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정치 저관여층'이었다('무관심층'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래도 투표권이 생긴 이후 투표에 불참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2004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 촛불집회에 참석했었지만 이는 내가 뽑은 첫 번째 대통령이 1년여 만에 쫓겨난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에도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갔지만 당시엔 역사의 현장에 있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2016년 국정농단사태와 촛불집회, 탄핵사태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을 겪었고 이제 어느 자리에 가도 '아재'로 불리는 게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도 점점 커졌다. 여전히 정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더욱 많지만 이제는 시사프로그램을 즐겨 보고 응원하는 정치인도 생겼을 뿐 아니라 선거철이 되면 마치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선거 과정들을 스포츠 경기 보듯 흥미롭게 즐긴다.

오는 10일이면 제22대 총선이 열린다. 이번 총선에서도 주요 정치인들의 탈당과 창당과정, 그리고 각 당의 공천과 선거운동 과정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선거가 가까워오면서 189만 구독자를 자랑하는 '오마이TV'의 시청시간도 크게 늘었다). 하지만 선거과정을 지켜보면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장면도 적지 않은데 선거과정의 '페어플레이'를 포기한 듯한 몇몇 후보들에게 지난 2022년에 개봉했던 영화 <킹메이커>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킹메이커>는 1960~70년대의 현대사에 가상의 이야기를 섞어 만든 '팩션' 영화다.

<킹메이커>는 1960~70년대의 현대사에 가상의 이야기를 섞어 만든 '팩션' 영화다.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김대중 전 대통령 모티브로 만든 선거영화

<킹메이커>는 지난 2022년 1월에 개봉한 정치 드라마다. 할리우드에서도 지난 2011년 조지 클루니가 연출하고 라이언 고슬링, 조지 클루니가 출연했던 동명의 영화가 개봉한 적이 있다(할리우드 영화 <킹메이커>의 원제는 < The Ides of March >다). <킹메이커>는 2017년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을 연출하며 주목 받았던 변성현 감독이 <불한당>에 출연했던 설경구, 그리고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배우가 된 고 이선균과 함께 만든 영화다.

<킹메이커>는 영화 시작과 함께 "이 영화는 실제 사건과 인물을 모티브로 제작되었으나 허구임을 밝힙니다"라는 자막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대한민국 현대사나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킹메이커>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인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야기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선균이 연기한 서창대는 '선거판의 여우'로 불리던 '어둠의 보좌관' 고 엄창록을 모델로 만든 가상인물이다.

목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신인 정치인 김운범(설경구 분)은 자유당의 물량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선거캠프에 서창대를 영입하면서 선거 분위기는 급변했고 김운범은 서창대의 기발한 전략에 힘입어 자유당 후보를 꺾고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김운범을 당선시킨 서창대의 능력은 청와대까지 알려지게 되고 청와대에서는 고위관료들이 직접 내려와 서창대를 회유하려 하지만 서창대는 단 3초 만에 거절의사를 밝혔다.

전라도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된 김운범은 당 내 계파싸움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다 서창대의 설득으로 대선경선에 출마했다. 서창대는 다시 한 번 뛰어난 지략을 발휘해 당 내 3인자인 이한상 의원(이해영 분, 고 이철승 국회부의장의 가상인물)을 포섭해 결선투표까지 가게 만든다. 그리고 김운범은 결선투표 끝에 당내 2인자이자 유력후보였던 김영호 의원(유재명 분, 고 김영삼 대통령의 가상인물)을 꺾고 신민당의 대선후보에 선출된다.

김운범은 서창대 덕분에 경쟁자들을 제치고 대선후보가 됐지만 두 사람은 정치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랐고 이에 대해 설전을 벌이다 결별했다. 하지만 이는 두 사람을 이간질한 정부의 계략이었고 정부와 손을 잡은 서창대는 지역감정을 내세워 박대통령(김종수 분)의 승리를 이끈다. 그 후 정치에 환멸을 느낀 서창대는 정치판을 떠났고 1997년 김운범에 의해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질 때까지 한 번도 김운범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총선과정에서 눈살 찌푸리게 하는 사건들
 
 <킹메이커>의 주인공 김운범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만든 인물이다.

<킹메이커>의 주인공 김운범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만든 인물이다.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사실 유권자들은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정도에만 관심을 가질 뿐 지방선거의 시의원이나 구의원 같은 선거는 자신과 관련이 없으면 후보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선거에 나서는 후보 당사자들은 때로는 '인생을 건다'는 매우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선거판에 뛰어든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이를 두고 "선거가 가까워오면 많은 정치인들이 '광인(狂人)'이 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번 22대 총선을 앞두고도 선거판에서 여러 변화들이 발생하고 있다. 대통령 또는 당대표와 갈등을 빚었던 정치인들이 소위 제3지대 '빅텐트'를 노리고 신당을 창당했고 세를 불리기 위해 합당을 선언했다가 의견차이를 보이며 얼마 가지 않아 합당선언을 취소하기도 했다. 또한 법무부장관 출신의 신인 정치인이 창당한 신당은 창당을 선언한 지 한 달여 만에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총선 비례정당 투표에서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물론 공천과 선거운동 과정에서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정치인들도 적지 않다. 노동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야당의 한 4선의원은 공천과정에서 자신이 하위 10%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에 모멸감을 느낀다며 20년 넘게 몸담았던 당을 떠나 라이벌당에 입당해 자신의 지역구에 전략공천을 받았다. 21대 총선에서 서울에 전략공천을 받아 당선됐던 다른 의원도 자신의 지역구에서 컷오프를 당하자 다음날 곧바로 탈당을 선언했다.

야당이 공천과정에서 많은 잡음이 있었다면 여당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는 많은 논란들이 있었다. 특히 선거기간 내내 야당(특히 당대표) 비난에만 몰두했던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은 "정치를 개 같이", "쓰레기 같은 말", "범죄혐의 주렁주렁" 같은 욕설에 가까운 막말을 쏟아내며 유권자들의 지지와 결집을 호소했다. 선거 당선을 위해서라면 어떤 말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지난 며칠 선거판을 뜨겁게 달궜던 '대파논쟁' 역시 국민들의 쓴웃음을 자아냈다. 대통령의 "합리적인 대파 한 단 875원"으로 시작된 대파논쟁. 야당의 공세가 거세지자 여당 인재영입 1호인 후보가 "한 단이 아닌 한 뿌리 가격"이라고 해명했고 자신의 SNS에 '대파격파' 동영상까지 올렸다가 3월 29일 SNS를 통해 사과글을 게시했다.

정치인이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초심'
 
 김운범(오른쪽)은 서창대의 강한 주장과 치밀한 전략에도 정치인으로서의 초심을 잃지 않는다.

김운범(오른쪽)은 서창대의 강한 주장과 치밀한 전략에도 정치인으로서의 초심을 잃지 않는다.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킹메이커>에서는 김운범 후보가 "국민은 선거승리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서창대의 주장에 "저들이 틀렸다고 해서 우리가 옳은 것은 아니야. 수단이 목적을 삼켜 버리면 나라 팔아먹는 것도 독재하는 것처럼 합리화시킬 수 있는 것이네"라며 자신의 일관된 정치관을 피력했다. 현실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킹메이커>의 김운범 역시 대선후보가 된 후에도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초심'을 지킨 것이다.

선거에 뛰어든 후보들도 처음엔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정치판에 뛰어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혼탁한 선거판을 경험하면서 수단이 목적을 삼키고 오직 '당선'만을 위해 움직이면서 정치를 시작할 때 가졌던 초심을 잃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국민들은 타락한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끼며 정치에 대한 혐오를 갖게 되고 정치인들은 무관심한 국민들 사이에서 국민들의 삶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존재로 변해간다.

지금도 총선을 치르는 각 후보들의 캠프에는 수많은 '서창대'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도 후보의 당선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 다니고 있다. 하지만 캠프의 보좌진들과 달리 선거의 당사자인 후보들은 김운범처럼 끝까지 정치에 처음 뛰어들었을 때의 초심을 유지하면서 국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결국 현명한 국민들은 권모술수로 국민을 호도하는 후보가 아닌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는 후보에게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것이다.
킹메이커 선거 410총선 변성현감독 고김대중전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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