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한국 대중가요를 선곡해 들려주는 라디오 음악방송 작가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은 잠든 서정성을 깨워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에 맞춤한 음악과 사연을 통해 하루치의 서정을 깨워드리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며칠 전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 도시미관을 위해 화분마다 심긴 수국들이 안타까울 정도로 바싹 말라 있었는데, 내린 비로 물기를 다시 머금어 아름다운 자태를 회복한 걸 보니 왠지 마음이 흐뭇해졌다. 지난해부터 이어지던 가뭄은 대형산불이 연이어 몰아닥쳐도 속수무책일만큼 온 산하를 메마르게 만들었었고 거의 모든 이들은 이 가뭄이 언제쯤 해소될 지에 대해 궁금해하며 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했지 않은가.

현관 입구 신발장 한편을 차지하는 우산꽂이 속 우산들도 오래 그 쓰임새를 잃어 시들어 가는가 하면 , 너 나 할 것 없이 서서히 목마름에 지쳐 하늘에 대한 날 선 원망만 남아 있을 즈음, 너무나 감사하게도 비가 찾아와 준 것이다.

비록 이 오래된 갈증을 일시에 해소해줄 만큼 많은 비가 내린 건 아니지만 비가 내리는 동안만이라도 아주 잠시나마 불안했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어 좋았던 거 같다. 하지만 비가 가진 무장해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된 시간이 꿈결같이 지나가버리고, 안타깝게도 여전히 덜 적셔진 땅을 보며 다시금 비를 갈망하는 나 자신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비가 워낙 귀한 도시에서 자라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비가 내리는 우기 중에도 다음 날의 비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날씨 영향 받은 음악 선곡표
 
 비가 워낙 귀한?도시에서?자라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비가 내리는 우기 중에도 다음 날의 비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비가 워낙 귀한 도시에서 자라서인지 모르겠으나, 비가 내리는 우기 중에도 다음 날의 비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 pixabay

 
음악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사람들이 날씨에 정서적으로 꽤나 큰 영향을 받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늘은 날씨가 흐리니까 이 곡을 틀어주세요",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이 노래가 딱이잖아요", "그 외에도 눈이 오니까", "비가 내려서", "햇볕이 쨍쨍한 바캉스 시즌이니까" 등 날씨에 따라 듣고 싶은 노래도 시시각각 달라진다.

신청곡을 받는 코너에서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곡들이 묘하게 중첩되는 것이 자주 목격되곤 했다. 사람 마음,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걸 제법 통계학적으로 접근 가능하게 될 만큼.

작곡자들도 우리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는지, 날씨를 담은 노래가 예상을 넘어 어마어마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방송을 제작하는 입장에선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방송법에 따라 똑같은 곡을 일정기간 동안은 동일 프로그램에서 연달아 선곡하지 못했고, 이어지는 프로그램에서도 전 프로그램에서 선곡한 곡들은 피해야 했기에, 날씨의 변화가 급격하게 생기거나 특별한 움직임이 있는 날이면 프로그램마다 선곡 전쟁으로 몸살을 앓곤 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긴 했다. 그렇게나 많은 노래들이 존재하지만 대중의 취향을 고려해 선택되는 곡은 또, 그리 다양하지 못한 게 안타깝기도 하다.

특히 과우(잠시 동안 조금 내리는 비)지역으로 유명한 내 고향에서 비가 몇 달씩 내리지 않는 날이면 마치 기우제를 치르는 마음으로 이와 관련된 노래를 먼저 선점해 선곡표에 올리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였기에, 담당 프로듀서와의 협업이 매우 중요했다. 오랜 작가 생활로 2시간짜리 음악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오프닝 곡이나 코너의 꼭지에 해당하는 곡의 선곡권이 내게도 주어졌는데, 이때 나는 주로 오프닝 곡으로 한대수의 '물 좀 주소'를 선정했다.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사실 표면적으로는 '사랑에 대한 갈증'을 '물'이라는 상징적 단어에 적시해 표현하고 있는데, 듣는 이에 따라서는 이것이 자유에 대한 갈증도 될 수 있겠고, 그야말로 쩍쩍 갈라진 논이나 저수지를 바라보며 하늘에 구원의 물줄기를 내려달라는 소망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노래 가사에서 뻗어 나온 무한대의 곁가지들이 가지는 생명력 덕분이다.

'물 좀 주소'는 한국 포크록 분야에서 손꼽히는 명곡인 반면 대중적이지는 않다. 한동안은 금지곡이기도 했고, 라디오 프로그램의 오프닝 곡으로 올리기에는 뭔가 선동적이다. 그래서 이 곡을 선뜻 자신의 프로그램의 오프닝 곡으로 사용하는 프로듀서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어떤 고집이 있었다. 듣고 있으면 한대수의 걸걸한 목소리와 그보다 더 거친 염원이 하늘 한쪽에 즉시 닿아 곧 시원한 빗줄기가 쏟아 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를 간절히 기다리는 날이면 이 곡을 첫머리, 오프닝 곡으로 선곡해 큐시트를 작성하고는 했다. '하늘이여 듣고 계신다면 제발 물 좀, 비 좀 우리에게 주십시오'라는 멘트와 함께.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요오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어
놀리면서 밖에 보내네
아 가겠소 난 가겠소
저 언덕 위에로 넘어가겠소
여행 도중에 처녀 만나본다면
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요오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 한대수 '물 좀 주소' 가사


물론 '물 좀 주소'가 첫 곡으로 선곡된 큐시트를 보는 프로듀서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작가님 이 곡은 오프닝으로는 좀 그렇지 않아요?"라든가 "와, 우리 작가님 또 이곡 선곡하셨네" 혹은 "한대수씨하고 뭐 친인척 간이라도 되는 겁니까?"라는 오해의 말까지. 

그 수많은 반응들에 대처하는 내 대답은 오직 하나 "암요, 이 곡 틀면 비 와요. 믿어 보세요"였다. 그리고 어떤 압박에도 오프닝 곡으로 선곡된 '물 좀 주소'를 결코 물린 적은 없었다.

'물고문' 연상된다고 금지곡으로
 
 한대수의 '물좀 주소'가 수록된 앨범 <멀고먼 길>.

한대수의 '물좀 주소'가 수록된 앨범 <멀고먼 길>. ⓒ 신세계레코오드사

 
이 곡은 무려 1969년에 만들어진 곡이다. 미국에서 생활했던 한대수가 작정하고 우리나라에도 '핑크 플로이드' 스타일의 아주 긴 곡을 만들어 야심 차게 선보이려 했다는데, 당시 트로트가 주를 이루던 한국의 가요계 상황도 여의치 않았고, 이를 제대로 해석할 역량이 되는 연주자도 거의 없었던 데다, 대중들이 받아들이는 데도 무리가 있었다고 간파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순한 버전의 '물 좀 주소'로 탄생된 것이 바로 이 곡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전주 없이 바로 내지르는 파격 그 자체인 곡의 구성이나, 후렴구에서 '아 아' 로만 이어지는 다소 기괴한 부분, 그리고 과감히 나팔로 악기의 크로스 오버를 추구하는 등의 실험정신이 제대로 깃들어 있는 선험적인 곡이라 할 수 있겠다.

무시무시한 유신정권 시절, 위정자들은 노래 전반에 묘사되는 물이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도저히 납득키 어려운 이유를 갖다 붙이더니 금지곡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노래를 기타의 명인이었던 대학 선배와 넓디넓은 광장에 앉아 주거니 받거니 목청껏 부르다 막걸리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일라 치면, 그 막걸리가 그렇게 달 수가 없었는데 그렇게 근원을 알 수 없는 울분을 노래를 통해 내보내고 나면 아주 잠시나마 후련한 마음이 들곤 했다. 하지만 노래는 풀뿌리보다 더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어도 절대 쉬 뽑히지 않고 더더욱 뿌리를 사방에 뻗어 다시 불릴 때를 기다리므로, '물 좀 주소'의 영향력은 오십 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한껏 유효하다.

이제 다시 '물 좀 주소'를 듣는 우리는 자유와 평등, 사랑과 희망을 생각하며 쓴 가사를 엉뚱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에 대해 찬찬히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진짜 물이든 아직 흠뻑 젖지 못했기에 역설적으로 타오를 수밖에 없는 갈증에 대해, 그리고 미친 듯이 다가올 무언가를 갈망하는 한 사람의 열정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후렴구에 이어지는 나팔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가슴속 가득한 분노와 슬픔이 구름 떼를 만들어 이윽고 천둥과 번개를 몰아치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될테다. 꽉 막힌 세상을 향해 물을 달라 외치던 한 사내의 소망이 어느새 비가 돼 팍팍하고 건조하기만 한 천지를 담뿍 적시는걸, 마침내 목격할 수도 있으리라.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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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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