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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홍옥과 부사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누구라도 구분해봐야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구분할 수가 있다. 두 가지 모두 빨간 사과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무수한 점선들이 위아래로 그려지며 얼핏 점묘화 같은 부슬부슬한 느낌을 주는 부사와 달리 홍옥은 그저 빨갛다. 그리고 무릎에 대고 두어 번만 문지르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어쨌건 그리 어렵지는 않되, 세상 사람들이 다들 이것저것 따지고 살지는 않는 터라 가끔은 부사와 홍옥을 구별하는 것만으로도 유별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다. 대학 시절 MT 가는 길에 청량리역 앞에서 사과를 고르며 홍옥이니 부사니 따지다가 웬 아줌마 같은 소리를 하나 싶은 눈초리를 받고 보면 꼭 그렇다.

어쨌거나 요즘엔 사과라면 부사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무디게 사는 사람도 꽤 되지만 나는 곧 죽어도 홍옥이 좋다. 설탕에 조려놓은 것 같은 명쾌한 단 맛이 입을 끌기는 하지만 웬지 부사는 뒷맛이 안좋다. 텁텁하달까? 느끼하달까? 뭔가 공장에서 만들어낸 감미식품을 먹은 것 같다.

그런데 홍옥은 안 그렇다.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것이 가물가물 눈까지 시큼거리면서 씹지만 끝내 상쾌하다. 게다가 사 온 한 봉지 속에서 한두 개 먹어봐서 신맛이 감당하기 어렵거든 미련 없이 싹싹 닦아서 접시에 담아 텔레비전 위에 올려놓으면 그 그림과 향만으로도 본전은 나오는 것이다. 또 그렇게 며칠 삭이다 먹으면 단맛이 살아나는 것이다.

내 어린 시절에 흔히 먹는 사과는 국광이었다. 스피커를 달고 포장을 친 일 톤 반 트럭에서 천 원에 백 개까지도 주던 아기 주먹만한 사과. 한입 물면 경쾌하다 못해 격렬하기까지 한 느낌을 주는 밀도 높은 육질에 풋풋하다고 쳐주기엔 너무 거친 풋내. 푸르스름한 육질. 국광은 아무리 함빡 익혀도 풋내가 난다. 그 투박한 맛. 그 때 내 또래 아이들이 이빨이 흔들리면 아버지가 사다 준다는 사과가 아마 거의 국광이었을 것이다. 사과하고 싸움하듯이 물어뜯다 보면 어느새 묵은 이빨을 뽑아버리는 둔탁한 사과.

그래도 방학 때마다 충주에 내려가면 항상 할머니가 나를 위해 준비한 인도사과가 있었다. 하늘색에, 농익으면 모과 비슷한 노란 빛까지 비쳐나는 그 시절 고급 사과. 노란 빛이 돌 정도로 농익으면 마치 농익은 백도처럼 껍질이 손톱으로 조금씩 벗겨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육질이 무르고 성겼다. 그 사과가 정말 인도에서 온 것인 지는 잘 모르지만 마치 열대과일처럼 천진하게 단 맛에 무른 육질을 가지고 있었다. 충주 할머니는 나를 위해 항상 국광보다 아마도 배는 비쌌을 인도사과를 준비했다.

그런데, 지금이야 그리 좋아하지도 않지만 부사에 얽힌 기억이 훨씬 진하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해였을 것으로 기억한다. 충주에서 국민학교 선생을 하던 아버지는 무슨 일이었는지 퇴직을 해버렸고, 인천으로 상경한 우리 집은 난데없는 중국집을 시작했다.

외가쪽 친척의 건물을 빌어 1층은 식당을 운영하고 2층에 살림을 차렸다. 옥탑방 비슷했던 우리집. 나는 오전에는 미술학원에 다녀와서 오후에는 혼자 방바닥에 배를 깔고 거북선이니 비행기 따위를 그리며 놀았다. 그러면 원래 혼자서도 잘 노는 아들이지만 가끔 궁금해진 어머니가 올라와서 한 두 시간 놀아주다가 다시 내려가곤 했다. 물론 손님이 없을 때면 내가 식당 카운터에 앉아서 '짜곱2, 짬보1..' 따위를 적기 위해 잘라놓은 갱지조각에 볼펜그림을 그리곤 했다.

어느 날 오후 역시 모로 세운 베개에 턱을 올려놓고 배를 깐 채 거북선 머리의 불길을 그리고 있을 때, 활짝 웃으며 어머니가 이층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보석이라도 되는 듯이 커다란 사과 한 알을 손에 든 채 함박 웃음을 웃으며. '우리 은식이 후지 한 번 먹여볼까? 으흥' 내 어머니의 웃음은 때로 이렇게 연극적이기까지 하다. 어머니가 들고 온 사과에는 '후지'라고 적힌 하얀 종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부식을 가져온 채소장사한테 한 알 얻었을까? 아니면 손님이 하나 놓고 갔을까? 신기한 신품종 사과 한 알을 손에 넣은 어머니는 그렇게 행복한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나에게 달려왔다.

어머니는 금꾼의 딸이다. 제법 큰 성공과 결론적 몰락이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동화적인 행로를 걸은 외할아버지 덕분에 어머니는 어쩌면 귀하게 자랄 수도 있었지만 결국은 어렵게 성장했다. 그리고 선생의 아내가 되었다가 또 생각치도 않았던 식당 여주인이 되어 있었다.

만만하지 않았던 굴곡이 가르친 것일까? 어머니는 어려운 때마다 항상 자가발전을 했다. 아쉬운 대로 배고프던 시절을 '본전'으로 쳐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계산을 하기도 했고 더 괴로운 사람들과 비교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유쾌하지 않은 일로 젊은 나이에 학교에서 퇴직하고 중국집 카운터에 앉아 있는 남편을 보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내 어머니는 이 사과 한 알에도 행복해했다.

"이게 후지라는 건데, 새로 나온 사과야."
"새로 나왔어? 그럼 이건 공장에서 만드는 거야?"
"그게 아니라, 종자를 접붙여서 만들어낸 새 품종이야."
"응, 그렇구나."

위대한 과학자들은 의문이 풀릴 때까지 질문을 했다지만, 나는 상대방이 충분히 성의껏 설명을 했다고 생각되는 순간부터는 그냥 타협을 하곤 했다. 더 묻고는 싶었지만 웬지 미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아는 척하곤 했다. 국민학교도 안들어간 내가 '접붙이는' 게 뭔지 알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내내 행복한 웃음을 띠고 사과를 깎았다. 뻑뻑한 국광이나 푸석한 인도사과를 깎을 때하고는 확실히 다른 '사각사각'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고, 사과 껍데기가 동그라미를 두 개, 세 개 그릴 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진하게 퍼져나갔다. 노르스름한 육질 속을 리듬감 있게 가르는 칼날에 눈알을 모으고 있던 나는 아마도 천진하게 군침 넘기는 소리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침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사과를 깎는 어머니도 행복했을 것이다. 지금은 부사라고 부르는 그 후지 사과는 맛있었다. 신 맛 하나 없이 달고 향기로웠다. 또 어디 그 맛과 향 뿐이었으랴.

그 후지, 아니 부사가 이제는 반갑지 않다. 지금은 홍옥이 좋다. 왜일까? 어쩌면 부사가 싫어진 것은 없어 못 먹던 돼지고기에서 콜레스테롤을 떠올리고 단 맛으로 먹던 커피를 씁쓸한 원두커피로 바꾼 지금, 그렇게 우리의 몸이 지방질과 당분의 궁기를 면하면서부터 였는지도 모른다. 또 아니면 그 동안 인스턴트 세대의 입맛을 따라 계속 '접붙이기'를 다시 해온 부사의 맛이 이렇게 바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왕이면 이렇게 생각한다. 요즘 과일이 풍성해지고, 적어도 달력 보고 가계부 보면서 과연 오늘 과일을 먹어도 좋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면서 사과는 풍성하고 설레이는 작은 축제의 주인공에서 하찮은 입가심 재료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나 흠잡을 데 없이 무난하고 밋밋한 단 맛의 부사야말로 고기음식 한 그릇 먹고 한조각 씹고 나오는 입가심거리로 제격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사과 한 알을 깎으면서 동그랗게 모여앉아 새삼스런 대화도 나누는 축제를 꿈꾼다. 그래서 홍옥의 담백하면서도 자극적인 신 맛이, 그리고 촌스럽기까지 한 그 빨간 빛이 꼭 필요한 거다.
이제는 혈기어린 서러움도 다 삭이고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고 있는 내 어머니도 홍옥을 좋아한다. 어머니와 사과를 깎으며 새것들의 얄팍함과 후지 한 알에 호들갑 떨던 궁한 추억을 씹기에도 홍옥이 이제는 낫다.

사과는, 부엌에서 정갈하게 깎아다가 포크 곁들여 내오는 음식이 아니다. 온 식구가 동그랗게 둘러앉아 사각사각 두 바퀴 세 바퀴 돌아가는 참칼을 따라 눈알을 굴리며 맛이 있겠다느니 없겠다느니 내기도 걸어보며 군침 넘어가는 소리를 얹어야 한다.
내게 사과는 작은 축제요, 화해이며, 위로의 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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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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