒤적여 보니 지난주에 따다 미처 익지 않아 그냥 둔 앵두들이 서너 알 더 익을 것도 없다는 듯 새빨간 얼굴로 매달려 있다. 그제서야 지난주에 따서 먹다 남겨둔 냉장고 속의 앵두가 생각났다.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뒤져보니 아직도 제 빛을 잃지 않은 앵두 알이 일주일 동안 심심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나를 따라와 무얼 하나 바라보고 있다가 소리를 지른다.

“와, 아직도 앵두가 남아 있네. 나 먹어도 돼?”

진형의의 말에 뒤따라 들어온 아내가 얼른 한 마디 한다.

“진형아, 앵두로 맛있는 것 만들어 줄테니 기다려.”

▲ 앵두나무 잎새에 부끄러운 듯 숨어 익은 앵두. 봄부터 간직헤온 햇살과 바람이 열매 속에 숨어 있다.
ⓒ 최성수
나와 진형이가 마당에 나가 평상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는 동안 아내는 부엌에서 무언가를 만들더니 가져나온다. 평상에 놓는 걸 보니 화채다.

“이게 뭐야? 앵두는 하나도 없는데?”

진형이 녀석이 화채를 보며 볼 멘 소리를 한다. 앵두알이 화채 국물 속으로 숨어버려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 앵두를 먹고 싶었던 마음에 부아가 났나보다.

“여기 앵두가 이렇게 많잖아.”

아내는 그릇에 화채를 담아주며 앵두를 연신 건져 올려 늦둥이에게 보여준다. 그제야 진형이의 표정이 환해진다. 단오 무렵에 담아 먹는 앵두 화채를 유월도 한참 지난 뒤에야 해 먹으면서 우리 식구들은 그것만이라도 너무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보리소골은 워낙 추운 지방이라 웬만한 나무들은 제대로 살지 않는다. 몇 년 동안 잘 자라던 복숭아나무도 한 해 겨울을 나더니, 잎도 피지 않고 그대로 말라 죽고 말았다. 그 해 겨울이 유난히 춥더니 복숭아나무가 얼어 죽은 것이다.

▲ 올해 심은 앵두나무에도 앵두가 제법 달렸다. 바라보는 마음이 다 흐뭇해진다.
ⓒ 최성수
한겨울에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다 깜짝 놀랄 때도 많다. 물 묻은 손이 문고리에 달라붙기 때문이다. 겨울에 한 번 내린 눈은 녹지 않고 봄이 올 때까지 그늘에 남아 겨울이 한정 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곳이 보리소골이다. 그러다보니 웬만한 나무는 심어도 제대로 자랄 수가 없는 것이다.

자두나무는 십여 그루를 사다 심었는데도 한 그루도 살아남지 못했다. 추위에 잘 견딘다는 은행 묘목도 삼분의 일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래도 첫 해 사다 심은 앵두나무 두 그루는 마당가에서 잘 뿌리를 내리고 견뎌내더니 그 이듬해부터 소복하니 앵두를 열곤 했다. 지난해는 꽃이 필 무렵 비가 억수같이 내리더니 꽃이 다 지고 말아 앵두 맛도 못 보았지만, 올해는 제법 많은 앵두를 딸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는 앵두가 제일 잘 되는 것 같아. 앵두나무나 몇 그루 더 심어야 겠어.”

▲ 앵두나무는 가지를 들춰보면 더 많이 보인다. 숨어 익는 것은 앵두가 부끄러움이 많은 탓일까?
ⓒ 최성수
올 초, 내 말에 아내도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서 올 봄에 또 몇 그루 앵두나무 묘목을 사다 심었는데, 제법 앵두가 달렸다. 잎새 속에 숨어 있는 붉고 여린 그 열매를 보면 괜히 마음이 풋풋해 진다. 앵두 같은 입술이라지만, 나는 앵두를 보면 입술보다는 여리고 고운 어린 아이의 볼이 떠오른다.

발그레하게 부끄러워하던, 몇 해 전 담임했던 중학교 일학년 아이들의 볼처럼 익어가는 앵두. 앵두에서는 과일의 단맛보다는 풋과일의 상큼함, 날것의 싱싱한 맛이 난다. 그래서 앵두를 먹으면 가공하지 않은 자연의 열매를 먹는 느낌이 든다.

내가 이 마을에 살던 어린 시절, 우리 집 우물가에도 앵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앵두나무는 크게 자라는 나무가 아니니, 우물가에서 자라도 물에 그늘을 지우지 않고, 물을 뜨러 나왔다가 앵두 열매를 따는 재미도 느낄 수 있었으리라.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어 오시던 어머니는 앵두나무 곁을 지나면서 한 번쯤 고개를 돌려 앵두나무를 흘끗 보시곤 하셨다. 아마도 앵두가 익을 무렵, 얼마나 더 있으면 앵두를 딸까 생각하시던 것이 습관처럼 굳어져 앵두나무 곁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돌리셨는지 모른다.

▲ 앵두화채. 참외를 깍뚝썰기 해 띄우고 수박 물에 앵두를 넣으면 완성이다.
ⓒ 최성수
지금도 내게 남아있는 앵두나무의 영상은, 물동이를 인 어머니와 물동이에서 떨어지는 물을 연신 한 손으로 훌쳐 내던 손짓 그리고 우물가의 실하게 달리던 앵두의 붉은 빛깔로 남아있다. 나는 앵두화채를 먹으며 입속으로 노래를 하나 흥얼거린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 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이뿐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석유 등잔 사랑방에 동네총각 바람났네/올 가을 풍년가에 장가들라 하였건만/신부감이 서울로 도망갔으니/복돌이도 삼돌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천봉 작사, 한복남 작곡의 김정애가 부른 '앵두나무 처녀'라는 노래다.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서울로 이주를 해가던 소위 산업화 시기의 우리 농촌의 애환을 이 노래는 담고 있다.

어머니가 앵두나무 우물에서 물 긷던 그 몇 해 후 우리 식구도 서울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 혼자 남아 우물을 지키던 앵두나무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베어지고, 이제는 그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앵두나무가 사라진 삭막한 도시의 세월을 지나 이제 다시 고향 마을에 앵두나무를 심고, 앵두 화채를 해 먹으면서, 나는 새삼 어린 시절의 우물가와 그곳을 지키던 앵두나무 그리고 앵두나무를 버려두고 시간에 쫓겨 가며 살았던 세월들을 생각한다.

▲ 앵두화채 한 잎 맛 볼까? 봄부터 갈무리해온 햇살과 바람도 앵두화채에 남아 있다. 그 날것의 상큼한 맛이 지금도 그립다.
ⓒ 최성수
사람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다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돌아갈 수 있는 법일까? 그 시절 어머니의 물동이를 바라보던 소년이 자라 이제는 그때의 어머니보다 훨씬 많은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세상에 안 계신다. 그래도 앵두나무와 앵두 열매를 보면 그때의 곱디고운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머니가 아직 내 마음에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아닐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아내는 남은 앵두로 술을 담그더니 마당 끝 개울 가에서 절로 나 자라는 토종 뽕나무에 다가간다.

“엄마, 어디 가?”

진형이의 말에 아내가 돌아보고 싱긋 웃는다.

“응, 우리 진형이 오디 따 줄려고.”

▲ 검붉게 익은 오디. 토종이라 알이 잘지만 달고 향긋한 맛은 일품이다. 하지만 조심, 입가에 검은 물이 가득 들 수 있음. 그러나 그런들 어떠랴, 자연의 단 맛을 볼 수 있다면...
ⓒ 최성수
그 말에 작년의 오디 맛을 떠올렸는지, 진형이 녀석이 배시시 따라 웃는다. 아내는 또 저 오디로 술을 담가 내 올 지도 모른다. 한 사십 년 쯤 후, 우리 늦둥이 녀석도 앵두나무를 보면 제 엄마 아빠의 오늘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앵두화채, 오디술 만드는 법



앵두화채 만드는 법
1.오미자가 있을 때:말려 놓은 오미자를 깨끗이 씻어 하룻밤 물에 불려 놓는다.
오미자가 없을 때:수박을 갈아서 건더기를 꼭 짜 수박물을 만들어 놓는다.
2.앵두를 깨끗이 씻어 씰를 발라내고 오미자물(꿀이나 설탕을 조금 넣어 단맛을 가미한)에 띄우고, 참외나 다른 과일이 있으면 깎뚝썰기를 해서 같이 띄운다.
수박물에도 같은 방법으로 앵두나 다른 과일을 띄워 먹는다.

오디술 만드는 법
1.오디가 까맣게 익으면 따서 깨끗하게 씻어 놓는다.
2.채반에 받쳐 물기가 다 빠지면 단지나 술 담을 병에 오디를 담는다.
3.30도나 35도 되는 과실주용 소주를 붓는다(오디 자체가 충분히 달기 때문에 설탕은 넣지 않는다).
4.지하실이나 창고 같은 어둡고 서늘한 곳에 보관하고 100일이 지나면 오디를 체에 받쳐 건더기는 버리고 술만 따라서 병에 담아둔다.
5.한 달쯤 더 지나 먹으면 맛이 가장 좋다.


/ 김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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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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