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은 '붉은 악마'와 '촛불 시위'의 한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돋보인 때였다. 너무 거창한 문구를 엉뚱한 데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영화제들, 특히 작은 영화제들에서 자원 봉사하는 이들 역시 근본적으로 붉은 악마나 촛불 시위자들과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본다.

되돌아 보건대 이전 세대에서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하려 했던 이들, 먼저 쉽게 떠올리기에 양로원이나 고아원에서 자원 봉사를 했던 이들은 자기보다 못 가진 혹은 덜 가진 이들을 '돕는다'는 생각이 그 일 자체를 '즐긴다'는 것보다 앞섰을 듯하다. 또 그 이전 세대에서 '자발적'으로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도 '즐긴다'는 생각보다는 시대를 바꿔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더 컸을 듯하다.

▲ 서울 여성 영화제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 강윤주
그러나 붉은 악마, 촛불 시위자들 그리고 영화제 자원 봉사자들을 하나로 엮는 코드는 '즐긴다'는 점이다. 각각의 장에서 열리는 일들을 '축제'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이들은 '자발적'으로, '제 흥에 겨워' '신바람 나서' 하는 일의 에너지가, 이를테면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발생하는 '생산력 발전의 한계'를 극복하는 원천이 되기까지 한다는 주장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작은 영화제 중 하나인 <여성 영화제> 자원 봉사자 한 사람을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4월 11일에서 18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아트홀과 하이퍼텍 나다에서 열리는 제5회 여성 영화제에서는 이번 달 31일까지 영화제에서 자원 봉사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는데, 과연 여성 영화제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자원 봉사를 하고 싶다고 나서는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올해로 23살이 된 석영화씨는 작년 제4회 여성영화제 때 자원봉사자로 일한 뒤 올해는 당당히 스태프로 뽑힌 행운의 경우에 속한다. 인터넷 응용과를 나와서 IT 산업계로 곧장 뛰어들 수도 있었지만 그런 기회를 마다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고 있던 그녀는 우연히 한 영화 잡지에서 보게 된 여성영화제 자원봉사자 모집 광고를 보고 사무국을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정말 놀랐어요. 아무리 여성 영화제라고 해도 그럴 줄은 몰랐는데 일하시는 스태프분들이 모두 여성분들이시더라고요. 자원 봉사자들 중에는 그나마 백명 중에 열명 정도 남자 분들이 있었지만요. ”

▲ 석영화씨
ⓒ 강윤주
물론 함께 일하는 이들이 대부분 여자이기 때문에 오는 장점도 대단히 많다. 대학 졸업 때까지만 해도 여성 문제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던 그녀는 여자 스태프들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또 같은 자원 봉사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여자라는 것, 또 여자로서 한반도에 산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페미니즘 서적들에도 손이 가게 되었다. 또 남자친구와도, 하다 못해 TV 드라마를 보다가도 눈에 걸리는 이런저런 여자와 관련된 장면들을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는 남자 스태프 두 사람이 있거든요? 겨우 두명일 뿐인데도 분위기 차이가 확 나더라구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변화라는 이야기다. 음양의 조화는 정말 묘한 것인지라,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자원 봉사자들의 총지휘를 맡는 최지선씨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남자들이 ‘꽃밭’속에서 자기 이미지 관리를 잘 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정말 재미있어요. 그런 것들이 결국 팀 분위기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요”라며 웃음 지었다.

일이 고되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에 석영화씨는 “고되고 안 고되고를 떠나서 내가 이 일을 위해 쓸데없이 시간을 버리고 있구나, 라는 생각은 한번도 안 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자신이 낼 수 있는 딱 그 만큼이다. 자신이 시간 여유가 되면 하루종일 일할 수도 있고 바쁘면 서너 시간 정도만 일해도 된다. 그 대신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이 약속한 시간에 정확히 나와주어야 한다.

시간을 버리기는커녕, 석영화씨에게 여성영화제 자원봉사 일은 대단히 커다란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자신의 진로에 대한 구체적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막연히 영화쪽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던 그녀에게 영화제 동안 만난 여러 영화계 종사자들은 실제적 정보들을 주었고 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그 인연으로 만났던 이런저런 사람들의 도움에 힘입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볼 수 있었다.

(기자 개인의 생각으로는 이런 방식의 '제 길 찾기'가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 아닌가 싶다. 대학 졸업 뒤 무턱대고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점수 맞춰 간 대학 전공에 따라 적성과 상관없이 직장을 찾는 것보다는 조금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던 일에 대해 고민해 보고 그쪽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 뒤 맛보기 식으로라도 견습을 하다보면 자신이 하고 싶던 일의 실체에 상당히 가깝게 다가설 수 있으니 말이다.)

자원 봉사를 했던 사람으로서, 또 현재 스태프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여성영화제를 홍보하기 위한 한 마디를 해 달라는 요청에 그녀는 “솔직히, ‘소외된 사람들끼리 뭉쳐서 축제를 한다’는 느낌이 조금은 듭니다. 여성 영화제가 더 많이 대중화되었으면 좋겠어요. 여성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연인끼리 보러 오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남자들, 정말 여자를 모르는 사람 많거든요. 서로를 알게 되면 갈등도 훨씬 덜하지 않겠어요? 여자분들 또한 여성영화제에 오시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식의 이데올로기적 발상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뜨거운 자매애를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요?”라며 멋쩍다는 듯이 웃던 그녀는 끝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남자분들~ 여성 영화제 자원 봉사자로 활동하시면 정말 이쁨받습니다~ 환영합니다!”

덧붙이는 글 | 여성 영화제 자원 봉사자 모집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http://www.wffis.or.kr/ 에서 볼 수 있다.

2003-01-22 18:18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여성 영화제 자원 봉사자 모집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http://www.wffis.or.kr/ 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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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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