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기사] 조영남은 사기꾼인가?

조수에게 그림을 대신 그리게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충격은 나도 받았다. 나는 대중이 이 뻔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 조영남 사건이 충격적으로 보여준 것은, 이 사회에 통용되는 예술의 관념이 대체로 19세기~20세기 초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중은 먹고 살기에 바빠서 그런다 치자. 문제는 '일부' 작가들이 드러낸 처참한 미의식의 수준이다. 명색이 작가라는 이들이 머릿속에 현대미술 1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빠뜨린 채 붓을 드는 것. 그거야말로 쇼핑몰에서 '컴퓨터' 판다고 돈 받고 택배로 '주판'을 보내주는 것 이상으로 부도덕한 일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인상주의 이전만 해도 작가들이 조수에게 작품의 물리적 실행을 맡기는 것은 창작의 일반적 관행이었다. 다빈치도 스승의 그림을 그려주다가 그가 그린 부분이 스승의 것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받은 덕에 유명해졌다. 루벤스나 렘브란트와 같은 바로크의 거장들도 모든 그림을 직접 그리지는 않았다. 루벤스의 경우 인물의 얼굴과 손 외에는 조수들에게 실행을 맡겼고, 렘브란트는 아예 조수들에게 '렘브란트 풍'으로 그리라고 지시했다. 그 시절 이탈리아에서 '작가의 손으로 만든'(fatto di suo mano)이라는 말은,

"어떤 법적 유효성, 즉 개인적·도덕적 책임을 보장하는 것이었지, 반드시 작가의 물리적 개입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Anna Tummers, Koenraad Jonckheere (ed.), Art Market and Connoisseurship: A Closer Look at Paintings by Rembrandt, Rubens and Their Contemporaries.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08. p.36)

즉 작가의 손을 거치지 않았어도 작가가 책임지고 '진품'으로서 법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뜻이었다는 얘기다. 오직 작가의 '터치'가 들어간 것만을 예술로 보는 관행은 인상주의 이후의 현상이다. 하지만 그 역사도 그리 길지는 못했다. 1917년 뒤샹이 변기에 사인을 함으로써 미술의 개념을 '시각적인 것'에서 '개념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뒤샹의 제스처는 아직 한 개인의 '일탈'에 불과했다. 하지만 1950~60년대에 미니멀리즘·개념미술·팝아트가 등장하면서 관념과 실행의 분리는 창작의 정상적 방식의 하나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다미엔 허스트 vs. 데이비드 호크니

 대중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씨가 최근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현대미술 안내서를 펴냈다.

대중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씨가 최근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현대미술 안내서를 펴냈다.ⓒ 남소연


물론 작가의 물리적 개입을 배제해야 현대미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념적 전회' 이후에도 작가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작품을 손수 제작한다. 60년대에 깨진 것은 그저 '오직 작가의 개인적 터치나 물리적 개입이 있어야만 예술'이라는 고정관념이다. 현대의 작가라면, 작품 제작의 전 과정을 자신이 수행할 수도 있고, 일부만 수행하고 나머지를 조수에게 맡길 수도 있으며, 아예 전 과정을 조수에게 떠넘길 수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할지는 작가 개인의 철학과 미학에 달려 있다. 다만, 이제 그 누구도 오직 제 방식만이 유일하게 옳은 창작의 방식이라 우길 수는 없게 된 것이다.

2012년 런던의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서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때 호크니는 전시회 포스터에 이렇게 써넣었다. "여기 있는 작품들은 예술가 자신의 손으로, 개인적으로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이를 다미엔 허스트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했다. 호크니도 이를 인정하며, 허스트처럼 실행을 조수에 맡기는 것은 "공인들(craftsmen)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논란이 일자 왕립예술아카데미가 호크니의 발언을 철회시키고 나섰다. 호크니는 "다른 작가의 작업 방식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는 그 어떤 발언도 한 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들은 호크니의 발언을 철회시켰을까?

호크니의 비판은 사실 매우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다. '개념적 전회' 이후 미술의 본질을 물리적 실행에서 찾는 것은 고루하게 들리고, 미술을 '공예'(craft)로 환원시키는 것은 중세로 퇴행하는 느낌까지 주기 때문이다. 이 해프닝의 결말이 보여주는 것은, 오늘날 오직 제 방식만이 진정한 미술이며, 그걸 따르지 않는 것은 가짜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작가의 터치가 있어야 진정한 작품인 것도 아니고, 조수를 써야만 현대적 작품인 것도 아니다. 각자 제 철학과 미학에 맞는 방식을 선택하면 그만이다. 우리나라에도 같은 얘기를 하는 이들이 있다.

"섬세한 붓질과 재료 해석이 생명인 회화에서 조수 운운하는 건 화가에 대한 모독이다."
- 이명옥 한국미술관협회장

이게 어느 시절 얘기던가? 회화라는 새는 오래 전에 "섬세한 붓질과 재료해석"이라는 새장 밖으로 날아갔다. 20세기 후반에 '회화'하면 떠오르는 게 추상표현주의다. 그 창시자인 폴록은 막대기에 공업용 염료를 찍어 캔버스에 뿌렸고, 바넷 뉴먼은 캔버스 위로 페인트 묻힌 롤러를 밀었다. 로버트 마더웰은 채색을 조수에게 맡겼고, 신표현주의 화가 임멘도르프도 말년엔 실행을 조수에게 맡겼다. 게다가 조영남의 것이 어디 정통 타블로(회화)인가? 똑같이 캔버스를 사용한다고 미학까지 통일할 필요는 없다. 각자 원하는 방식대로 작업하면 되고, 그게 다른 방식에 '모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려주는 게 미술계 관행이면 미술대학은 뭐 하러 다닐
까요? 이 표현은 전체 미술 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면 수십 년 자기 작업을 하는 사람은 바보인가요?
- 오영식 '대작 논란 부른 조영남, 작가의식은 대체 어디에?' 매일경제 2016/05/27


도대체 워홀의 작업이 왜 미술 하는 사람들에게 "모욕"이 되고, 허스트의 작업이 왜 다른 작가들을 '바보'로 만든다는 건지. 조영남의 몸에서 무슨 신비한 힘이 뿜어 나와 멀쩡한 작가들을 바보로 둔갑시키기라도 했단 말인가. 바보 같은 소리들에 대한 대꾸는 이쯤 해두고, 이제 조영남을 겨냥한 비판들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지 검토해 보자.

물리적 개입이 있어야 예술인가?

조영남을 겨냥해 수많은 비난의 목소리들이 나왔다. 그 목소리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 20세기 미술에서 "개념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은 19세기적 관념에 사로 잡혀 작가의 물리적 실행을 예술의 본질로 간주하며 그것이 빠진 작품은 아예 예술에서 배제하려 한다. 대중들(과 일부 몰지각한 화가)들은 대체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둘째, 20세기 미술의 개념적 전회를 들어서 아는 사람들. 이들은 대작의 관행 자체는 인정하나, 이상하게도 조영남에게만은 그 관행을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모종의 미적 선민의식 때문이다.

먼저 첫 번째 부류를 살펴보자. 이들은 '미술'에는 반드시 작가의 물리적 개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이 그린 작품 위에 사인만 한다고 해서 본인의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 (...) 회화 작업에 있어서는 작가의 붓 터치나 화면의 질감, 감정, 철학, 색채 등과 같이 무수히 많은 것이 합쳐져서 하나의 결과물인 그림으로 재탄생 된다."
- 서양화가 이태수, '미술계를 희롱한 조영남 대작(代作) 사건'. 경남도민일보

첫 문장부터 현대미술의 개념적 성격을 부정한다. 물론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처럼 회화의 생명은 터치나 색채, 감정이나 철학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 개인의 미학일 뿐, 모두가 따라야 할 보편적 규범은 아니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오늘날엔 남이 그린 그림 위에 사인만 해도 본인의 작품이 된다. 소설가 김이경이라는 분의 말이다.

진중권은 "작가는 콘셉트만 제공하고 물리적 실행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관행"이라면서 그런 것도 모르는 '교양 없는' 검찰을 비판했다. (...) 실행보다 콘셉트라는 주장도 미심쩍다. 당장 나만 해도 콘셉트보다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실행'에서 더 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 김이경, 화이트 리뷰 인터뷰 '예술가의 항해술' 주간경향 6월호

이 분 역시 20세기 미술의 개념적 성격을 의심하며, 예술은 "온몸으로 밀고 가는 것"이며 그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실"이라 강변한다. 택도 없는 소리다. 인상주의 시대에 탄생한 그 관행은 20세기 초면 벌써 흔들리기 시작한다. 예술은 "온몸으로 밀고 가는 것"이라는 유치한 클리셰. 거기에는 이렇게 대꾸하련다. '예술은 스모가 아니다.'

유시민 전 장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1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메니페스토청년협동조합 초청으로 열린 제3회 모의국가 오픈 특강에서 '내각의 구성과 의사소통'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유시민 작가(자료사진)ⓒ 남소연


존경하는 유시민 작가도 한마디 거든다.

"창작활동은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노동이 포함돼 있다."

꼭 그런 건 아니다. 1960년 이브 클랭의 퍼포먼스 <인체측정>은 20세기 '개념적 전회'에 결정적 기여를 한 작품으로 꼽힌다. 거기서 그는 정장 차림으로 전라의 여성들이 몸에 페인트를 묻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말로 동작을 지시했다. 이렇게 옷에 물감 한 방울 안 묻히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그는 기존의 '블루칼라' 미술과 구별하여 '화이트칼라' 미술이라 불렀다. 이로써 그가 하려 한 것은 미술에 꼭 노동이 포함돼야 한다는 (유시민 작가가 아직 갖고 있는 그)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 글의 제목을 낚았다.)

작가의 물리적 개입을 예술의 '영원불변'한 '보편적' 규범으로 여기는 것은 다수 대중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 대변자의 말을 들어 보자.

개념미술의 사례를 들어 조 씨를 방어한 논리는 '우매한 대중이 현대미술의 개념도 모르면서 마녀사냥을 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져 많은 반발을 샀다. 조수가 하는 작업의 범위는 주로 단순 반복적인 작업이라는 것, 작가가 제작을 대행시켰다면 그것을 구매자들에게 알렸어야 하는데 조 씨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 조 씨의 작업은 개념미술이 아니라 단순 회화 작업으로 봐야한다는 등의 반론이 제기되었다. 
- 고재열, '예술과 사기는 한 끗 차이?' 연극人 칼럼. 2016/06/09

기자다운 정치 감각으로 일단 대중부터 등에 업는다. 그가 등에 업은 대중은 물론 대부분 현대미술의 '개념적 전회'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제 주장의 근거는 다른 데서 구해온 모양이다. 그거, 혹시 여기서 가져온 거 아닌가? 

"그(=조영남)가 다른 이에게 시킨 것은 워홀의 경우처럼 익명성이 강한 복제의 작업이 아니라, 그린 이의 개인적 터치가 느껴질 수도 있는 타블로 작업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애매함이 있다. 또 하나, 미니멀리스트·개념미술·팝아티스트들은 내가 아는 한 작품의 실행을 남에게 맡긴다는 사실을 결코 감추지 않았다. (..) 하지만 조영남의 경우 내가 아는 한 그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다니지 않았다. 여기에 또 다른 모호함이 있다."
- 진중권, '조영남은 사기꾼인가?' 매일신문

그가 나한테 "제기"된 "반론"이라고 들이댄 근거들은 모두 내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내 얘기를 가져가면서 그가 빠뜨린 것은 거기에 붙인 "애매함"과 "모호함"이라는 말. 그 두 단어로써 내가 암시한 것은, 조영남을 향한 이 그 두 가지 비판도 칼로 무를 자르듯 명쾌한 넉다운 논증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왜?

첫째, 설사 타블로라도 화투의 모티브를 사용한 한 조영남의 작업은 여전히 '팝아트' 안에 있고, 터치가 강한 표현적 타블로라고 대행을 안 시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마더웰은 조수들이 칠한 그림에 덧칠을 했고, 신표현주의의 대가 임멘도르프도 말년에는 실행의 대부분을 조수들에게 맡겼다. 둘째, 대행의 사실을 알리는 게 바람직할지라도 작가에게 그것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적을 하면서도 "애매함"과 "모호함"이 있다고 유보를 달아 두었던 것이다.

20세기 미술의 '개념적 전회' 자체를 부인하니, 결국 미술의 본질을 '솜씨'나 '손재주' 같은 데서 찾게 된다. 그의 글은 이어진다.

"조씨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 붓의 터치가 거칠다는 것이었다. "조씨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 (...) 여러 번 나눠 깨작깨작 긋기 때문에 그림이 깔끔하지 못하다"라고 표현했다. 송 작가는 조 씨가 똑같은 그림을 여러 장 그리라고 주문해서 마분지를 대고 대충 그린 적도 있다고 했다. 여기서 개념미술은 좌표를 잃는다. 자기보다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의 그림을 단지 생계를 위해 마지못해 그려준 그림에서 어떤 예술혼이 남아 있을까?"
- 고재열, '예술과 사기는 한 끗 차이?' 연극人 칼럼. 2016/06/09

그의 말대로 정말 예술의 본질이 솜씨에 있을까? 사유실험을 해 보자.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송 작가가 "깨작깨작" 그리는 조영남보다 뛰어난 솜씨로 그림을 그려 시장에 내놓았다고 하자. 과연 팔렸을까? 만약에 팔렸다면, 지금 그가 남의 그림이나 그려주고 있지는 않을 게다. 솜씨는 더 좋은데 왜 그의 작품은 안 팔릴까? 간단하다. 콘셉트가 없거나, 혹은 콘셉트를 미술계에 관철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운대가 안 맞았거나. 이것이 현대미술의 논리다.

('콘셉트만으로 작가가 된다니 참 쉽죠, 잉?' 댓글에다 이렇게 비아냥댄 바보들에게. 쉬우면 직접 해 보시라. 변기에 '사인'해 미술관에 들고 가보라. 받아줄까? 당연히 안 받아준다. 왜? 그 행위가 미술사적 의미를 가지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1916년이면 뒤샹보다 1년 앞서니, 그때는 아마 그 행위가 미적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되는가? 아직 아니다. 아직 그 변기가 왜 작품인지 설명하며 그 논리를 미술계에 설득시키는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마분지를 대고 대충" 그리는 것은 팝아트의 표준적 기법이다. 워홀의 그림도 조수들이 사진 위에 트레이싱 페이퍼를 대고 대충 베낀 것이다. 그들도 "생계를 위해 마지못해 그렸고", 그러니 "예술혼"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위대하다. 캔버스에서 그 유령을 쫓아낸 것. 이 엑소시즘이 뒤샹과 워홀의 공적이기 때문이다. 기자 생활 하며 '아우라'라는 말쯤은 주워 들어 봤을 게다. 발터 베냐민은 "예술혼" 운운하는 것을 예술의 "속물적 관념"이라 부르며, 그 아우라를 파괴하는 걸 현대적 지각의 특징으로 꼽았다. 그 새로운 지각의 예술적 구현이 바로 뒤샹과 워홀이다.

기자는 한탄한다. "현대미술이 참 고생이 많다." 맞다. 워홀이 등장한 지 60년이 넘도록 기자에게 이런 것까지 설명해 줘야 하니,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게 다 현대미술이 헬조선에 들어온 죄려니 한다. 또 다른 분의 반론을 들어 보자.

"대신 그려주는 게 미술계 관행이면 미술대학은 뭐 하러 다닐까요? (...) 대충 자기 생각으로 스케치를 하고 비슷한 그림을 그린 후 자기보다 손재주가 나은 사람에게 부탁해서 그리면 미술 공부는 뭐 하러 합니까."
- 오영식 '대작 논란 부른 조영남, 작가의식은 대체 어디에?' 매일경제 2016/05/27

그 역시 "손재주"를 미술의 필수적 요소로 본다. 미대에서 배우는 게 손재주뿐이라면 그냥 미술학원 다니는 게 낫다. 참고로, 현대의 작가들이 조수를 쓰는 경우 중의 하나가 바로 스킬이 부족할 때다. 골리즈키가 인도화가들을 조수로 쓴 것은 "인도 미술의 스킬을 익히려면 20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조선일보의 기자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조수를 쓴 이후 조영남의 그림이 더 좋아졌단다. So what? 허스트는 제 그림은 자기가 그린 것보다 조수 레이첼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 다닌다. 개념적 전회 이후 솜씨는 더 이상 작품의 본질로 간주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비전'이다.

첫째 부류는 이처럼 (1) 작가의 물리적 개입을 '예술'의 기준으로, (2) 그 실행의 솜씨를 '좋은 예술'의 기준으로 여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실행을 남에게 맡긴 작품은 분류적 의미에서 '예술'이 아니며, 그 실행의 솜씨가 떨어지는 작품은 평가적 의미에서 '좋은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믿을 수 있다. 실제로 '어떤' 회화는 "섬세한 붓질과 재료 해석"이 생명이어서 조수를 쓸 수가 없다. 그런 회화를 하는 것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예술의 '영원불변'하는 '보편적' 규칙으로 내세워 남들에게까지 강요할 때 발생한다.

영원불변한 예술의 보편적 '본질'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의 모든 장르에 공통된 특징은 없듯이, 미술의 모든 장르, 회화의 모든 유형에 공통된 특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수한 영역에만 유효한 미학(가령 "섬세한 붓질과 재료해석")을 다른 곳에까지 강요할 경우, 60년대 이후 미술의 여러 흐름들, 가령 미니멀리즘·개념미술·팝아트·옵아트, 해프닝과 퍼포먼스 등은 미술의 범위에서 배제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예술이 등장하는 데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예술의 보편적 특성을 가정하는 것을 '본질주의의 오류'라 부른다. 첫째 부류는 이 오류에 빠져 있다.

동시대 미술의 대가들은 외려 이들이 예술의 '본질'로 여기는 그것을 파괴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 부류가 아직도 가진 그 고정관념과 싸웠고, 그 싸움에 이겨 오늘날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개념적 전회'라고 해서, 지금은 현대이니 전통적 방식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과거에는 그게 회화의 유일한 방식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선택 가능한 여러 옵션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다만 그게 작품을 만드는 유일한 방식인 것은 아니다. 다시 인용하자. 

"예술가의 터치를 회화의 진품성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20세기 예술을 앞 세기들의 예술과 그토록 다르게 만들어준 개념적 혁명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다." (David W. Galenson, Conceptual Revolutions in Twentieth-Century Ar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p.198)


조영남만 하면 안 된다?

 대중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씨가 최근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현대미술 안내서를 펴냈다.

대중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씨가 최근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현대미술 안내서를 펴냈다.ⓒ 남소연


이쯤 해두고 두 번째 부류로 넘어가 보자. 이 부류에 속하는 이들은 최소한 현대미술의 '개념적 전회'(conceptual turn)가 일어났다는 사실쯤은 어디서 주워 들어 안다. 그래서 대개 자신이 현대미술을 안다는 자부심부터 드러낸다. 예를 들어 보자.

"교양 있는 나는 그가 말했듯 미술계에서 대작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앤디 워홀 같은 이는 아예 '공장(The Factory)'을 차려 작품을 생산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관행에 대한 저항이라면 모를까 관행이 예술의 기준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김이경, 화이트 리뷰 인터뷰 '예술가의 항해술' 주간경향 6월호

이렇게 "교양 있는" 분들은 대작의 관행이 새삼스럽지 않음을 안다. 그저 조영남이 워홀처럼 "관행에 저항"하지 못했다고 비난할 뿐이다. (이 분은 첫째와 둘째 부류에 동시에 속하는데, 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때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다.) 다른 목소리를 들어 보자.

"'미학 전문'을 자칭하는 평론가 진중권은 (...) 조영남을 두둔하고 되레 '현대예술'에 '무지'한 대중을 조롱했다. 결코 '현대예술'에 무지하지 않은 나조차 분노심에 몸을 떨었다. 틀렸다. 내가 아는 한 어떤 식으로든 세상의 '관행'에 역행하는 게 예술이다. 뒤샹이든, 워홀이든 모두 그걸 해냈다. (...) 그런 점에서 조영남의 화투 그림은 예술이 아니다. 관행에 따른 손쉬운 돈벌이 수단이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김경. '조영남과 진중권에게 예술모독죄를 묻다' 허핑턴포스트 2016/05/31
 

"결코 현대예술에 무지하지 않"은 이 분 역시 조영남이 "관행에 역행"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이들의 공동적 오류는 '예술'의 평가적(evaluative) 의미와 분류적(classificatory) 의미를 혼동한다는 데에 있다.

사실 "관행이 예술의 기준이 아니"라거나 "관행에 역행하는 게 예술"이라는 말은 예술을 '평가'하는 기준이지, 예술을 분류하는 '기준'이 아니다. 즉, '좋은' 예술의 기준이지 그냥 예술의 기준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은 '좋은 예술'의 기준을 들어 조영남의 작업이 분류적 의미의 예술이 될 자격마저 부인하려 한다. 논리적으로 따져 보자. "관행이 예술이 아니다." 혹은 "관행에 역행하는 게 예술이다." 이 문장은 그들의 발언 속에서 동시에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1) '워홀의 대작은 관행에 역행했기에 '좋은' 예술이나, 조영남의 대작은 관행을 따랐기에 '좋은' 예술로 평가할 수 없다.' (평가적 의미)
(2) '워홀의 대작은 관행에 역행했기에 예술이지만, 조영남의 대작은 관행에 순응했기에 예술로 승인할 수 없다. (분류적 의미)

(1)은 100% 옳다. 그러나 하나마나한 얘기다. 누가 조영남이 워홀만큼 위대하다고 하던가? 그들이 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실은 (2)다. 하지만 그것은 100% 헛소리다. 왜? 관행에 따른 대작은 워홀 이후 조영남 외에도 수많은 작가들이 해왔는데, 그것들까지 모두 예술이 아니라 할 수는 없잖은가. 그러니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2)를, 하나마나한 소리이기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진리(1)의 외피로 포장해서 내놓을 수밖에.

예술에 '좋은' 작품만 있는 게 아니다. 실은 후진 작품들이 더 많다. 관행에 저항하는 것만이 예술이라면, 생산되는 작품의 90% 이상은 예술이 아닐 게다. 조영남의 것이 평가적 의미에서 '좋은 예술'이 아닐 수는 있지만, 분류적 의미에서까지 '예술'이 아닌 건 아니다. 또 "돈벌이 수단"이라고 예술이 아닌 것도 아니다. 예술의 상업화는 팝아트의 미적 전략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가령 워홀은 예술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드는 것을 아예 작업의 콘셉트로 삼았다. 하지만 그의 "돈벌이"는 오늘날 예술로 '분류'되며, 심지어 훌륭한 예술로까지 '평가'된다.

딜레탕트들은 그렇다 치고, 이제 미술을 업으로 삼은 이의 발언을 보자. 비평가 임근준은 언젠가 어느 가수의 그림을 평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가수는 그의 지인으로 안다.

"그의 그림 대다수는 어디까지나 '그림 그리는 가수'의 작품으로 볼 때 귀엽고 사랑스럽다(마치 조영남의 화투그림처럼)."

필요한 맥락에서는 그도 '그림 그리는 가수' 조영남을 데려다 적절히 써먹는다. 화투그림이 "귀엽고 사랑스럽다"던 그가 지금은 조영남의 작업을 "윤리적 타락에 저급한 미적 사기"라 비난한다. 실망이 컸나? 물론 그는 그렇게 말해도 된다. 다만, "미적 사기"가 곧 '법적 사기'는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해두었다면 좋았을 게다. 미적 의미에서 '사기꾼'과 법적 의미에서 '사기범'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검찰이 사기죄를 적용하려 드는 상황에서 그는 '사기'라는 말을, 그것의 평가적 의미와 분류적 의미를 구분하지 않은 채, 그냥 유통시켰다. 이는 내 윤리적 직관에 현저히 배치된다.

어느 신문사에서 설문을 돌렸다. 조영남의 작업이 '사기'라는 데에 국민의 74%가 동의했단다. 이 나라는 워낙 민주적이라 예술의 규칙도 다수결로 정하는 모양이다. 이 74%의 지지를 받는 국민평론가, 인민비평가의 수준도 앞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자신이 뭘 좀 안다는 자부심부터 선포한다. "다들 어설프게 아는 게 병이야." (그 환자들 명단 속에는 물론 내 이름도 들어 있다.) 이어서 말한다. "조영남은 발상과 노동의 분리로 어떤 미적 실험을 한 것도 아니다." 뭔 얘길까? 이 문장 역시 그의 말 속에서 동시에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1) '워홀의 대작은 미적 실험이니 위대하고, 조영남의 작업은 미적 실험이 아니니 위대하지 않다.' (평가적 의미)
(2) '워홀의 대작은 발상과 노동을 분리하는 미적 실험이니 용인돼도, 조영남의 대작은 미적 실험이 아니므로 용인할 수 없다.' (분류적 의미)

(1)은 100% 참이나 하나마나한 얘기다. 누가 그걸 부정하던가? (2)는 그가 하고 싶은 얘기이나 누가 봐도 100% 헛소리다. 앞의 두 딜레탕트와 똑같이 임근준 역시 자기가 하고 싶은 헛소리를 너무나 뻔해서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100% 지린의 외피에 싸서 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걸 논리학에서는 '애매구의 오류'라 부른다. 둘째 부류는 이 오류를 교묘히 활용한다.

관행을 깨야 하나, 따라야 하나?

요약하자. 첫째 부류는 현대미술의 '개념적 전환'을 아예 모르거나, 혹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예술의 본질을 실행의 솜씨에서 찾으며, 예술엔 반드시 작가의 신체적 개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예술의 영원불변의 보편적 규범이라 강변한다. 그래도 뭘 좀 아는 둘째 부류는 적어도 현대미술의 '개념적 전환'은 인정한다. 그러나 개념의 평가적 의미와 분류적 의미도 구별 못하는 그 식견의 알량함으로 인해 첫째 부류와 차별화하지 못한 채, 그들의 손을 잡고 검찰과 언론이 쌓아올린 화형대 위에 함께 나뭇가지나 올려놓고 있다.

진짜 코미디는 이 두 부류가 서로 반대되는 이유에서 조영남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첫째 부류는 조영남이 미술계의 관행을 깼다고 비난하고, 둘째 부류는 그가 관행에 따랐다고 비난한다. 그러니 어쩌라고. 이렇게 서로 대립됨에도 불구하고 그를 퇴출하자는 데에선 묘하게 의견이 일치한다. 전자는 무식하게 대작의 관행을 부인하고, 후자는 유식하게 대작의 관행을 인정한다. 그런데도 '화수'(畫手) 추방론만은 둘이 사이좋게 공유한다. 어찌 된 일일까? 이는 후자가 (위에서 본 것처럼) 대작의 관행을 인정하되 이상하게 조영남에게만은 그걸 용인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이 미적 선민들은 조영남을 작가로 진지하게 받아주는 것을 모양 빠지는 일로 여긴다. 미대도 안 나온 딴따라의 화투 쪼가리까지 예술이라니 고상하신 뮤즈 신의 자존심이 상하신 게다. 이는 이들만이 아니라 미술을 좀 안다는, 혹은 미술을 좀 한다는 다른 많은 이들의 감정이기도 하다. 이해가 간다. 하지만 솔직히 재수는 없다. 뒤샹과 워홀이 깨려고 한 게 그런 허위의식이었다. 베냐민은 그것을 "예술의 속물적 개념"이라 불렀다. 예술, 개나 소나 해도 된다. 거기에 무슨 자격이 필요한 거 아니다. 그걸 보여주려고 뒤샹은 변기에 사인을 하고, 워홀은 회화에 찌라시 기술을 도입했던 것이다.

세 가지 오류

개념의 총체적 혼돈. 신경외과 수술처럼 섬세한 논의가 필요한 곳에 톱과 망치와 곡괭이가 난무한다. 바로잡으려니 견적이 안 나온다. 이제까지 이 사건에 관해 쏟아져 나온 다양한 논리들을 살펴보면, 이 거대한 해프닝이 결국 세 가지 '오류'가 어지럽게 뒤엉켜 발생한 사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 검찰이 저지른 '범주오류' (category mistake)
(2) 대중과 언론이 빠져 있는 '본질주의의 오류'(essentialist fallacy)
(3) 딜레탕트들이 사용하는 '애매구의 오류'(fallacy of equivocation)

이게 매트릭스의 실체다. 빨간 약을 먹을지, 파란 약을 먹을지는 알아서 선택하라. 검찰의 허접한 프로그래밍에 온 나라가 이렇게 홀라당 프로그래밍 당하니, 학창 시절 공부 좀 한다는 놈들이 왜 다들 법대 가려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비평가라면 이런 상황에서 (1) 검찰의 무차별적 개입을 비판하며, (2)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오해를 풀어줘야 한다. 비평가마저 같지도 않은 괴상한 허위의식에서 대중과 언론에 몸을 싣고, 이들과 함께 검찰의 행보에 힘이나 실어주었으니, 한심한 일이다. (원래 내가 하는 이 일을 그가 했어야 한다.)

조영남을 편드는 게 모양이 좀 빠지더라도, 스타일 구겨야 할 때는 구겨야 한다. 그 궂은일을 한 이가 없지는 않았다. 바로 비평가 반이정이다. 그라고 어디 조영남이 예뻐서 이 광란의 굿판을 말리고 나섰겠는가? 외려 그는 언젠가 조영남이 쓴 책이 안 좋은 점만 두루 골라 갖춘 "나쁜 대중 미술서"라고 혹평을 한 적이 있다. 화투그림이 "귀엽고 사랑스럽다"던 국민비평가께서 "조영남 구속하라" 악쓰는 미술계 어버이연합 뒤에 서 계실 때(아, '아방'하다.), 조영남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반이정은 정의로운 대중님들께 "조영남을 쉴드"친 죗값을 톡톡히 받았다. 욕 봤다.

비평을 의미하는 'critic'이라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kritein'으로, 원래 '가르다'는 뜻을 갖고 있다. 비평가라면 섬세한 개념적 도구를 사용하여 복잡한 상황을 제대로 가를 줄 알아야 한다. 조영남 사태를 보자. 3개의 차원이 서로 뒤엉켜 각각의 차원에서 개념의 대혼란이 벌어졌다. 신경외과의 도구로 섬세히 다뤄야 할 문제를 톱으로 썰고 망치로 두드려 댔으니 저 지경이 될 수밖에. 검찰과 언론과 대중이 한 패가 돼 광란의 굿판을 벌일 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일을 한 비평가가 하나라도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의 글을 소개한다.

반이정, '조영남 대작사건을 읽는 법 | '관행'을 해명한다'

이 사건과 관련해 쏟아진 수많은 글들 중에서 제 정신 가진 거의 유일한 글이다.

덧붙이는 말

첫 글에 달린 댓글들 읽어 보았다. 아직도 욕하는 자들이 있다. 아예 해독 능력이 없는 이들은 '그냥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 두자. 머리론 알겠는데 마음이 안 따라주는 이들은 이해하자. '고정관념'이란 게 원래 수학의 공리만큼 강력한 거다. 그걸 깼으니, 현대의 미술가들은 얼마나 위대한가? 다음에는 그들이 그토록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현대미술의 '개념적 전회'에 대해 살펴보자. 문제가 된 예술가-조수의 협업도 결국 이 전회의 산물이다. 예술은 사회의 촉수다. '개념적 전회'는 미술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떤 한계와 연동된 문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70%는 한국에서 제작된다고 한다. 하지만 동화와 채색을 100% 한국에서 한다고, 그게 어디 한국 애니가 되던가? 머리가 노는 사회는 수족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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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10년이 넘었는데도 '편집' 잘 모르겠네요.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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