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윤주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튼 선생은 아이들에게 권유한다. 책상에 올라가서 교실을 한번 둘러보라고, 그럼 늘 익숙한 공간이었던 그곳이 갑자기 달라 보일 거라고.

그 영화에서 유독 그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던 탓인지 나는 어떤 공간이든, 그곳이 좀 익숙해졌다 싶으면 종종 의자에 올라가 낯익은 공간 낯설게 보기를 시도한다. 단지 의자 위에 올라가서 눈높이를 달리했을 뿐인데도 내 참, 그 공간은 정말 다르게 보인다.

십 수년을 하루같이 보아서 낯익은 사람을, 물건을 다르게 보는 일, 이 일은 간단한 시도만으로도 가능한 일이지만 의외로 많은 새로운 느낌들을 가져다준다.

홍상수나 김기덕 등, 우리 영화계에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던 감독들의 영화에 붙는 수사 중에는 “기존의 영화 문법을 파괴하고…”가 있다. 그렇다면 “기존의 영화 문법”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우리가 익숙해져 온 이야기 방식, 이야기 소재, 혹은 카메라 기법, 조명 방식 등이 될 것이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자면, 헐리웃의 로맨틱 코미디가 대부분 해피엔딩이라는 것,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가 가진 일종의 “영화 문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독립 영화”라는 것들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버린, 아니 익숙해지라고 강요당한 “상업 영화”의 문법을 대부분 깨나간다. 그 문법 깨기 자체가 영화 만들기의 목적인 사람도 있을 테고, “상업 영화”와는 다른 소재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려고 하다 보니 결국 기존에 사람들에게 익숙한 문법을 깰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문법을 익혀나가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책상은 책을 놓고 보거나 도시락을 놓고 먹기 위해 있는 것이지,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사람은 평생 책상을 발로 딛고 서서 낯익은 공간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체험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낯익은 것 낯설게 보기는 그 시작부터 어렵거니와 기왕 시작했다 해도 조금씩 조금씩 익혀나가야 하는 지난한 일이다. 새로운 영화 문법을 익히는 일은 어쩌면 새로운 외국어를 하나 배우는 일만큼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 열매는 외국어 하나를 배워 그 나라 문화 전체를 알게 되듯이 크고 달다.

여기, 새로운 영화 문법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초장부터 너무 충격적일지는 모르지만 한번에 얻는 효과가 제법 짭짤할 영화들을 보여줄 영화제가 있다. “실험 영화 명품전”. 미디어 아트센터인 “일주 아트 하우스”가 개관 2주년을 맞아 여는 기획 영화제다.



ⓒ 강윤주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실험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영화를 산업적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예술 작품”으로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러니까, 그저 한바탕 웃고 싶다든지, 실컷 울고 싶다든지, 머리를 쉬게 하고 싶다든지 하는 목적으로 이곳에 가시는 분들은 없길 바란다. 이 영화 작가들은 1920년대 유럽의 모더니즘 정신을 이어 받아 “뉴 아메리칸 시네마”군을 형성한 이들이다. 그렇다고 수십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들만 상영되는 것이 아니고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다양한 제작년도를 가진 작품들이 선보인다.

이런, 벌써 어려워지기 시작하는군, 하고 생각하실 분들을 위해 덧붙이고 싶다. 20년대 유럽의 모더니즘이고, “뉴 아메리칸 시네마”고, 일단 제쳐두고 그저 영화를 한번 보시라. 그리고 도대체 왜 내가 저 영화를 보는데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가, 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라. 그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거꾸로 “기존 영화의 문법”이 무엇인지를 발견해낼 수 있다. 자, 매일 보던 영화 말고 좀 다른 영화를 한번 보러 가기로 결심한 당신, 책상을 밟고 올라서기로 작정한 당신, 떠나라, “실험 영화 명품전”을 보러!

10월 19일부터 22일까지 광화문 흥국 생명 빌딩, 일주 아트 하우스 “아트 큐브”에서 열리는 이 나흘간의 영화제의 상영 시간과 프로그램 등은 홈페이지( http://iljuarthouse.org/screen/s_view.html?e_uid=47 )를 참조하시면 되니 생략하기로 하고 상영되는 영화 중 한편을 소개한다.

그냥 해! (Passage a l’acte) 마틴 아놀드 (Martin Arnold): 93년작, 12분.



ⓒ Martin Arnold
놀랍게도 이 영화에는 그레고리 펙이 등장한다. <로마의 휴일>을 비롯하여 깔끔한 미국 신사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배우로서의 그. 마틴 아놀드는 그레고리 펙뿐 아니라 쥬디 갈란드와 같은 대표적인 헐리웃 배우들의 이미지를 비틀고 조롱하여 색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1950년대 미국의 한 가족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있고 아버지(그레고리 펙)는 신문을 읽고 있다. 일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 광경은 그러나 처음부터 관객을 잔뜩 긴장시키고, 시간이 가면서 점점 관객을 괴롭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실험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이기도 하지만 특히 감독 마틴 아놀드의 장기이기도 한 반복적 화면 때문이다. 아이가 부엌에 들어오는 장면이나, 그 아이가 자기 여동생에게 빨리 학교 가자고 말하는 장면 등이,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백 번 가까이 반복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문을 닫고 나갈 때 생기는 소음이 반복적으로 증폭되어 마치 따발총 소리처럼 들리고, 어떤 경우에는 작은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를 폭탄음처럼 재현하기도 한다. 50년대가 냉전 시대였다는 점, 그리고 핵전쟁에 대한 내재적 불안감이 미국인뿐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에게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며 이 영화를 한번 보시라. 등장인물들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미니 인터뷰> "실험 영화 명품전" 프로그래머 양민수씨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던 그는 “스토리 있는 영화” 만들기에 왠지 자신이 없었고, 또 그런 영화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까지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자꾸 추상적인 방향의 영화를 만들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남들로부터 평가는 커녕 “그런 건 결국 네 자위 행위적 영화가 아니냐” 라는 비난이나 듣게 되었다.

결국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로 유학을 가기에 이르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얻으며 작업을 계속할 용기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실험 영화가 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결국 상업 영화 발전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그는, “미국에서는 이미 실험 영화에서 했던 이미지 실험이 상업 영화의 영상 구성에 응용되었던 적이 많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유학 뒤에 돌아온 한국에는 여전히 “예술로서의 영화”를 이해하는 인식도 낮고 “실험 영화”를 위한 지원도 전무해서 이번 명품전 뒤에 또 언제 기회를 잡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고 씁쓸히 웃기도 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도무지 이 실험 영화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난감해하고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거니와, 나와 같이 난감해 하는 초보 실험 영화 관객들에게 프로그래머로서 조금이라도 감상을 위한 힌트를 줘야 한다는 생각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지요. 처음에는 그저 보는 거죠, 그러다가 더 관심이 많이 생기면 그 다음에 텍스트 분석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처음부터 이건 이런 뜻이고, 저건 저런 뜻이다 하고 설명하게 되면 순수 감상에 방해가 될 수도 있지요. 우리나라에는 아직 실험 영화라는 게 낯선 현실이니만큼 아직은 그저 되도록이면 많은 관객들에게 실험 영화를 보이기 위해 노력하려고 합니다. 상황이 무르익으면 그때부터 제 할 일이 더 많아질 수도 있겠지요.”

이해도 못하는데 와서 실험 영화를 봐야 하는 까닭에 대해 무례하게 묻는 내게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이른바 명품이라는 것들을 보면 현실적으로 살 수는 없어도 의식, 무의식적으로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실험 영화 명품전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도 새로운 예술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소유욕, 그 세계를 이해해 보고 싶다는 지적 소유욕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아 주십시오. 자꾸 보다 보면 그 잔영이 남아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다른 방식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와서 편하게 보시고, 느낀 만큼 가져가십시오.”

평생 예술가로서 신념을 가지고 실험 영화 제작과 보급에 애쓰겠다는 그는 현재 부산 동의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 강윤주 기자



2002-10-20 17:52ⓒ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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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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