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인 영화제" 포스터
ⓒ 강윤주
영화제에 가기 전에 영화제 홍보 부서로부터 프로그램을 우송받았다. 봉투를 뜯어 무심코 열어본 그 프로그램을 본 필자는 아, 하고 잠시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 프로그램의 표지는 두 개의 언어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글과 영어로 씌어진 프로그램이 뭐 그리 놀랍냐고? 아니, 그 두 개의 언어는 한글과 영어가 아니라 한글과 점자였다. 점자를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은 아니었지만, 직접 손가락 끝에 그 점자를 느끼며, 이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점들의 집합이 '서울 아트 시네마 (구, 아트 선재 센터), 2002년 10월 10일부터 13일'이라는 말과 '소리를 보고, 그림을 듣고: 제3회 장애인 영화제'라는 말이란 것인가?, 하고 잠시 이 점집합 언어를 더듬던 필자는 거꾸로 이 언어로 살아야 하는 이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는, 그 의미는 모르지만 적어도 손가락으로 이 언어를 더듬어 느낄 수 있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 언어를 배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날 때부터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그 언어의 생김도, 체계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곳에서 한 세상 살아야 하며 더구나 그 언어를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 없는 입장이다.

▲ 두 사람의 청각 장애우들이 수화를 하고 있다. 수화하는 이들이 많은 탓이었는지, 영화제 장소는 다른 영화제들에 비해 한결 조용한 편이었다.
ⓒ 강윤주
기사치고는 너무 감상적인 시작인가? 하지만 필자는 이 서두로, 이 영화제 취재를 하면서 받았던 여러 가지 작은 충격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필자는 단순히 취재라는 목적으로 이 영화제를 찾았지만, 정작 취재로 인해 그 내부가 속속들이 보여진 것은 영화제가 아니라 필자 내부의 고정 관념과 무지함이었다.

'장애인 영화제'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국에서만 열리는 영화제이다. 자랑스럽다고? 한국 영화 산업의 발전에 힘입어 심지어 '장애인 영화제'까지 열리는 것은 우리나라의 선진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장애인 영화제' 홍보실장인 박윤수 씨의 말에 따르면, 선진국들의 경우, 장애우들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시설이 이미 기존의 영화관에 마련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장애인 영화제'가 따로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네들이 여는 '장애인 영화제'가 있다면, 그건 바로 독자들이 '장애인 영화제'라는 명칭을 들었을 때 대부분 떠올렸을 그런 개념의 영화제, 곧 '장애인들이 만든 영화를 보여주는 영화제'이다.

▲ 청각 장애인용 골도기기. 이 기기는 소리를 기계적 진동으로 변환하여 뼈의 진동을 통해 청각 신경을 자극하여 소리를 전달한다고 한다.
ⓒ 강윤주
이제 그 세번째를 맞고 있는 한국의 '장애인 영화제'는, 사전 제작 지원을 받은, 장애우가 배우나 스탭으로 참여한 한두 편의 단편 영화를 제외하고는, <오아시스> <챔피언> <공공의 적> 등 이미 극장에서 상영되었거나 상영되고 있는 영화들을 장애우에게 보여주는 영화제다.

필자는 프로그램을 받았을 때 표지에서 받은 감동과는 달리 상영 영화들 소개를 보고서는 실망치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극장에서도 볼 수 있는 영화들을 왜 영화제에서 보여주지? 이 생각은 정확히, 한국의 장애우들이 누릴 수 있는 문화 향유권의 현실에 대한 필자의 무식함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직접 제작해내는 데에 장애우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자신들이 만든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참다운 의미의 '장애인 영화제'를 개최하기까지 걸릴 시간은 정말 가늠하기 힘들다. 막말로,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영화 감상조차 힘든 현실에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구체적으로 그 일에 뛰어들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지금 열리는 '장애인 영화제'는 언젠가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해야 하고, 이상적 목표는 더 이상 '장애인 영화제'가 열리지 않는 것이 돼야 한다. 관객으로서건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건 장애우가 '특별 대우' 받지 않는 날, 그날이 와야 한다는 말이다.

▲ 자원봉사자를 통해 "오마이뉴스"를 수화로 배워보기로 하자. 차례대로 "오" "내(마이)" "뉴스"를 수화로 표현한 것이다.
ⓒ 강윤주
영화제에서 만난 한 청각 장애우에게 물었다. "영화 자주 보러 가세요?" 그랬더니 그는 "예, 외국 영화는 자주 보지요"한다. "왜 외국 영화만?"하고 물었던 필자, 또 한 번 필자의 무지함에 가슴을 쳐야만 했다.

그 장애우의 말을 들어보자. "외국 영화는 자막이 나오니까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지만, 한국 영화에는 자막이 없어서 그저 그림만 보면서 내용을 상상해야 해요. 남들은 대사 때문에 와르르 웃는데 그저 바보같이 앉아있으면 너무 답답하죠."

그 다음말이 기자의 가슴을 다시 한번 쳤다. "한국 영화가 발전했다고들 많이 말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발전했나 몹시 궁금했어요. 작년에 '장애인 영화제'에 와서 한국 영화들을 많이 보고 아, 한국 영화도 정말 재미있고 좋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서 좋았지요."

그는 명백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면서 살아온 셈이었다. 한국 영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도대체 무얼 보고 그렇게 얘기들을 하는지…. 이렇게 보자면,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를 박탈하면서 성장해온 한국 영화는 반쪽만의 성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외국 영화라도 원하면 가서 자주 볼 수 있는 그는 그래도 대단히 혜택 받은 존재다. "장애인 영화제"의 영화를 보고 싶은 장애우들은 영화제측에 전화를 걸어 관람 신청을 하면 되는데, 예산 부족으로, 또 이 영화제에 대한 언론 매체들의 관심 부족으로 홍보가 잘 되지 않은 탓에, 운좋게 이 영화제에 대해 들은 사람들, 혹은 장애우 단체에 속해 있어 단체장으로부터 정보를 얻은 사람들이 단체로 관람을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뒤늦게 "장애인 영화제" 소식을 알고 온 한 장애우가 표를 구하려고 했으나 대부분의 영화들은 이미 마감된 상황이라 안타까워 하고 있다.
ⓒ 강윤주
영화제측의 간절한 바람으로는 평소에 집 밖을 잘 나오지 못하는 재가 장애우들이나 병원에 누워 있는 장애우들 (그들에게 이 한 번의 영화제 나들이는 얼마나 큰 선물일 것인가!)을 영화제측에서 모셔와서 영화를 보여줄 수 있었으면 하지만, 그 일에는 정말 많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하고, 영화제 시작 불과 석달 전에 집행 위원회가 꾸려져 모든 일을 해내야 하는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꼭 보아야 할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고, 또 좌석수가 몇 개 안 되는 탓에 우리나라 전체 장애우의 극소수만이 관람 기회를 얻게 된다고 이 영화제의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제는 단지 장애우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기 위한 데에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애우들의 문화 향유권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 사회는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을 질문하고 요구하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제 관련한 구체적 정보를 알기 원하는 분들은 http://www.pdff.or.kr 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2002-10-12 09:24 ⓒ 2007 OhmyNews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