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용작가의 소설 <영웅문>은 1980~1990년대 무협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필독서였다. 사실 <영웅문>은 한국에서만 불리는 제목으로 원제는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로 이뤄진 <사조삼부작>이다. 하지만 1986년 국내에 <영웅문>이란 제목으로 처음 출판되면서 국내 독자들에겐 <영웅문>이란 제목이 굳어졌다. 소설 <영웅문>은 남성 독자들을 중심으로 큰 사랑을 받으며 국내에서만 800만 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처럼 인기소설이 영화로 제작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영웅문>은 홍콩영화의 부흥기인 1980~1990년대에도 좀처럼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영웅문>이 워낙 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주인공급 인물들도 다양해 2시간 내외의 영화로 줄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드라마로는 이미 수 차례에 걸쳐 제작되면서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처럼 영화화하기 어렵다고 알려진 <영웅문> 중 마지막 이야기 '의천도룡기'가 지난 1993년 영화로 제작된 적이 있다. 심지어 한창 다작을 하던 1990년대 초반 1년에 10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어내던 '홍콩영화의 공장장' 왕정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성룡의 아성을 위협하던 '무협액션의 장인' 이연걸과 떠오르는 신예스타 구숙정, 1인 2역을 맡은 장민, 코믹액션배우 홍금보 등이 출연했던 <의천도룡기>였다.
 
 <의천도룡기>는 레전드 무협소설 <영웅문>의 3부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의천도룡기>는 레전드 무협소설 <영웅문>의 3부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 (주)반도영상

 
짧고 굵게 활동했던 1990년대 인기 배우

한국에서도 1990년대 초반까지 고현정, 오현경, 김성령, 염정아 등을 배출한 미스코리아 대회는 연기자로 가는 등용문이었다. 홍콩 역시 미인대회인 '미스 홍콩'을 통해 배우로 데뷔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장만옥과 종초홍, 장민, 이가흔 등 홍콩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중화권 배우들 상당수가 미스 홍콩 출신이다. 구숙정 역시 20세가 되던 1997년 미스홍콩대회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TV드라마를 통해 연기를 시작한 구숙정은 1991년 주성치,유덕화와 함께 코미디영화 <정고전가>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2년 성룡과 함께 출연한 <시티 헌터>에서 발랄한 연기를 선보인 구숙정은  같은 해 <적나고양>에서 섹시한 매력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 시절 잘 나가는 홍콩배우들이 대부분 그렇듯 구숙정 역시 1992년 한 해 동안 10편의 영화에 출연했을 정도로 엄청난 다작을 소화했다.

그렇게 홍콩의 신예 배우로 자리를 잡아가던 구숙정은 1993년 자신을 발탁해준 왕정 감독의 신작 <의천도룡기>에 출연했다. 구숙정은 <의천도룡기>에서 백미응왕의 시녀이자 실질적인 히로인 소소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특히 어린 시절 태극권을 배웠던 실력을 발휘해 <의천도룡기>에서 많은 액션연기들을 직접 소화했다. <의천도룡기>는 구숙정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작품이기도 하다.

1994년까지 홍콩을 대표하는 다작배우로 이름을 떨치던 구숙정은 1990년대 중반부터 출연작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부터 홍콩의 패션재벌과 교재를 시작한 구숙정은 1999년 10월 결혼과 함께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다. 실제로 구숙정은 2000년 단역으로 출연했던 <십이야>를 끝으로 모든 연기활동을 중단했다. 물론 30대 초반의 나이에 결정한 구숙정의 이른 은퇴를 아쉬워하는 팬들이 적지 않았다.

결혼 후 3명의 자녀를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며 좀처럼 매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구숙정은 지난 2015년 중국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학창시절 구숙정의 열혈 팬이었던 슈퍼주니어 김희철과의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특히 구숙정의 세 자녀 중 엄마를 쏙 닮은 미모를 가진 첫째 딸 아일라는 지난 2월 한국에 내한했을 때 한국 연예계 데뷔를 준비한다는 루머가 나오기도 했다.

완성도 아닌 '감성'으로 보는 무협액션영화
 
 이연걸(오른쪽)과 구숙정은 <의천도룡기> 후에도 <소림오조>와 <탈출>에서 또 한 번 호흡을 맞췄다.

이연걸(오른쪽)과 구숙정은 <의천도룡기> 후에도 <소림오조>와 <탈출>에서 또 한 번 호흡을 맞췄다. ⓒ (주)반도영상

 
<황비홍> 본편 세 편과 외전 <철계투오공> <동방불패> <방세옥1, 2> <태극권> <소림오조> <이연걸의 보디가드> <이연걸의 정무문>. 이연걸이 1991년 <황비홍>을 통해 홍콩무협액션의 '대세'로 떠오른 후 4년 동안 찍었던 영화들이다. 이렇게 많은 작품들을 소화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연걸의 영화들은 대부분 고난도의 액션연기가 필요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영웅문>을 원작으로 한 또 하나의 무협액션 <의천도룡기>도 포함돼있다.

영화 <의천도룡기>는 김용의 소설 <영웅문> 중 3부에 해당하는 '의천도룡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103분이라는 길지 않은 런닝타임의 영화인 만큼 소설과 비교하면 삭제된 부분이 대단히 많다. 따라서 원작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원작과의 비교보다는 <영웅문>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의미를 둘 수 있는 작품이다. 그래도 국내에서는 이연걸의 명성 덕분에 서울에서 10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사실 2022년을 기준으로 보면 손에서 어설프게 발사되는 장풍과 와이어에 의지한 공중부양 등 특수효과나 CG의 퀄리티가 상당히 조악해 보인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아시아에서 그 정도의 대형 액션 장면을 구현할 수 있는 나라는 영화산업이 크게 발달한 홍콩 밖에 없었다. 이연걸과 홍금보,구숙정 등 액션에 능한 배우들의 화려한 연기에 그 시절의 '감성'을 더하면 <의천도룡기>는 충분히 재미 있게 감상할 수 있는 무협액션영화다.

1990년대 초반 여러 영화에서 주성치의 파트너로 단골 출연했던 조민은 <의천도룡기>에서 장무기(이연걸 분)의 어머니와 또 한 명의 여주인공 조민으로 1인 2역을 맡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성격과 품성을 가진 인물로 강직한 장무기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을 남기고 자결하지만 영악한 성격의 조민은 자신이 가진 독초의 해독제를 무기로 장무기와 거래를 한다. 조민은 <의천도룡기> 속편이 나왔다면 비중이 더욱 커졌을 인물이다.

하지만 <의천도룡기>는 오랜 기간 동안 속편이 제작되지 못했다. 1편에서 많은 제작비를 투입하는 바람에 개봉 후 제작사가 도산했고 점점 스케일이 커질 속편을 감당하겠다고 나서는 새 제작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표류하던 <의천도룡기>는 올해 OTT 영화로 속편이 제작·공개됐다. 드라마 버전으로는 1978년부터 2019년까지 8번에 걸쳐 만들어졌는데 한국팬들에겐 양조위가 장무기를 연기했던 1986년 버전이 가장 유명하다.

이연걸의 스승이 된 80년대 액션스타 홍금보
 
 80년대 코믹액션스타 홍금보는 <의천도룡기>에서 연기는 물론 무술감독으로도 참여했다.

80년대 코믹액션스타 홍금보는 <의천도룡기>에서 연기는 물론 무술감독으로도 참여했다. ⓒ (주)반도영상

 
할리우드의 히어로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어떤 계기를 통해 초인적인 힘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홍콩의 무협영화에서 주인공이 강해지는 과정은 반드시 '수련'이 동반돼야 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강한 힘은 혼자가 아닌 훌륭한 스승을 통해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9살에 조실부모하고 적의 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워진 장무기를 자신의 내공으로 버티게 해준 장삼풍은 장무기에게는 훌륭한 스승이자 생명의 은인이다.

장무기의 스승이자 무당파의 시조 장삼풍 역은 1970년대에는 이소룡 영화의 무술감독으로 활약했고 1980년대에는 성룡, 원표 등과 함께 홍콩을 대표하는 코믹 액션 배우로 명성을 떨친 홍금보가 연기했다. 사실 <의천도룡기>는 배우로서 홍금보의 전성기가 조금 지난 시점에 출연한 영화였는데 그럼에도 홍금보는 여전히 화려한 액션연기와 함께 무술연출까지 맡으며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영화 초반 장무기를 유혹하던 미모의 여성 주지약은 소소와 조민이 등장하기 전, 가장 먼저 장무기의 마음을 흔드는 인물이다. 하지만 주지약의 행동은 송청서(예성 분)와 짜고 장무기를 쫓아내기 위한 미인계였고 장무기가 위기에 빠졌을 때 소소가 등장해 장무기를 구해준다. 원작에서는 몽골군에게 아버지를 잃고 아미파로 들어가게 된 주지약의 뒷이야기가 소개되지만 영화 버전에서는 런닝타임의 한계로 주지약의 서사가 등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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