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말 투아웃, 주자 만루에서 한 점 뒤진 MBC 청룡의 4번 타자 백인천과 맞선 OB 베어스의 에이스 박철순. 그것은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내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상황이다.

'미국'과 '일본'이라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절대적 마력의 원천이 후광을 만들어내던 그들은 각기 어떤 투수로도 막을 수 없는 날카로운 방망이, 그리고 어떤 타자도 손 댈 수 없는 완벽한 공을 의미했고, 그들의 충돌은 절대적인 위력의 창과 방패 중 하나가 부러지거나 뚫려야 하는 모순의 순간이었다.

4할 1푼 2리. 아마 또 다른 한 시대를 열어놓을 만한 기술과 장비의 변화가 일시적으로나마 투타의 균형을 헝클어놓을 어느 순간까지는, 영원히 닿을 듯 닿을 듯 하면서도 닿을 수 없는 목표선으로만 남아있을 그 신화적인 기록이 작성된 것은 바로 그 1982년이었다. 그리고 그 기록을 만들어낸 것은 나이 마흔의 '감독 겸 선수' 백인천이었다.

'야구'는 알겠는데, '프로야구'는 뭐지?

청룡 시절의 백인천 선수 한국 프로원년의 백인천 선수

▲ 청룡 시절의 백인천 선수 한국 프로원년의 백인천 선수 ⓒ bic135.com


프로야구란 무엇인가? 그것은 1982년 벽두 초부터 내 또래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야 했던문제였다. 어쨌거나 야구란 무엇인지 알겠는데, 새삼 새로이 개막된다고 유난을 떠는 '프로' 야구란 과연 무엇일까? 그 문제에 대한 가장 유용한 힌트를 주는 것은 당시 종목이름 앞에 '프로'를 붙이는 유일한 스포츠였던 '프로레슬링'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에 최초의 금메달을 선사해주었던 레슬링의 영웅 양정모가 보여주는 것은 대개 상대 선수와 어깨를 맞대고 손으로 마주 깍지를 끼우고 서로 돌며 허리를 잡고 뿌리치는 단순한 동작으로 내내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는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반면 프로레슬링 세계챔피언 김일이 보여주는 것은 링 밖에서 들여보낸 둔기로 뒤통수를 후려치거나 몰래 숨겨 들어온 고약한 가루를 눈에 뿌려대는 악당의 비열한 반칙에도 불구하고 전설 속의 천하장사처럼 상대방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려 패대기를 치거나, 끝내 통쾌한 박치기 한 방으로 실신시켜버리고는 두 다리 휘청거리며 영광의 벨트를 들어 올리던 감격의 드라마였다.

그래서 프로야구란, 등장하는 타자들의 절반 이상이 유격수 땅볼만 치고 물러나는 고교야구와는 달리 만화 속에만 등장하던 온갖 신기한 마구들과 전설의 특수타법들이 충돌하며 때로는 가루가 되어버린 공이 관중석 위로 흩날리고, 때로는 공이 일으킨 불길이 그라운드를 춤추게 만들 것으로 상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역시나 호랑이와 사자, 곰과 용, 그리고 거인과 슈퍼맨의 탈을 쓴 마스코트들이 어우러져 춤을 추며 프로레슬링을 떠올리게 할 만큼 요란스러웠던 개막식 식전행사는 우리의 기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롯데 자이언츠의 '거인'은 전혀 거대하지 않은 어느 사내가 망토와 중절모 같은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이었을 뿐이었고, 삼미 슈퍼스타즈의 '슈퍼스타' 역시 붉은 망토와 두 귀 뾰족이 솟은 가면을 쓴, 그렇지만 배트맨보다는 도깨비에 가까운 것 같았던 묘한 캐릭터였다.

시구 마치고 경기 나선 전두환 대통령?

일본 롯데 시절의 백인천

▲ 일본 롯데 시절의 백인천 ⓒ bic135.com



그러나 막상 개막된 프로야구경기는 심상하기 짝이 없었다. 홈런 몇 방이 터졌고 정신없이 많은 점수가 나오기기는 했지만, 고교야구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투구와 타구. 다만 더블플레이라도 하나 나오면 '저게 바로 프로'라고 강박적으로 갖다 붙이는 캐스터와 해설자의 호들갑을 빼면, 여전히 혼자 바쁜 유격수.

게다가 파릇파릇한 고교생들이 채우고 있던 그라운드에 들어선 칙칙하기 짝이 없는 '아저씨들'. 그 중에서도 타석으로 들어서면서도 연신 주자와 다음 타자에게 작전을 지시하느라 바빴던 '감독 겸 선수' 백인천은 참 당혹스런 그림을 연출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안방과 부엌을 오가며 곁눈으로 경기를 보며 앞머리 훤히 벗겨진 백인천을 마침 그 날 시구를 했던 전두환과 혼동한 내 어머니가 "저 양반은 시구나 했으면 얼른 청와대로 갈 것이지 뭘 경기까지 끼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느냐"고 혀를 찼었던가. 

일본에서 타격왕까지 지낸 타격의 달인이라는 설명이 있었지만, 나의 눈에 그의 타격자세는 그리 멋있는 편이 못되었다. 어떤 공이든 걸리기만 해보라는 듯 으르렁거리며 날카롭게 날을 세웠던 김우열, 이만수, 김봉연의 방망이와 비교하자면, 배트와 평행에 가까울 정도로 좁게 모아 쥔 두 팔은 어울리지 않게 다소곳했고, 스윙은 두 번 연속해서 휘두르더라도 못할 것 없을 만큼 잔잔했다. 승부의 거친 욕망이 질주하는 그라운드, 그 중에도 가장 걸쭉한 분위기를 풍겨대던 중년의 '감독 겸 선수'가 연출하던 여성스런 몸짓이란.

그는 그렇게 섬세하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청룡의 경기가 있던 야구장에 일찍 들어선 날이면, 경기 시작 전에 감독 백인천이 주심을 이끌고 경기장 이 구석 저 구석을 돌며 무언가 확인하고 합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언젠가 인천 도원야구장이 외야의 좁음을 가리기 위해 펜스 위로 쳐놓았던 높다란 쇠 그물 앞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백인천은 타구가 그 철망을 뚫고 넘어가거나, 혹은 철망에 끼어버리는 것 같은 시시콜콜한 상황들을 가상하며 심판을 테스트하듯 물었고, 조금 짜증스러운 듯 답하는 심판의 말을 되새기며 다짐을 받기도 했다. 어쩌면 당연한 상황, 어련히 알 만한 주심을 끌고 다니며 확인하고 다짐을 받던 그 철저함. 

야구 업종에 종사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 백인천

젊은 시절의 백인천

▲ 젊은 시절의 백인천 ⓒ bic135.com


1962년 2월, 아직 국교도 회복되지 않았던 적국 일본으로 날아갔던 그는 요즘 같은 '야구 외교관'이 아닌 '야구라는 업종에 취업한 이주노동자'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은 그를 몇 해 전까지의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유로 멸시했고, 아직 자본주의를 핏줄 속으로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던 한국인들은 '돈에 팔려 적국에 엎드린 매국노' 보듯 하기도 했다.

오로지 야구를 하기 위해, 그리고 기울어가는 집안에 생활비를 송금하기 위해,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백인천은 그런 척박함 속에서 치고 달렸다.

2년간의 2군 생활을 마치고 1군 주전으로 올라선 64년부터 그는 18년 동안 세 차례 3할을 치며 통산 .278의 타율에 209개의 홈런과 212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한 번의 타격왕과 두 번의 최다 2루타, 다시 한 번의 최다 3루타 기록을 만들어냈다. 재일교포 장훈을 능가하지는 못했지만, 그로부터 그어진 한 획을 이어받아 다시 40년 후에 나타날 이승엽이라는 후배에게로 전할 하나의 점을 일본 야구사에 확실히 찍어놓은 것이다.

그는 포수 출신에 한국 시절 고교생으로서는 사상 첫 홈런을 기록한 거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빠른 발과 예민한 주루 센스를 가진 선수이기도 했다. 1982년, 나이 마흔에 참가한 한국 프로야구 원년 리그에서 그가 만들어낸 기록 중에서 4할 대의 타율 못지않게 놀라운 것은 11개나 되는 도루였다. 시즌 80경기가 치러지던 시절, 몰수게임으로 인한 5게임 출장 정지 등의 우여곡절로 간신히 72경기에 출장해 기록한 마흔 살 선수의 두 자릿수 도루.

채 자리 잡지 못한 무대에서나 호령하며 희극적인 기록을 만들어낸 일본야구의 퇴물, 혹은 무작정 자기 스타일대로 윽박지르고 우겨 넣었던 고집불통. 무뚝뚝한 말투와 투박한 외모 덕에 우리 안에 쌓여온 그런 선입관과 달리 그는 무려 20년간이나 거친 무대에서 깎이고 다듬어진 차돌멩이 같은 사람이었고, 그 시절 우리의 눈썰미로 채 감상할 수 없었던 우아함과 세련미를 가진 기술자였다.

검도 선수들이 검을 그렇게 쥐듯, 그는 팔 근육에서 쓸데없는 힘을 빼고 유연한 대응력과 더 큰 회전력을 얻기 위해 배트를 쥔 팔꿈치를 안으로 모았고, 끝까지 공에서 떼지 않은 눈은 배트를 휘두른 뒤에도 몸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상대 배터리가 방심하는 순간이면 언제라도 2루를 훔칠 수 있는 감각이 살아있었고, 그런 감각과 체력을 유지할 만큼의 훈련량과 자세가 배어있었다.

아직 심판들 역시 일년내내 그것으로만 밥을 벌 수 없었던 시절, 룰 역시 정착되지 않았음을 알고 경기 시작 전마다 미심쩍은 것들을 확인하고 다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역시 그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경기 시작 전 주심과 함께 경기장을 순례하던 그의 모습은, 한 해 뒤 내야 이곳저곳에서 야구공을 굴려보며 지면의 기울기를 체크했던 장명부의 몸짓과 더불어 한국 야구 설계의 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 개척한 영원한 4할 타자

청룡 감독 시절의 백인천

▲ 청룡 감독 시절의 백인천 ⓒ bic135.com


첫 경기에서 겸손하게 5번으로 출발했던 첫 해, 그는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적으로 파란을 일으켰고 전설을 만들었다. 그가 기록한 .412의 타율과 .502의 출루율 .740의 장타율은 역대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55개의 득점, 23개의 2루타 역시 그 시즌 최다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19개의 홈런과 64개의 타점으로 2위에 올랐고, 상대 배터리를 시각적으로 교란하며 11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

그는 압도적인 선수였고, 놀라운 선수였다. 그러나 그 시절, 그저 한 몸을 불태운 박철순과 이선희의 방식으로 우리를 감동시킨 선수는 아니었다. 그는 차가운 엘리트였고 괴팍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기억의 한 켠으로 몰려난 채 폄하되고 망각되는 비운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한 시대의 설계자와 개척자는, 당대가 아닌 후대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법이다. 그 시절,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눈물 젖은 빵만을 씹다가 돌아온 박철순을 비롯해 '프로레슬링'의 요란함 밖의 것을 상상하지 못했던 팬들까지, 그 누구도 '프로'라는 것을 알지 못하던 한국에서 그는 유일한 '프로'였다. 그래서 그에 의해 기술과 훈련과 냉정한 자기관리의 의미가 이 땅에 전해졌고, 가치 있는 것을 값있게 평가하는 일의 정당함과 당당함을 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앞서 걸은 자가 감당해야 했던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그것을 끝내 극복해낸 의지와 노력의 힘. 그것에 감동하고 박수치는 것이야말로 후대인들의 몫이 아닐지. 

당당하던 시절을 한참 지나 병상에 누워서야 한 조각 사랑을 받고 사라졌던 수많은 이 땅의 아버지들처럼, 이제 길고 길었던 영욕의 세월마저 모두 흘려보낸 지금에야 떠올려지고 고개 끄덕여지는 이름. 그래서 우리 프로야구가 정말 한참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름. 백인천이다.

덧붙이는 글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음식을 매개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우장춘, 씨앗의 힘 씨앗의 희망>(봄나무)을 펴냈고, <오마이뉴스>를 통해 연재중인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백인천 김은식 야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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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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