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천 선수 강석천 선수의 타격자세

▲ 강석천 선수 강석천 선수의 타격자세 ⓒ 한화 이글스 홈페이지


플레이오프 4차전이 열리던 1999년 10월 14일, 만명 가까운 관중이 비좁은 대전 야구장 스탠드를 가득 메웠다. 전날까지 세 판을 따낸 이글스는 그 날 경기를 마저 잡으면 한국시리즈로 올라설 수 있었고,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1회 말에 먼저 로마이어의 홈런으로 3점을 따내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정규리그 우승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베어스의 반격이 거세게 이어졌다. 베어스는 3회에 곧바로 장원진의 적시타와 우즈의 2점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더니 4회에는 케세레스의 적시 2루타로 한 점을 더하며 경기를 뒤집고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4회 말, 2사 후에 들어선 백재호의 홈런으로 다시 균형을 맞춘 다음 유격수 실책으로 출루한 조경택을 1루에 둔 채 타석에 들어선 9번 타자 강석천이 베어스 투수 이경필의 공을 제대로 잡아당겼고, 공은 홈플레이트 위에서 좌중간 스탠드 중단까지 큼지막한 아치를 그려냈다.

역전 결승 2점 홈런. 그 해 플레이오프 네 경기에서 11년차의 노장 9번 타자 강석천이 만들어낸 네 번째 결승타점이었다.

어두움 속에서 빛났던 선수

박정태·이정훈·김경기, 혹은 박철순이나 이만수까지. 성적과 무관하게 그들의 이름이 팬들에게 특별한 것은, 그들이 팀과 영욕을 함께 한 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홈런을 치고 무실점행진을 벌이는 동안 그들의 팀도 고공행진을 했고, 그들이 부상에 쓰러져 신음할 때 팀도 바닥으로 추락했던 기억이, 곧 그들을 팀의 상징으로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팀의 침체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선수들, 그래서 그 팀의 팬들에게조차 존재감이 희미한 선수들도 다시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 팀 동료들이 경쟁하듯 빛을 내뿜던 시절에는 그 빛에 묻혀있어야 했지만, 하나 둘 불이 꺼진 암흑기에도 홀로 남아 고군분투하며 팀을 치욕에서 구하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이름 하나가 강석천이다. 그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사이 한국시리즈의 단골손님이었던 최강팀 이글스의 주축선수였지만,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고 불렸던 장종훈·이정훈·이강돈이라는 화려한 이름들 사이에 비집고 들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정훈과 이강돈도 떠나버리고 장종훈의 방망이도 서서히 식어가며 침체기로 빠져들던 90년대 후반에 강석천은 자신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99년 팀의 유일한 우승을 이끌어낸 주역이 되기도 한 선수였다.

제7구단 이글스의 낮과 밤

우승 1999년 우승. 주장인 강석천 선수(왼쪽에서 두 번째)가 송진우(가운데)와 함께 우승컵을 들어올리고 있다.

▲ 우승 1999년 우승. 주장인 강석천 선수(왼쪽에서 두 번째)가 송진우(가운데)와 함께 우승컵을 들어올리고 있다. ⓒ 한화 이글스


1986년에 한국프로야구의 '제 7구단'으로 출범한 이글스는 선발주자들의 텃세 속에서도 불과 3년만인 1988년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할 정도의 급상승세를 걸었다.

그리고 강석천이 팀에 합류했던 1989년에는 원년 투타의 핵이었던 한희민·이상군·유승안에 재일교포 고원부가 절정에 올랐고, 착실하게 보강해온 이정훈·송진우 같은 거물급 신인에 더해 한용덕과 장종훈이라는 연습생출신의 거물까지 길러내며 정규리그 정상에 오르는 전성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데뷔 첫 해 강석천은 70경기에 출장해 .289의 타율을 기록하며 무난히 자리를 잡았고 이듬해에는 확실한 주전 3루수로서의 입지를 굳히며 역시 2할 8푼 대의 방망이 솜씨를 과시했다. 그러나 적어도 88년부터 92년까지의 5년간, 공격 주요 부문 랭킹은 이글스 타자들의 안마당이나 다름이 없었다.

타격왕(89년 고원부, 91~92년 이정훈), 타점왕(89년 유승안, 90~92 장종훈), 최다안타왕(87년 이정훈, 89~90년 이강돈, 91년 장종훈), 홈런왕(90~92년 장종훈)이 정신없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이렇게 무려 다섯 명의 동료들이 공격 주요 부문 타이틀을 다투는 팀에서 좋을 때는 2할 8푼 대에서 나쁠 때는 2할 2푼대까지 출렁댔던 성적은 지극히 평범했거나, 혹은 다소 부족했다.

그러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글스의 상승세도 시들해지는 날이 왔다. 너무 뜨겁게 달아올랐던 '악바리' 이정훈이 부상 때문에 무너져 내렸던 93년, 6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며 덜컹거리더니 강정길에 이어 이강돈마저 전력에서 이탈한 97년부터는 2년 연속 7위로 가라앉으며 침체기를 시작해야 했다. 정민철과 송진우로 시작해 구대성으로 마무리되는 마운드는 건재했지만,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3할대 타자를 좀체 배출하지 못하는 타선이 균형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팀이 맞은 위기의 시대 버텨낸, 버팀목 '강석천'

그러나 그나마 창단 첫 해를 제외하면, 그 어렵던 시절에도 이글스가 단 한 번도 꼴찌로까지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한 원인이 바로 강석천에게 있었다. 팀이 7위로 떨어졌던 97년에 입단 9년차를 맞으며 주장 완장을 찬 강석천은 그 해에 비로소 자신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데뷔 초반에 2할 8푼대의 타율로 쏠쏠한 공격력을 과시하는 듯도 했지만 이전 8년간 그의 이력은 대부분 2할 5푼을 밑돌고 있었고, 역시 데뷔 초에 10개 이상 기록해주던 홈런 수 역시 5년차이던 93년부터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결코 공격력 면에서 만족스런 3루수라고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일찌감치 노쇠기가 찾아온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대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에 그는 .322의 타율을 기록하는 깜짝 활약을 펼쳤다. 그것은 데뷔 9년 만에 처음으로 달성한 3할이기도 했고, 그 해 팀의 유일한 3할 성적이기도 했다. 

그는 시즌 초반 어깨 부상으로 이탈한 이영우를 대신해 톱타자로 나서기도 했고, 3번으로 올라가 공격의 중심을 잡기도 했다. 이정훈과 이강돈의 시절이 저물고 송지만과 홍원기가 아직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그는 서서히 내리막을 걷던 장종훈과 더불어 팀이 맞은 위기의 시대를 지탱해낸 버팀목이었다.

강석천의 끈끈한 활약 보여줬던 그해 플레이오프

강석천 코치 한화 이글스 선수들의 수비위치를 지시하고 있는 수비코치 강석천

▲ 강석천 코치 한화 이글스 선수들의 수비위치를 지시하고 있는 수비코치 강석천 ⓒ 한화 이글스 홈페이지


1999년 우승은 이글스의 팬들에게 갑작스러우면서도 새삼스러운 사건이었다. 창단 14년 만에 맛본 첫 우승이었지만, 해마다 정규시즌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우며 일찌감치 한국시리즈로 직행하던 전성기를 10여 년이나 지나서, 뭔가 불안하고 비어있는 듯한 전력으로 정규리그 4위에 턱걸이해 기어올랐던 99년에야 손에 잡힌 우승컵이었기 때문이다.

그 1999년, 이글스는 비로소 제 기량을 발휘한 톱타자 이영우(.334)로부터 시작해 45홈런의 로마이어와 '30-30'을 기록한 데이비스, 그리고 '20-20'의 송지만 등을 묶어 오랜만에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부활시키고 있었다. 전성기는 지났어도 팀의 상징인 장종훈이 여전히 27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중심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로 9번에 배치되어있던 서른 세 살의 노장 강석천이 자신의 두 번째 3할 타율(.303)을 기록하며 무려 24 번이나 도루를 성공시키는 투혼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그 폭발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특히 그 해 그의 끈끈했던 활약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플레이오프였다. 드림리그와 매직리그로 나뉘어 경기를 치르고 각 리그의 1위 팀과 2위 팀이 엇갈려 맞붙어 7전 4선승제로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다투었던 그 해, 매직리그 2위 이글스는 드림리그 1위 베어스와, 매직리그 1위 라이온즈는 드림리그 2위 자이언츠와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그 해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한국시리즈 못지 않은 화제를 낳은 라이온즈와 자이언츠의 플레이오프에 비해, 당초 베어스와 이글스의 플레이오프는 '좀 기우는' 승부로 점쳐졌다. 그 해 무려 295개의 타점을 합작해낸 '우동수(우즈-김동주-심정수) 트리오'를 내세워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베어스에 반해 그 해 포스트시즌 진출 팀 중 가장 승률이 낮은 것이 이글스였기 때문이다. 정규리그에서의 팀 간 전적에서도 이글스는 베어스에 8승 10패로 밀리고 있었다.  

최강이 아닌, 평범한 팀에게 주어진 우승컵

은퇴식 지난 2003년 9월 20일, 대전 기아전에서 은퇴식을 한 강석천 선수.

▲ 은퇴식 지난 2003년 9월 20일, 대전 기아전에서 은퇴식을 한 강석천 선수. ⓒ 한화 이글스 홈페이지


9월 24일부터 트윈스와 유니콘스를 상대로 한두 번의 3연승을 곁들인 기적적인 10연승을 올리는동안 트윈스가 막판 19경기에서 5승 1무 13패로 자멸한 덕분에 올라선 가을무대였다. 그러나 사실 그 해 9월까지만 해도 트윈스와의 리그 2위 경쟁과 드림리그 3위 유니콘스와의 와일드카드 경쟁(한 리그의 2위 팀이 다른 리그의 3위 팀보다 승률이 떨어질 경우 그 두 팀이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놓고 3전 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게 했던 제도)에서도 힘겹게 부대끼던 이글스는 결코 '강팀'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이글스는 최강 베어스를 4연승으로 완파했고, 맞은 편에서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전력을 완전히 소진하고 올라온 자이언츠와는 만나기도 전에 이미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해 한국시리즈 MVP는 구대성이었지만, 이글스 팬들이 그 해 우승을 떠올리며 그 못지않은 무게를 느끼는 이름 또한 강석천이다.

팀이 최강일 때는 뒤에서, 전열이 무너진 순간에는 앞에서 밀고 끌며 15년간 이글스를 지킨 터줏대감. 그 사이 통산 1457경기(16위)에 출장해 1342개의 안타를 때리고(24위) 139개의 병살타(6위)와 155개의 실책(8위)을 저지르기까지 그의 선수생활은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왔고, 또 통산 네 번째 사이클링히트(1990년 8월 4일 돌핀스전), 1993년과 1997년에 기록한 두 번의 1회초 선두타자 초구홈런 같은 자잘하지만 반짝거리는 기록들을 양산해냈다.

작정하고 달려들면 물거품처럼 사라지다가도 묵묵히 걷다보면 어느 새 손 안에 들어와 있는 것. 정말 소중한 것이 존재하는 방식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야구선수들이 단 한 번의 우승에 모든 것을 걸지만, 긴 세월을 지나 우리가 야구선수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말 소중한 것은 그 헌신적인 몸짓으로 그려온 고단한 길 자체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 <126, 팬과 함께 달리다>(풀로엮은집) 등이 있다.
야구의 추억 강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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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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