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교수가 <오마이뉴스>에 두 편의 글을 기고했다. 화가 조영남의 검찰 기소를 '작가 역할의 예술사적 변화'라는 관점에서 비판한, 매우 유익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들 가운데 아직 읽지 않은 분이 있다면 시간을 내어 차분히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관련 기사 : 조영남은 사기꾼인가? / 유시민도 모르는 '조영남 사건'의 본질)

조영남 작가의 기소는 분명 불행한 사태다. 사건에 연루된 구매자, 조수(혹은 대리작가), 한국 미술계, 무엇보다 작가 자신에게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 번 터질 사건이기도 했고, 이 논쟁을 잘 이끌어 간다면 예술에 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 수준을 극적으로 높일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가급적 많은 분들이 이 논쟁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작가, 평론가, 예술 이론가뿐 아니라 법학자, 경제학자, 그리고 예술에 관심을 가진 모든 시민이 개입해 논의의 폭을 넓혀주기를 기대한다. 먼저 논쟁에 뛰어들어 수준 높은 토론의 장을 열어 준 진 교수에게 감사한다.

진 교수의 글은 '조영남은 사기꾼인가?'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나는 이 질문에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기꾼'은 사실을 다투는 말이 아니라, '남을 밥 먹듯 속여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비난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교수가 '유일한 관심사'라고 밝힌 '조영남을 기소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신 답하려고 한다.

내 답은 '그렇다'이다.

조영남 사건의 영역

 대중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씨가 최근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현대미술 안내서를 펴냈다.

"대중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씨. 필자는 '조영남은 사기꾼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는 없으나, 그의 기소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 남소연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이니만큼, 논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나는 진중권 교수가 제기한 많은 주장에 동의한다. 예컨대 예술가가 조수와 협업하는 것은 예술이 시작된 이래로 지속되어 온 전통이라는 점과, 이 경향은 소위 '팝아트'라 불리는 현대 미술의 조류에서 더욱 (때로는 극단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니, 동의하고 말고의 문제도 아닐 터이다.

내가 진 교수에게 동의하는 또 다른 부분은, 조영남 작가가 조수들(혹은 대작 화가들)과 작업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행동은 윤리적으로 비판 받을 만하며, 그 행태는 명백히 '사기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작가가 조수를 써서 작품활동을 할 때에는 관객과 고객에게 그 사실을 투명하게 드러내야 한다고 믿는다. 진중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영남에게 '사기죄'를 적용한 근거는 '대작의 사실을 고객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분명히 '사기적'(fraudulent) 요소가 있다. 나 역시 미학적·윤리적 이유에서 조수의 손을 빌렸을 경우 그 사실을 고객에게 투명하게 밝히는 게 윤리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개인의 '윤리적' 권고일 뿐, 그게 예술가에게 부과되는 '법적' 의무인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서 진교수와 내 입장이 갈린다. 그는 앞의 글에서 '관객-구매자', '창작 행위-거래 행위', '윤리-법'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있다. 예술 작품은 미술 시장에 매물로 나오는 순간 '상품'이 되고, 이 시점부터 '윤리적 비판'으로 끝날 문제가 '법적 판단'의 문제로 바뀐다.

진중권 교수는 검찰의 기소를 비판하면서, "현대미술의 규칙을 왜 대한민국에서는 검찰이 제정하려 드는가?"라고 묻는다. 이 항의는 다소 부당한데, 검찰은 '현대미술의 규칙'이 아니라 '거래행위의 규칙'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조영남 작가는 1) 대리작가를 사용해 작품 활동을 했을 뿐 아니라, 2) 고객에게 그 사실을 숨기거나 속여 팔았다.

앞의 행동은 진 교수가 말한 미학적-윤리적 영역이지만, 뒤의 행동은 윤리와 법이 동시에 개입되는 영역이다. 다시 말해, 이 시점에서도 조영남은 미학적-윤리적 비난을 받을 만하지만, 재판에서 혐의가 사실로 드러날 때에는 법적 처벌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피해자들이 민사상의 피해보상을 요구할 때 책임져야 할 몫은 별도다.

예술과 법의 영역

예술작품의 생산과 유통의 두 영역을 칼로 자르듯 나누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 문제일 뿐이다. (나는 진중권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이론과 현실,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괴리를 절감했다) 조영남 문제가 아니어도, 현실의 예술에는 '법'이 일상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예술작품은 시장에서 거래자를 만나는 순간 '공정거래법'과 '세법' 등의 형법 적용을 받기 시작한다. (저작권법은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작동한다) 진중권 교수의 글은 작품의 구상과 실행 과정에 대해서는 타당하지만, 완성된 작품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측면은 설득력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형법 제347조는 사기죄의 구성요소와 처벌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사람을 기망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조영남 작가는 작품을 금전과 맞바꾸면서(재물의 교부,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할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거나 혹은 거짓 정보를 제공한(기망)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상대방이 알았더라면 해당 법률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 명백한 경우에는 고지의무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대리작가의 활용 여부가 구매 결정에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한 경우라면, 매도 전에 그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진중권 교수는 "오늘날엔 남이 그린 그림 위에 사인만 해도 본인의 작품이 된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에게 과격하게 들리겠지만, 예술 이론가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 이론과 별개로 '재산권 침해'라는 법적 현실이 존재한다. 구매자들 가운데 일부가 '대작 사실을 알았더라면 작품을 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구매자들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평론가의 자유다. 하지만 법적 판단은 작가뿐 아니라 구매자들의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 검찰은 조영남 작가의 행위가 사기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그림의 거래는 작가나 작품의 내용 및 평가에 따른 매수인의 주관적인 의도가 중시되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례를 인용했다. 대리작가를 쓴 작품을 '100% 본인의 작품'으로 볼지 여부는 작가 혹은 매도자의 입장뿐 아니라 매수자의 판단도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위작'과 '모작'의 차이

하동 조영남갤러리 전시된 '화투 그림'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 인근 '조영남 화개장터갤러리카페'에 화투 그림 등 조 씨 작품이 전시돼 있다.

▲ 하동 조영남갤러리 전시된 '화투 그림'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 인근 '조영남 화개장터갤러리카페'에 화투 그림 등 조 씨 작품이 전시돼 있다. ⓒ 연합뉴스


우리 사회가 지금 경험하고 있듯이, 예술은 매우 복잡한 주제다. 미적 가치를 논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여기에 항상 경제적 가치가 개입되어 문제를 더욱 골치아프게 만든다. 어느 나라든 유명 작가들은 위작 논란에 휩싸이기 일쑤고, 이때 투입되는 시각적 감별이나 물리화학적 검사는 미적 가치의 수호보다는 재산권을 둘러싼 싸움이 되곤 한다.

가끔 세계적인 미술관이나 경매소도 위작 문제로 홍역을 겪는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가짜들이 모두 불법적으로 만들어져 은밀히 유통되어 온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상당 수는 합법적으로 거래되던 모작들이다. 그렇다면 위작(fake)과 모작(copy)의 차이는 무엇일까?

미학적 관점에서 '위작'과 '모작'의 차이는 창작자의 의도와 목적에 있다. 대가의 작품을 흉내 내는 것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훈련 방법이기도 하고, 때로 솜씨 좋은 무명화가들이 자신의 역량을 뽐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고객의 입장에서 모작은 원본과 큰 차이 없는 걸작을 값싸게 소유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인터넷에는 합법적으로 대가의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웹사이트가 널려있다.

소셜미디어의 시대이니 만큼,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작품을 공모할 수도 있다(미국 평론가 제리 솔츠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모작을 손에 넣는 과정을 <뉴욕매거진>에 흥미진진한 칼럼으로 썼다). 하지만 일단 작품이 만들어져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하면 위작과 모작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도, 팔 때 허위 정보를 제공하면 위작이 되어 법의 처벌을 받는다.

미술 작품이 시장에서 거래될 때 중요한 것은 정보제공 여부이고, 이 영역에서 법이 개입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조영남 사건을 놓고 미학적 논의뿐 아니라, 법적 논의도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위작을 팔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학적 관점에서 작가로서의 조영남 작품을 아무리 진본이라 주장하더라도, 거래 상황에서 매도자로서의 조영남이 법적 의무로 제공해야 할 정보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 진본이 언제나 법적 진본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학적 판단이 반드시 조영남 작가의 손을 들어준다고 보기도 어렵다. (법적 판단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나, 기회가 된다면 별도의 글로 다루고 싶다) 예컨대 진중권 교수가 인용한 트렉 렉싱턴(Trek Lexington)은 글의 다른 부분에서, 조수 또는 대리작가 논쟁에서 고려해야 할 윤리적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결국 창작자와 관객 모두의 철학적 관점에 달려있다. 문제의 예술품이 작가 개인의 손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작품인가, 아니면 아이디어와 브랜드가 중요한 상품인가? 어느 경우든, 관객은 해당 작품의 (조수 사용여부에 관해)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1) 작품에서 개별 작가의 솜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 2)그 판단이 작가뿐 아니라 관객도 동의할만한 것인가, 3) 조수 혹은 대리작가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작가가 투명하게 밝히고 있는가다.

문제는 조수의 사용 여부가 아니다

정리해 보자. 조영남은 창작 과정에서 대리인을 써서 작업한 뒤 그 사실을 숨겼다. 이것은 진중권 교수도 말하고 있듯, 미학적, 윤리적 문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시장에서 거래했고, 판매자로서 구매자에게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며 팔았다. 이 부분은 법의 문제고, 마땅히 법률가와 법학자들이 다룰만한 문제다.

한국 검찰이 현대미술에 무지하다는 진교수의 말은 아마 옳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검찰의 조영남 기소가 '법이 건드릴 수 없는 규칙'을 침범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야만을 저질렀다고는 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조영남 대작 사기 사건의 핵심은 그가 조수를 썼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정보를 제공 혹은 제공하지 않고 작품을 팔았는가이고, 이에 대한 유-무죄 여부는 재판에서 가려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조영남의 기소에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조영남 진중권 대리화가 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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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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