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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 이야기> 표지
내가 하루 동안 마시는 커피의 양은? 회사에 출근해서 아침 회의 때 한잔, 점심 먹고 한잔, 저녁 먹고 한잔, 야근이 있다면 또 한잔, 이렇게 기본 4잔. 그리고 사이 사이 손님을 만나거나 출장을 나가면 또 마시게 된다. 어림잡아 보통 하루에 대여섯 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 같다. 하루 세끼 먹는 것보다 커피 마시는 것이 더 규칙적이다.

커피를 좋아하게 된 것은 군대에 있을 때부터다. 거의 매일 야근에 시달리던 보직이라 잠을 쫒기 위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마셨는데 매일 서너 잔은 기본이었다. 잠시 짬을 내어 막사 옆에 있던 커피 자판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물고 햇볕을 쬐며 홀짝거리던 커피 맛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노란 깔깔이(야전 상의 내피)'만 걸친 채 커피 한모금 입에 물고 차갑고 날카로운 겨울 햇볕에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파랗기만 하던 북한산 너머 하늘을 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목구멍을 타고 오장육부로 흘러내리던 쓰디 쓴 밀크 커피의 진한 향기는 만사에 지쳐버린 몸을 보듬어 주는 애인이었다.

진짜 커피 마니아가 들으면 웃겠지만, 그동안 엄청난 양의 자판기 커피를 소화하면서 나름대로의 커피를 즐기는 법칙이 생겼다. 내가 마시는 커피의 대부분은 모회사의 설탕량이 자유자재로 조절된다는 파란색 봉지 커피다. 자판기 커피를 마실 때는 제일 비싼 것(그래 봐야 50원, 100원이다)으로 뽑는다. 비싼 것이 없을 때는 밀크커피, 자판기가 여럿 놓여져 있는 경우엔 줄을 서서 기다릴지라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자판기에 제일 많이 뽑는 커피를 선택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커피를 사 마실 때는 꼭 카페오레를 주문한다.

어쩌다 마지못해 가는 까페나 커피 전문점에선 생과일 주스나 우유를 마신다. 자판기 커피에 익숙해져서인지 밀크 커피가 없는 그 곳의 분위기와 입맛에 적응이 되질 않는다. 그 곳의 커피는 왜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일까, 여기까지가 나의 기호다. 역시 나의 미각은 인스턴트를 사랑하는 '하류'다.

하지만 내가 10년 넘게 장복(?)하고 있는 커피 말고 꼭 한번 마셔 보고픈 커피가 생겼다. '까페씨또'. 중앙 아메리카에선 손님들에게 카페씨또를 대접하는 것이 전통이란다. 작은 잔에 담아 주는 이 커피는 풍부하고 진한 맛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도 한번 도미니카의 작은 마을 바르라(까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나의 미래를 보기 위해 잔을 뒤집어 남은 커피를 흘려 보고 싶다(갑자기 초등학교 때 봤던 만화 영화 <호호 아줌마>가 생각난다. 호호 아줌마가 커피잔인가 홍차잔을 뒤집어 점을 보던 장면이 있었다. 이거 왠 엉뚱한 이야긴가).

작은 책을 서점에서 집어 들었다. 제목이 <커피 이야기>다. 작은 잔에서 피어나는 커피 향이 이야기를 품고 흩어지는 목판화가 표지다. 그 커피향 속에는 태양, 나무, 꽃, 책, 집, 비행기, 주전자, 컵, 새가 보인다. 이야기는 짧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을 표지의 목판화가 모두 보여 주는 것 같다.

그저 평범한 인생을 살던 한 남자 '조'가 어느 날 아침 커피를 홀짝거리다 도미니크 행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도미니크에 도착한 후 어느 카페에서 커피잔을 뒤집어 자신의 미래를 엿본다. 커피잔을 통해 새로운 인생과 아주 아주 많은 새들을 보게 된다.

"열매가 익어갈 때 새들이 노래를 불러 주는 것은 어머니가 뱃속의 아기에게 노래를 불러 주는 것과 같아요. 그런 아기는 행복한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죠. 그늘 밑에서 자란(유기농을 재배한) 커피는 당신에게도 그 노래를 심어 줄겁니다." <32쪽>

결국 그는 커피잔의 예언대로 잠시 여행하러 왔던 도미니크를 떠나지 않고 세계화의 그늘(다국적 기업에 종속된 커피 농업은 단기간 내에 이익을 내기 위해 살충제와 화학 비료를 사용하고, 숲을 파괴하고 오염시키고 있다) 아래 고통받고 있는 농민들을 위해 잊혀졌던 유기농 재배 방식을 확산시키고, 국제 시장 가격에 영향을 받지 않는 판매를 통해 농민의 삶을 안정 시킬 수 있는 공정거래를 뿌리 내리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이 책의 줄거리다.

책 뒤편에는 이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빌 아이크너와 줄리아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나무 그늘 아래서 유기농으로 재배된 커피를 구입할 수 있는 여러 단체의 인터넷 주소도 나온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곳은 소개가 되어 있지 않다.

농민들은 핍박받는 존재다. 특히 낙후된 중남미 아메리카의 커피 재배 농민들은 하루 하루 끼니를 잇기 위해 하루 천원도 안되는 임금을 받으며 커피 농장에서 일한다. 그들이 옛날 방식대로 커피를 재배하고 땀흘린 만큼 정당한 수입을 얻는 것은 아직까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희망을 뿌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정말 다행한 일이다.

잠시 다른 책으로 넘어가자.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그물코)라는 책의 일부다.

구보씨는 하루에 두잔의 원두 커피를 마신다. 올해에 그는 약 9kg의 원두 알갱이로부터 만들어진 130리터의 자바산 커피를 끓일 것이다. 콜롬비아 농장은 그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12그루의 커피나무를 돌보아야 한다. 농장 노동자들은 그를 위해 한해 동안 약 5kg의 화학 비료를 쓰고, 약간의 살충제를 뿌릴 것이다. (중략) 커피는 세계 제2위의 합법적 무역량을 기록한 생필품이며(1위는 석유), 중남미의 개발도상국가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외화 획득 수단이기도 하다. 미국은 세계 커피의 5분의 1을 소비한다. 상대적으로 뒤늦게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한국의 경우에는 1인당 하루에 9.65g의 각종 커피를 소비한다. <17쪽>

나는 구보씨보다 더한 사람이다. 하루에 여섯잔의 커피를 마시고 있다. 나는 올해 27kg의 원두를 소비할 것이고, 농장 노동자들은 나 때문에 36그루의 커피나무를 돌보며 더많은 살충제와 화학비료를 뿌려야 할 것이다. 나 때문에 숲은 잘려 나가고 강은 오염되고 있다. 커피 소비량과 그것을 위해 버려지는 엄청난 일회용품들을 따진다면 나는 분명 미각만 하류가 아니라 삶 자체가 '하류인생'이다.

나같은 사람을 위해 빌 아이커너는 이야기 한다.

"우리에게는 한가지 소원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의 작업을 즐겁게 체험하고 지속가능성을 향한 꿈과 노력에 동참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한 그루든 백 그루든 누구나 나무를 심으면 시작할 수 있다. 새들과 당신의 손자들이 고맙다고 할 것이다. 다시 쓰고 재활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습관이 되고 남들에게도 일깨워주는 날이 오게 된다. 까페 알따 그라씨아를 비롯한 믿을 만한 업체들에서 내놓은 커피 제품을 사서 마시는 것도 한 방법이다. 명심하라 지속가능성은 단순이 개념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온 삶의 방식이다.

그러니, 어디에서 커피를 마시든 이 '커피이야기'를 기억하라. 우리가 마시는 한 잔의 커피에, 우리의 작은 선택 하나하나에 미래가 달려있다." <83쪽>


나도 조가 그랬던 것처럼 그늘에서 자란 커피 열매로 끓인 진한 '까페씨또'를 마셔 보고 싶다.

커피 이야기

김성윤 지음, 살림(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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