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우 감독의 <판도라> 포스터.

박정우 감독의 <판도라> 포스터.ⓒ 영화 홈페이지


1980년대. 시인 김남주는 수백 년 전 한국의 역사를 소급해 아래와 같은 문장을 자신의 시에 쓴다.

이윽고 조국의 운명이 기울어/오만가지 영화를 누리던 만조백관이 도망치고/왕조차 몸을 숨겼을 때/민초는 일어선다/아무 것도 누린 바 없고/나라부터 받은 바 없는 그들이/백척간두의 국가를 위해 몸을 일으킨다.

김남주가 촉수를 뻗어 더듬은 시인의 세계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려 몸부림쳤던 건 위정자나 벼슬아치가 아닌 필부필부(匹夫匹婦)였다. 이 부정하기 힘든 역사적 진실을 스크린에 담아낸 영화가 최근 개봉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박정우 감독이 연출한 <판도라>.

배우 정진영과 김남길, 문정희에 연기력 좋은 중견 김영애 등이 호흡을 맞춘 <판도라>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단순한 스토리라인과 컴퓨터그래픽을 적절히 섞은 긴박감 넘치는 화면 구성, 여기에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을 삽입해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개봉 2주 만에 3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극장을 찾았으니 세칭 '대박' 조짐도 보인다.

영화의 줄거리는 몇 마디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을 만큼 간명하다.

원자력발전소가 가동 중인 가상의 한 도시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그 지진으로 인해 원전시설 일부가 붕괴된다. 방사능 유출이 이어지는 건 당연지사. 국가적 위기상황이 닥친 것이다. 그러나, 무능하고 비도덕적인 정부는 사태 해결의 열쇠를 잃어버리고 허둥댄다. 결국 '자연재해-원전 붕괴-방사능 유출'이란 위기를 해결하려 나서는 건 그 도시에 사는 평범한 노동자들인데...

 한국의 역사.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하고자 발버둥친 건 정치인이나 관료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한국의 역사.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하고자 발버둥친 건 정치인이나 관료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영화 홈페이지


평범해 보이는 <판도라>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할리우드와 한국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은 재난영화가 제작되고 상영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판도라>는 '특별할 것 없는 작품'이라 말해도 반론의 여지가 별로 없다.

<판도라>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영화팬들의 보편적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전개되고, 간간이 등장하는 김남길(재혁 역)-김주현(연주 역) 커플의 웃음 유발 에피소드도 이미 익숙한 것이다. 주인공이 전국에 방송되는 TV에 등장해 '억지울음'을 유도하는 마지막 10분은 신파처럼 보이기에 거북살스럽다는 관객도 없지 않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전개와 결말. 그럼에도 <판도라>를 보는 내내 두렵고 섬뜩한 감정을 감추기는 힘들다.

왜일까? 이는 영화 <판도라> 속 설정이 우리의 현실과 판박이처럼 닮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른바 '불의 고리' 위에 적지 않은 원자력발전소가 가동 중인 한국, 얼마 전 경북 경주 일대에서 진도 5.8의 강진이 발생한 한국, '세월호 참사' 때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불리는 국정 농단사태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정치인들을 목도한 한국, 이처럼 '영화 같은 현실'이 진행되고 있는 한국사회에 산다는 것이 그 두려움과 섬뜩함을 부른 게 아닐지.

<판도라>는 관객들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한국인의 일상은 얼마나 오래 안온할 수 있을까? 당신들은 국가적 재난이 닥쳤을 때 앞장서 이를 극복하려는 정치인을 가지고 있는가?" 이 물음 역시 긍정적 답변을 내놓기 힘들기에 섬뜩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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