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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A씨. 주부인 A씨는 "영국 암연구 재단(Cancer Research UK)"이라는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볼펜을 지니고 다니며, 매달 5파운드씩의 돈을 이 재단에 보낸다. 기부금이다. 남편 또한 매달 일정액을 자동이체 하고 있다. A씨의 동생은 이 단체의 자원봉사자이다.

최근의 남아시아 해일참사와 같은 재난이 발생할 경우, 영국 시내 곳곳에는 기부박스가 놓여진다. A씨에게 기부박스는 자녀교육의 기회이기도 하다. A씨는 아들에게 5파운드를 쥐어주며 '기부'문화에 자연스럽게 아이가 젖어들 수 있게 한다.

A씨는 시내에 쇼핑을 다닐 때나 책을 살 때도 채러티 숍인 '옥스팜'을 찾는 경우가 많다. 옥스팜에서는 최근 몇 년간 영국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0.50 파운드에 살 수 있다. 헌책이나 책장 등 불필요해진 물품은 옥스팜에 기부하기도 한다.


▲ 영국의 대표적 채러티 숍인 옥스팜의 남아시아 해일 관련 포스터
ⓒ 박성진
위 내용은 가상의 스토리다. 하지만 A씨의 생활모습은 다수 영국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영국인들에게 민간자선활동은 매일매일 밥을 먹듯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일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영국의 민간 자선활동에는 일정액을 정기적으로 보내겠다는 서약 제도나 방송사의 기부 이벤트 등이 있지만, 그 근간은 일상 생활적 자선활동 문화인 '채러티 숍'이다.

최근 1억 파운드(한화 2000억원)를 돌파한 영국의 남아시아 해일 참사 관련 민간 모금에도 채러티 숍이 대거 참여했다.

영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채러티 숍'

'센스', '캔서 리서치 UK', '브리티시 하트 파운데이션', '옥스팜'. 영국의 동네 중심가인 하이 스트리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판들이다. 이 간판들은 다른 크고 작은 상점들과 나란히 쇼핑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쇼윈도의 디스플레이도 그럴 듯하다.

상점 안에는 평상복, 책, CD, 비디오테이프, 가구, 장식품, 장난감, 신발, 주방용품, 속옷 등 만물상이 따로 없을 정도로 일상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물건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물건가격은 엄청 저렴하다. 중고품 상점이기 때문이다.

▲ 동네 쇼핑가에 위치해 있는 채러티 숍들
ⓒ 김성수
이 상점에서 판매되는 중고품들은 특정 단체나 상점 주변 주민들의 자발적 기부에 의해 충당된다. 밤새 물건들이 상점 앞에 수북하게 쌓이기도 한다. 물론 기부된 모든 물건이 상점의 진열대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진열된 중고품들은 어느 정도 상품 가치를 갖고 있다.

바로 이것이 '자선상점'이라 불리는 영국 '채러티 숍(Charity shop)'이다. 쉽게 말해 상설 중고품 바자회 상점이라고 할 수 있다. 채러티 숍은 한국의 구멍가게처럼 영국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꾸준하게 받고 있다.

채러티 숍 안에서 만난 한 중년 여성은 이곳을 찾는 이유에 대해 "물건 가격이 싸고, 좋은 일도 할 수 있으니까"라고 답했다. "채러티를 빙자해서 사기를 치거나 할까봐 걱정되지는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상점 주변에서 만난 영국인들은 오히려 "채러티가 시작된 지 오래됐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며 채러티 숍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내비쳤다.

채러티 숍을 통한 기부와 서면 기부 등을 전부 합치면 한달에 얼마나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게 되는 건지 몇몇 영국인들에게 묻자 "개인적으로 여러 방면으로 약간씩 기부활동을 하기 때문에 전부 합쳐서 얼마가 되는지는 알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한 대학생은 "채러티 숍엔 잘 안 가지만, 매달 3파운드(한화 약 6천원)씩 정기적으로 자선단체에 기부한다"며 "내 돈이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선단체의 채러티 숍, 개인, 그리고 비정부기구

▲ 지난 연말 연시 무렵에 촬영한 채러티 숍 내부
ⓒ 박성진
채러티 숍은 개인이나 국가가 아닌 '옥스팜' 같은 각종 비영리 자선단체들이 일반인들로부터 지속적인 기부를 받기 위해 전국 체인점으로 운영하는 상점이다. 채러티 숍도 상점이므로 다른 보통 상점들과 똑같이 09:00~17:00 정도까지 문을 열지만, 약간의 운영비를 제외한 수익금 전액은 사회를 위해 사용된다.

이곳에서 물건을 사는 손님들은 일반인들이 주를 이루지만 운영에 관계하는 사람들은 일반인부터 상류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예를 들어 '영국 암 연구 재단'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재단의 후원자이고, 알렉산드라 공주가 회장직을 맡고 있다. 영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제'정신의 한 단면인 셈.

채러티 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원봉사자들과 자선단체 직원들인데 이들의 사연도 가지가지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암에 걸린 것이 동기가 되어 '영국 암 연구 재단' 소속 채러티 숍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주일에 두 번씩 오후에 나와 일하는 게 좋아서"라고 말하는 가정주부도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은 7~8년 이상 이 일을 지속하는 경우가 많다. 7년째 채러티 숍에서 일하고 있다는 30대 후반의 여성 제니 벡은 "처음엔 자원봉사자로 시작했는데 삶의 보람이 느껴져서 아예 직원이 됐죠"라며 "제 주변 사람들은 제가 최저 수준의 돈을 받기 때문에 좀 더 돈을 많이 주는 직장에서 일하길 원하지만 직업을 바꿀 생각은 없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채러티 숍들도 어느 정도의 통제는 필요한 법. 영국 전역의 채러티 숍들은 1960년대 무렵에 설립된 '자선단체위원회'의 감독을 받는다. 비정부기구인 이 위원회는 채러티 숍을 운영하는 자선단체들의 행정지원, 정보 교환 및 자문 등의 역할은 물론 불법행위 적발도 맡고 있다.

자선문화는 영국 역사의 산물

▲ 슈퍼마켓 바로 옆에 있는 '영국 암연구' 재단의 채러티 숍.
ⓒ 김성수
그러나 모든 영국인들이 자선활동에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최근 통계 자료(The British Social Attitudes Survey, 2004)에 따르면, 영국인들의 30%는 자선단체에 한번도 기부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연봉 2만 파운드 이상의 고소득자들이 2만 파운드 이하의 저소득자들 보다 기부를 더 적게 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당 지지자들이 진보적인 노동당 지지자들보다 기부를 더 많이 하고 있다는 내용의 1월 2일자 <데일리 텔레그래프> 보도는 주목할 만하다. 이 신문은 그 이유에 대해 보수당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자선활동 행위를 공공 사회보장제도 보다 더 높은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 '센스'라는 자선단체 기관의 잡지에 실린 앤 공주 (상단 중앙)
ⓒ 김성수
사실 영국은 16세기 경에 이미 자선활동 관련 법령을 제정한 나라지만 자선활동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활성화됐다. 영국인들의 문화와 힘을 세계에 강요했던 대영제국 정부는 팽창주의적 제국주의 정책과는 별도로, 1869년에 '자선조직협회'를 설립하면서 민간의 자선활동을 활성화시켰다.

이런 역사를 감안하면 영국인들의 자선활동이 어느 정도 그들의 우월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현재도 실제로 자선활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먹고 사는 문제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 왕족들과 귀족들이다. 즉, 보수당 지지자들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띠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영국 사회의 가장 어렵고 힘든 곳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그 내력이 어떻든 간에 지금도 많은 영국인들은 계층을 불문하고 '채러티 숍 문화'를 통해 기부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자선문화를 영위하고 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손질해 채러티 숍에 기부하고, 채러티 숍에서 필요한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하여 돈을 다시 기부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런 영국의 채러티 숍 문화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국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나라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힘과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대영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사랑과 나눔으로 세계를 감싸안으려 했던 영국 민간인들의 채러티 숍 문화는 서서히 그 영향력을 확산시켜 온 셈이다.

영국 '채러티 숍'의 기원

영국에서 '채러티 숍(charity shop)'이라 불리는 상점은 미국에서는 '드리프트 스토어(thrift store, thrift는 절약이라는 뜻)', 호주 등지에서는 'OP숍(op는 opportunity에서 온 말)'이라 불리고 있다.

영국 최초의 채러티 숍은 1947년에 옥스포드에 생긴 '옥스팜'이며, 그전까지는 '구세군'이 채러티 숍의 일을 해왔다. 여러 자선단체들에 의해 운영되는 채러티 숍은 영국 전역에 각 단체별로 수백개씩 존재한다. 현재까지 등록된 채러티 숍은 6천개 이상이고, 10만명 이상의 자원봉사자가 이 곳에서 활동중이다.

채러티 숍의 총 수익금은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의 천문학적 숫자라고 하는데 연평균 영국민 1인당 기부액수가 약 100파운드(한화 약 20만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채러티 숍을 운영중인 영국의 큰 자선단체는 암 퇴치와 예방을 목적으로 1902년에 창설되어 암 예방과 캠페인, 치료, 연구, 장비 제공 등에 기금을 사용하고 있는 <영국 암 연구(Cancer Research UK)>, 심장병 치료 연구 후원을 목적으로 1961년부터 활동하고 있는 <영국 심장 재단(British Heart Foundation)> 등이 있다.

그 밖에도 1942년 설립된 이래 가난과 기아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을 비정치적 차원에서 돕고 있는 <옥스팜(Oxfam, the 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 장애인들의 권익 보호와 생활 복지를 주요 사업으로 하는 <센스(Sense)>, 애완동물 수의사들을 지원하는 <피디에스에이(PDSA)> 등이 대표적이다.

영국의 '채러티 숍 협회' 공식 홈페이지는 http://www.charityshops.org.uk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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