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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0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한·일 정상회담 결과발표를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백승렬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무엇을 다루고, 무엇을 얘기할 것인가, 그 의제를 둘러싼 줄다리기는 역사문제에 주목하는 한국의 명분과 현실문제를 중시하는 일본의 실리가 오랜 세월 팽팽하게 맞서왔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의 입장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등 역사인식에 대해 할 말은 다 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인식을 덮어놓고 양국 간 협력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겠다는 의지표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는 가급적 피하고, 현실적인 북핵 문제 대책을 논의하는 방향으로 회담 의제를 끌고가겠다는 실리적인 바람을 숨기지 않았다.

회담의 내용도 실제로 그러했다. 회담시간 2시간 가운데 무려 1시간50분을 할애한 역사문제에 관해서 노 대통령은 끝내 고이즈미 총리와의 속시원한 '합의'를 얻는 데는 실패했고, 거꾸로 고이즈미 총리로서는 서울의 심장부에서 껄끄러운 역사문제의 예봉을 피해 갔으니 그것만으로도 실리는 적지 않았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2004년 7월, 제주에서 만난 한·일 두 정상의 화제도 그랬다. 노무현 대통령의 입에서는 역사문제가 제기됐고, 고이즈미 총리의 입에서는 2005년 3월 나고야에서 개최되는 '아이치(愛知) 만국박람회'를 위해 한국 관광객들에게 비자를 잠정 면제하겠다는 지극히 실리적인 제안이 튀어나왔다.

게다가 한국의 외교부장관은 "앞으로 양국간 실무협의를 벌여 박람회 이후에도 비자를 면제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화답했으니, 한국정부로서는 고이즈미 총리를 안방에 불러다 놓고 일본의 만국박람회를 맘껏 홍보시킨 꼴이 돼버린 셈이었다. 당시에도 필자는 일본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장사를 하는구나 싶었다.

오래된 일본의 방정식

이처럼 역사문제는 덮어두고 현실적인 문제를 의제로 삼으려는 일본의 방정식은 비단 최근의 일만이 아니다. 지금부터 120여 년 전인 1881년에도 이미 그랬으니, 이 방정식은 꽤나 해묵은 셈이다.

고종이 일본에 파견한 신사유람단은 어느 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라는 일본 외무장관과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자연스레 현안문제를 둘러싼 대화가 오고갔다. 이 자리에서 일본의 외무장관은 자신들의 의도대로 대 조선 외교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는데 안달을 내면서, 조선의 관료들이 일본인을 의심하기 때문에 일본 공사 파견도 지연시키고, 게다가 마음대로 나다니지도 못하게 하는 등 많은 제약을 두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한다.

당시 조선조정이 일본을 불신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의 인심이 무려 400여 년 전의 임진왜란 때 심어진 뿌리깊은 원한 때문에 일본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876년에는 강화도에서 일본의 무력도발까지 있던 터였다. 임진왜란이라는 낡은 원한도 뿌리깊게 남아있는 마당에 또 다른 무력도발까지 있었으니 불신의 늪은 깊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의 대표가 문제삼은 것은 바로 이 역사문제였다. 과거사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일본과의 외교가 순탄치 못하다는 문제제기였던 셈이다.

그런 상황인데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의 외무장관은 이런 말을 하고 나선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지나간 일은 말하지 합시다." 그리곤 이런 말도 곁들인다. "일본 사람이 조선에 가면 마치 아귀나 짐승 같이 대합니다. 이것은 친구를 귀축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를 이웃 나라의 정의(情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나간 일은 말하지 맙시다.' 일본의 외무장관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과거사를 불문에 붙이자는 주장이었다. 과거를 묻어버리고 미래지향적인 현실문제를 논하자는 주장은 이렇게 일찍부터 그들이 입에 올린 낡은 논리였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고이즈미 총리는 역사문제에 대해 "장기적으로 해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한마디로 "이미 지나간 일은 지금 말하지 말고 장기적으로 해결합시다"고 발언한 것이나 진배없다. 지금이나 그때나 닮아도 너무나 닮은꼴이지 않은가?

외무장관인 이노우에는 일본인을 못된 짐승 같이 취급하는 조선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모양인데, 그 배경은 조금도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친구'니 '이웃 나라의 정의'니 하는 수사까지 동원하면서 애써 우호관계를 강조하고 나섰지만, 그건 혼자만의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고이즈미 총리의 발언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의 집요했던 서양인 암살과 습격

그렇다면 역사문제에 연연하는 듯한 이런 모습은 최근 일본인들이 불평하듯이 과연 우리만의 집착증일까? 과연 일본은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까? 그들은 우리 이상으로 집요했고 또한 처절했다.

과거 일본인들은 서양인들에 의해서 자기 나라, 자기 역사가 더럽혀지고 있다고 믿었을 때, 습격과 암살을 마다하지 않았다. 서양인들이 일본에 거주하기 시작했던 1857년부터 그 처절한 역사는 막이 올라가는데, 미국공사에 대한 암살계획과 미국인 통역관 암살, 영국공사관 습격·방화와 영국공사에 대한 암살미수, 러시아 해군 암살, 프랑스 영사관 직원 암살, 외국인 거류지였던 요코하마 방화계획, 영국인 사관과 프랑스 사관 암살 등, 일본에 발을 붙인 모든 외국인을 향한 습격이 줄을 이었다.

1857년부터 1868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0년 넘게 서양인에 대한 암살과 습격의 역사는 계속된다. 물론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그 후에도 서양인 암살은 그침이 없었고, 1891년에는 일본을 방문중인 러시아 황태자 암살미수사건까지 발생한다.

왜 그랬을까? 당시 이들 서양인들은 일본 영토를 침략하거나 혹은 온갖 학살과 착취를 자행했던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일본으로서도 방심할 수만은 없는 시대상황이었겠지만, 단지 서양인들은 낯선 동양의 작은 섬에 발을 디뎠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서양인들이 자기네 땅을 '더럽힌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단지 일본을 더럽혔다는 대가가 암살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만일 일본이 이보다 더 치욕스런 합방과 착취와 수탈을 당했다면, 과연 어떠했을까? 고이즈미 총리에게 이런 유형의 질문을 해봤다면 어떨까 싶다.

뱀을 잡으려면 숲을 두드려라

과거 일본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저항의 역사가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물론이고 일본의 정치인들도 그런 자국의 역사를 익히 알고 있을 터이다. 자국의 역사가 하물며 그러하거늘, 옆 나라가 치욕스런 과거사에 대해서 가해국 총리에게 역사문제를 철저히 정리하라는 요구를 한다면 이는 오히려 물러빠진 편이 아닌가? 고이즈미 총리에게 던질 화두는 한·일 과거사 문제가 아닌 바로 이런 역지사지의 일본사가 아닐까 싶다.

외교 테이블에서 역사인식을 강요하기는 난망하다. 그렇다고 역사문제를 외교의제에서 제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망한 일이다. 다만, 풀을 두드리며 뱀을 놀라게 하듯이, 일본역사의 거울을 들이밀면서 고이즈미 총리 스스로 역사문제의 무거움을 깨우치게 만드는 외교해법, 이것마저도 절망적인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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