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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금 없어 1주일간 '집콕'... 난 미운오리새끼였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3부 소년의 꿈 (10)

등록 2020.11.04 09:59수정 2020.11.0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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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중동고교에 입학하다
 
그 무렵 서울 명문 고교에서는 동일 중학교 출신 지원자는 거의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시키고, 타교 출신은 한두 반 정도만 뽑았다. 불공정한 입시제도였다. 시골 학교나 서울 시내 다른 중학교 출신자들의 서울 명문 고교 진학 문은 무척 좁았다. 5. 16 쿠데타 후 각 학교마다 출제하고 입시 과목이 다른 고교 입시제도는 부정 입시의 소지가 많다고 철퇴가 내려지자, 이듬해부터는 연합고사제로 바뀌었다.
 
내가 지원했던 전기고에서 낙방한 용산고교에서는 불공정한 입시제도를 바꾸라는 학생들의 시위 기사를 신문 기사에서 본 적도 있었다.

다행히 후기로 지원한 중동 고교에서는 예체능 과목 없이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등 다섯 과목만 시험을 봤다. 중동고교에서도 동일계 중학교 진학자들을 무시험 전형으로 합격시켰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타교 전기 고교에 응시한 학생에게는 무시험 입학 자격을 박탈했다.
 
그  탓으로 다른 학교보다는 입학의 문이 조금 넓었다. 그런 탓으로 나는 용케 중동고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고교 입시에 합격했지만, 입학금을 날짜 안에 내지 못했다. 입학식 날 등교는커녕 방문을 닫고 지냈다. 그렇게 며칠을 방안에서 보내자, 낌새를 알아차린 주인집 아주머니가 고맙게도 입학금을 마련해주었다. 
 
입학식 1주일이 지난 뒤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 갔다. 아버지가 교감 선생님에게 통사정을 해 간신히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날로 학교 서무실에서 등록을 마친 뒤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쓴 담임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갔다.
 

중동고교 재학시절의 기자. 학교 교사를 배경으로 ⓒ 박도

   
한 학급에 보결생이 무려 20명
 
그때 학급 정원이 60명이었는데도 교실에는 80명이나 몰려있었다. 그러다 보니 교실에는 공간이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학교에서 반마다 20명씩은 가욋돈을 받고 보결생을 뽑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5.16 쿠데타 이후 부정 입학 비리가 드러나자 당시 방아무개 교장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내가 뒤늦게 입학했던 그날이다. 마침 그 시간은 담임인 이종우 선생님의 수학 시간이었다. 반장의 구령에 따른 인사가 끝나자 소란하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옆자리 빈 학생 손들어봐!"
"선생님, 여기예요."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바로 그가 양철웅(그는 후일 나의 장편소설 <용서>의 주인공 '장지수'의 실제 인물)이었다. 그 자리로 갔다.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그 시간부터 수업을 받으라고 했다.
 
그날 나는 수업 준비는커녕 구미중학교 교복에 중학생 교모를 쓰고 갔다. 짝 철웅은 연습장과 필기도구를 건네주고, 교과서도 보여주었다. 쉬는 시간에 언저리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미국 이민생활 중의 친구 양철웅(1990년대 모습. 그는 나의 장편소설 '용서'의 실제인물이다.)으로 소천 직전의 모습이라고 했다. ⓒ 이용호 목사

 
내 고향 구미를 모르던 학급 친구들
 
"얘, 너 어느 중학교를 나왔니?"
"구미중학교 나왔다 아이가."
"아이가? 그 말 참 재미있다. 구미중학교가 어디 있니?"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에 있다."
"경상도 아주 깊은 두메산골인가 보다."


학급 친구들은 내 고향 '구미'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경상도 깊은 두메산골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열심히 설명했다.
 
"아이다. 구미는 기차정거장도 있고, 경찰서도 있다. 보통 급행열차도 서는 제법 큰 고장이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서울이 아니면 모두 시골 촌놈으로 취급했다. 게다가 뒤늦게 입학하자 보결생 취급을 했다. 그날 하굣길에 짝이 가르쳐준 학창서점에서 교과서도 사고, 신신백화점 교복점에서 교복과 교표가 새겨진 책가방을 샀다. 하지만 돈이 모자라 교모는 사지 못했다.
 
이튿날 짝은 내가 새 교복에 낡은 모자를 쓰고 등교한 것을 보고는 다음 날 자기가 중학교 때 쓰던 걸 갖다주었다. 그때 내가 썼던 모자는 빛깔이 바래져서 완전히 누렇게 탈색되어 보기에도 몹시 흉했다.
 
주인아주머니 도움으로 어렵게 등록해 학교에 다녔지만 도시 학급에서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스케치북이니 백지도(실습용 지도노트)니 부기장이니 물감과 같은 수업 준비물에다가 학급비, 축구시합 관람비 등 자질구레하게 돈 드는 일이 무척 많았다.
 
특히 당시 중동고는 축구를 잘해서 매달 한두번 꼴로 서울운동장에 단체응원을 갔다. 그런데 나는 축구시합 단체관람비를 낼 수도, 수업 시간 교재물 준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어려운 내 사정을 모르는 교과 선생님들은 수업 준비 불량이라고 막대기로 손바닥을 때리기도 하고, 교무 수첩에다 이름을 적기도 했다.
 
학급 반장이나 회계는 이런저런 잡부금을 내지 못한 나를 짜증스럽게 따돌렸다. 짝 철웅은 그런 나를 곁에서 보다 못해 자기 스케치북을 찢어 낱장을 주기도 했다. 때로는 다른 반 중학교 때 친구에게 백지도나 부기장을 빌려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교과 선생님은 그런 나를 용케 찾아내고는 학습 준비 불량, 양심 불량으로 이중 처벌을 받았다.
  

나의 고교 때 친구 이용호(현, 미국 뉴저지 주 장로교회 목사). 그는 나를 상도동 자기 집으로 자주 데리고 가서 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 박도

 
학급의 미운 오리새끼
 
그해(1961년) 5월이 되자 2기분 등록금 고지서가 나왔다. 납기 마감일이 다가오자 등록금 독촉이 매우 심했다. 거의 날마다 종례 시간이면 담임 선생님에게 시달렸다.
 
학교에서는 학년마다 매달 한 학년에 한 학급씩 모범 반을 표창했다. 모범반 선정의 기준은 출결 사항, 등록금 납부상황 등인 모양이었다. 우리 학급은 새 학기 첫 달에 모범 반이 되자 그걸 계속 유지하려고 담임 선생님은 세리처럼 학생들을 몹시 닦달했다.
 
가난한 학생의 서울 학교생활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밥을 지어 먹고 다니는 일도 힘들었지만, 등록금 독촉, 각종 잡부금, 교재 준비에 드는 자잘한 돈 때문이었다. 그런 돈이 없자 나는 학급에서 도시 기를 펼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친정살이에 지친 어머니가 막냇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왔다. 밥하는 일은 면했지만, 식구가 늘자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웠다.
 
그때 아버지는 고정수입이 없이 민주당 당사나 국회의원 사무실에 들러 지인들에게 밥값이나 용돈을 얻어 가족의 생계비로 썼다. 그 돈은 들쭉날쭉, 그야말로 담뱃값 정도의 푼돈이어서 가계비가 될 수 없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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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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