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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모임 참석차 강화도에 갔다 오다가 나락이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들판을 보았습니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차를 잠시 멈추고는 논둑에 서서 벼이삭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까슬까슬한 느낌이 주는 가을 분위기를 한껏 즐겼습니다.

 

학교의 가을은 아이들 옷차림으로 옵니다. 아침에 교문 앞에 피켓을 들고 서 있다 보면 어느새 짙고 무거운 색의 가을 옷차림으로 학교에 오는 아이들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몇몇 아이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불그하고 반팔에 여름 슬리퍼 차림으로 등교를 해, 안쓰러운 마음이 들게 합니다.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요. 일제고사를 앞두고 혼자 들기 무거운 돌덩이 한 개를 안고 출근하던 작년 이맘 때가 생각 납니다. 당시 전국 모든 학생들을 똑같은 시험지로 평가해서는, 또 그 결과로 학생과 학교, 지역의 서열을 매기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들의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시험이라면 오히려 학교교육을 파행으로 몰고 가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줬고, 그 사소한 행위 하나로 학교에서 쫓겨나 1년째 거리에서 해직교사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벌써 1년... 아직도 일제고사로 신음하는 학교
 
당시 일방적인 일제고사 시행에 반대해 교단에서 쫓겨난 교사는 총 14명. 우리 해직교사들이 1년 전 예견했던 것처럼 학교 현장을 날이 갈 수록 황폐화되고 있고 아이들 삶은 출구 없는 막다른 길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강원도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서  밤 10시까지 아이들을 붙잡아놓고 일제고사 대비 시험공부를 시키고 있으며 일제고사 시험과목이 아닌 음악과 미술, 체육같은 과목은 일제고사가 끝나고 공부하도록 종용하고 있습니다. 

 

충청북도의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일제고사 대비 시험을 치르고는 시험점수가 좋지 않는 학생을 교장실로 불러 부모가 뭐하는 사람인지 묻곤 전학을 가도록 종용하기도 했습니다. 갑작스런 교장 선생님의 호출에 잔뜩 주눅이 들어 가슴이 콩당콩당 뛰는 아이에게 부모의 직업을 왜 물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또 공부가 부족하면 직접 가르칠 일이지 전학을 가라는 게 말이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또 충청북도의 한 학교에서는 교장 선생님이 평소에 시험볼 때 책상 한가운데 올려놓았던 가림판을 치우도록 권유했답니다. 물론 친구의 시험지를 넘겨다 보고싶은 유혹쯤은 참을 수 있는 도덕적인 품성을 기르기 위한 교육적인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대구에서는 11교시를 하는 학교도 많답니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11교시 수업을 마치려면 밤 9시 경까지 수업을 해야 할 텐데 아이들이 의자에 앉아 그냥 굳어져버리지나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혹사당하는 아이들도 문제지만, 밤 9시까지 수업을 한 교사는 다음 날 수업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밤잠을 줄여서 다음날 수업준비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마도 거의 모든 수업을 시험문제 풀어주는 것으로 채울 것입니다. 

 

오는 13일, 다시 일제고사 괴물이 몰려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오는 13일과 14일 시행되는 일제고사를 앞두고 벌어지는 현상인데 어찌보면 참으로 가상하고 피눈물 나는 노력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밤늦게까지 학교에 붙잡아두고, 그것도 모자라 시험점수가 낮은 아이를 불러서는 부모의 직업을 물어보고 전학을 종용하는 등 어린 학생이 감당할 수 있는 최고수준의 정신적 체벌을 주어 성적이 올라가도록 자극을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일제고사 성적으로 교사의 능력이 평가되고 교장의 학교경영능력이 평가되는데 어느 간 큰 교사와 교장이 교육과정을 지켜가며 사랑으로 아이들 가르치겠습니까? 더군다나 지역별 일제고사 성적이 발표되면 뒤처진 지역의 교육감은 '무능한 교육감'으로 찍혀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데 어느 간 큰 교육감이 '아이들의 재능을 찾아서 교육을 통해 적절한 자극을 주는 진정한 교육을 하라'고 학교장과 교사에게 이야기하겠습니까?

 

교사와 교장 그리고 지역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은 당연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제고사 성적을 올리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일제고사라는 괴물이 만든 지금의 현실입니다.

 

'결국 학생들 제대로 가르쳐보겠다'는 취지에서 실시한 일제고사는 시행한 지 겨우 1년만에 교육은 없고 어른들의 추악한 이해관계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재능은 각자 다양하고 적절한 경험과 자극을 통해 가꾸어가야 하는데, 사지선다형 일제고사 시험으로 그 다양한 사람의 재능과 능력을 찾아낸다는 것은 애당초 가당치도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아이들과 즐겁게 공부하고 싶습니다

 

 

지금 14명의 해직교사들은 전국을 돌며 국민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를 내쫓은 일제고사를 다시 교육현장에서 내몰기위해서 입니다. 10월5일 울산을 시작으로 부산-목포-광주-전주-대구-청주-천안을 거쳐 8일 현재 수원에 와 있으며, 내일은 춘천에 들렀다가 10월 10일엔서울에서 시민들을 만나 일제고사가 얼마나 우리 아이들의 삶을 망치는지 널리 알리려고 합니다.  

 

오늘(8일)로 '일제고사 폐지와 해직교사 복직을 위한 전국대장정'에 나선지 5일째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미 밤은 깊었지만 잠이 오지 않습니다. 오는 13일과 14일 일제고사를 앞두고 마음 졸이며 자신의 성장에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 시험문제집을 풀고 있을 제자들 생각이 나서요. 다시 학교에 돌아가서 아이들과 즐겁게 공부하는 꿈이라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구산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정상용 교사는 지난해 10월 치러진 일제고사 때 아이들에게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12월 16일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파면 통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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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고사 학부모학생의 자기결정권을 주었다는 이유로 해직된 해직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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