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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온 첫날 당한 사기... 고교입시도 떨어진 '중딩'의 사연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3부 소년의 꿈 (9)

등록 2020.11.01 19:57수정 2020.11.0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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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지도자 외삼촌  

나의 외삼촌의 방명은 이태원(李泰源)이다. 그분은 젊은 날 민족주의자로 박상희 선생과 동지로 4·19민주혁명 이후 민선 어모면장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는 부역 혐의로 남의 집 다락방에서 숨어 죽음의 고비를 용케 넘긴 분이다. 

당시 외가에서 그런 얘기는 한밤중에 비밀스럽게, 어른들이 아이들 몰래 소곤거렸다. 나는 그런 얘기를 잠결에 들으면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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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지도자 이태원 전 어모면장 ⓒ 박도




외삼촌은 어린 시절 나의 필력을 보고 장차 문장가가 되라고 격려하면서 중학교 3년 동안 학비를 줄곧 대주었다. 그분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다. 인품뿐 아니라, 생활자세가 대단히 바르고, 매우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다. 그런 분이 당시 사회에서 '타도 대상이 된 세상'을 어린 나이의 나로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중학생이었던 나는 큰고모 댁에서 중1학년까지 다니다가 중2 때부터는 할머니와 함께 철길 너머 각산마을에서 남의 집 행랑채를 얻어 살았다.

그 무렵 각산마을은 장터마을과 달리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을 켜야 했다. 할머니는 거의 날마다 앞산이나 금오산 아홉산 골짜기에 가서 땔감을 해다가 밥을 하고 군불을 지폈다. 그러다 보니 하교하면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가서 할머니가 해놓은 나무를 집에 나르는 게 일과였다.

그때 나는 집안 형편상 고교마저도 대구나 김천 등, 도시 고등학교 진학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구미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할 셈이었다. 그 무렵 구미농업고등학교는 해마다 정원미달 사태였다. 그래서 도시에서 낙방한 수험생들은 죄다 받아들였고, 그래도 학생이 모자라 학기 중이라도 자격만 갖추면 아무 때나 입학할 수 있었다.

그 무렵 각급 학교의 학급당 정원은 대개 60명이었다. 하지만 구미농고는 한 학년이 겨우 20명 안팎으로 전교생을 모두 합해도 도시 학교의 한 학급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구미농고로 진학할 학생에게는 아예 수험준비가 필요 없었다.
  

4. 19. 당시 시위대가 경무대 어귀로 돌진하다(1960. 4.). ⓒ 자료사진




4.19 혁명 여파

구미중학교 2학년 때였던 1960년 2월 28일이었다. 그해 3월 15일은 제3대 정부통령 선거일이었다. 당국은 대구 수성천변 야당 정부통령후보자 선거유세장에 학생들을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고 일요일에도 등교를 시켰다.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당시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은 그날 하굣길에 "학생들을 정치도구로 이용치 말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했다. 그 얼마 후 마산에서 3·15선거 당일 부정선거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그 불똥은 마침내 구미에까지도 튀어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시위가 일어났다. 4.19민주혁명이 성공하자, 학교 선생님들 가운데 부적절한 혼인관계에 있었던 분은 학생들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4·19 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아버지는 그제야 기지개를 켜고 민주당 중앙당사와 장면 총리공관에도 드나들었다. 중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고향에 내려오신 아버지는 나에게 느닷없이 서울 소재 고등학교로 진학할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그 무렵 구미에서 서울 소재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나는 서울 고교 진학이 기쁘기보다는 입시 때문에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아버지가 준 용돈으로 먼저 전국 고교 입시문제집을 산 뒤, 그때부터 본격 고교 입시 준비를 했다. 밤마다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하고 이튿날 세수를 하면 코에서 시꺼먼 등잔불 그을림이 나왔다.
  

1950년 당시 서울역 ⓒ NARA / 박도




고교 진학코자 서울로 가다

아버지는 입학시험을 앞두고 전기 고등학교 두 곳, 후기 고등학교 두 곳 등, 넉 장의 원서를 우편으로 보냈다.

나는 그 원서 넉 장을 한꺼번에 다 써 가지고 졸업식 다음 날 서울행 완행열차에 올랐다. 할머니는 이불에 팥과 찹쌀 두 됫박까지 담아 괴나리봇짐처럼 꾸린 뒤 새끼로 멜빵까지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 이불 봇짐을 짊어지고 구미를 떠났다. 아버지는 편지로 서울역에서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가회동파출소까지 데려다 달라고 한 뒤, 입초 순경에게 주소를 보이면 집을 자세히 알려줄 거라고 했다.

서울역에서 택시기사에게 가회동파출소에 내려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그가 내려준 곳은 가회동파출소가 아니라, 대로변 옆인 재동파출소였다(당시 지명). 택시기사는 돈암동 미아리 방면 손님을 잔뜩 합승을 시켰다. 그런 뒤, 보자하니 나는 서울에 처음 오는 시골사람인지라, 좁은 길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가회동파출소로 가지 않고, 재동 네거리에서 내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거기 재동파출소를 가회동파출소라고 거짓말을 한 뒤 냅다 달아나버렸다.

시골에서 들은 대로 "서울에서는 눈을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고약한 인심을 첫날부터 단단히 맛보았다. 아버지는 가회동 산1번지 한옥 문간방에 혼자 살고 있었다.
  

이즈음 서울 북촌 가회동 ⓒ 박도




전기 고교입시에서 떨어지다

이튿날 새벽, 밥을 지으려고 수돗가에서 쌀을 씻는데 대청 문이 열리면서 주인아주머니가 뜰로 나오며 인사를 했다.

"어머, 학생이 밥도 다 할 줄 알아?"

그 말에 무척이나 수줍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같은 '시골뜨기'의 서울 정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지원 고교를 더듬거리며 네 곳 중 두 학교를 골라 전기고교 한 곳, 후기고교 한 곳에 입학원서를 접수시켰다

고교 입학원서를 접수시키면서 서울학교 학생들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까 모두가 다 똑똑해 보여서 몹시 주눅이 들었다. 마치 서울 학생들은 내가 시골학교에서 배우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공부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욱이 시골 중학교에선 예체능 시간에 공이나 차고 그림이나 그렸지, 이론이라고는 거의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교과를 시험 보는 서울 명문 고등학교 진학은 무척 힘들었다. 전기로 공립 용산고교에 응시하였으나 내 실력부족으로 낙방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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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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