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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완득이>의 한 장면.
 영화 <완득이>의 한 장면.
ⓒ 안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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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가는 길, 오늘따라 유난히 외국인이 많다. 불과 5년 전만해도 지하철에 외국인이 있으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이제는 익숙한 듯 저마다의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인들의 머리 속에 아직도 '그들은 외국인'이라는 인식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시 금천구에 거주하는 황인옥(44·가명)씨는 이주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가리봉동의 재개발 소식을 듣고 "동남 아시아인들이 이사 올까 무섭다"고 말했다. "이주 노동자들이 많으면 범죄가 많이 일어날 것" 같다는 것이다. 2003년 한 개그프로그램에서 "사장님 나빠요"를 외치던 블랑카가 떠오른다. 이제 2011년 블랑카는 "한국인들 나빠요"를 외칠지도 모른다.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된 이주노동자들은 모진 현실을 감내해왔다. 2011년,  블랑카가 꼬집었던 한국 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 우리는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11월 27일, 동대문구의 푸른시민연대에서 만난 이주노동자 시온(32·가명)씨와 젠델(30·가명)씨는 올해로 한국에 들어온 지 각각 13, 14년이 됐다. 그들은 처음 한국에 왔던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 처음 입국하셨을 때 한국은 어떠했나?
젠델 :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동료가 죽었다. 동료는 시나 작업도 힘들고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그만두겠다고 했었다. 공장장은 월급날에 다른 사람들을 다 보내놓고 동료를 죽였다. 드럼통에 넣고 산에서 태우기까지 했다. 두 달 뒤에야 산에서 시체가 발견됐다. 큰 충격을 받았다."

시온 : "가장 힘들었던 건 언어다.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왔기 때문에 "한국말 할 줄 몰라요"만 알고 있었다. 만날 "몰라요"라고 대답하자 사람들은 나를 "미스터 몰라요"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 1990년대에 비해 이주 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많이 바뀌었나?
젠델 : "인식은 많이 안 변했다. 이주노동자를 떠올리면 옷차림이 촌스럽고, 작업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사라고 해서 의사 가운을 입고 밖에 나가나? 우리도 똑같다. 밖에 나갈 때는 작업복 입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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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고 젠델씨와 시온씨, 나드히라씨가 이불 빨래를 위해 혼자 사시는 한 할머니의 댁에 방문했다. 여러본 와 본 집인듯 익숙하게 이불을 걷는 그들의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인터뷰가 끝나고 젠델씨와 시온씨, 나드히라씨가 이불 빨래를 위해 혼자 사시는 한 할머니의 댁에 방문했다. 여러본 와 본 집인듯 익숙하게 이불을 걷는 그들의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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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델씨와 시온씨는 각각 18살, 21살에 한국에 입국해 30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주노동자라 칭하는 사람들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제한적이다.

영화 <완득이>에서 완득이는 교회에서 만난 이주노동자인 핫산의 눈에 난 상처를 보고 혼자 다니지 말라며 걱정을 한다. 그런 완득이에게 핫산은 제대로 된 어퍼컷을 날린다. "그럼 링에 둘이 같이 들어가요?" 당황하는 완득이의 그 표정이 바로 내가 영화를 보며 지었던 그 표정이다. '취미생활'과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연결 짓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온씨와 젠델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삶도 우리와 별반 다르진 않음을 알 수 있다.

-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주로 무엇을 하나?
시온 : "주말에 친구들과 배드민턴을 쳤지만 이젠 한국어 공부에 매진한다."
젠델 : "사진에 관심이 많아 사진을 찍으러 다니거나 지인들에게 요리를 만들어준다."

- 센터를 통해 봉사활동도 한다고 들었다. 어떤 봉사활동을 하나?
젠델 : "동네 어르신들에게 반찬을 만들어드리기도 하고 이불 빨래를 도와드리기도 한다."
시온 : "지난주에는 독거노인들의 집을 찾아 바람이 들어오는 창을 문풍지로 막고 월동 준비를 도와드렸다."

문득, 그들은 왜 자신에게 상처도 많이 줬던 한국이란 나라에서 봉사활동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기자 역시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은근한 무시와 차별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위로와 가족과 친구들의 사진을 보는 것 뿐이었다.

- 봉사 활동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젠델 : "사람 마음은 다 똑같다. 좋은 일하면 기분이 좋다. 한국말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있지만 일단 내가 먼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온 : "한국에서 혼자 계시다가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뉴스에 나와서 놀랐다. 사람들이 남의 일에는 무관심한 것 같다. 예전에는 웬만하면 인사 정도는 했었는데 지금은 많이 변했다. 누군가 먼저 보여주어야 따뜻했던 사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의식은 많은 부분에서 아직 유리장막에 갇혀져 있다. 함께 살고는 있지만 우리에게 아직도 그들은 타자이고 이방인이다. 여태껏 이주노동자는 같은 밥상에 앉은 불편한 손님 같은 존재로 다가왔을 뿐이다. 같은 밥상을 써야해서 함께 밥을 먹긴 하지만 무서워서 껄끄럽거나 연민의 대상이라서 신경이 쓰이는, 목에 턱 걸린 생선 가시 같았다.

편견의 가시는 생각보다 깊숙이 그리고 곳곳에 박혀있을 수도 있다. 연대의식을 갖고 함께 제거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와 '그들'은 한 껍질의 피부를 벗겨내면 똑같은 심장을 가진 인간이다. 진정한 다문화 사회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태그:#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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