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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도 없이 가마니에... 1952년 봄 교실 풍경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3부 소년의 꿈 (7)

등록 2020.10.27 15:02수정 2020.11.0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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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8. 23. 전선이 잠시 소강상태일 때를 이용하여 한국군 소속 연예인이 벌이는 위문공연(미 해병 1여단의 제 1사단 R.J. Laitinen 상병 촬영). ⓒ NARA / 이선옥

 
1953년 휴전이 되던 그해 겨울, 오줌이 마려워 한밤중에 일어났다. 셋째 고모 친구로 이웃에 살았던 김아무개 누이가 수건을 뒤집어쓴 채 아랫목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그 누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누이는 그 무렵 대구 동촌 미군비행장 앞 '양공주'가 됐는데 어머니가 보고 싶어 몰래 어둠이 짙을 무렵 집에 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만 아버지에게 들켜 집안 망신스럽다고 머리카락을 가위로 잘리고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매를 맞다가 한밤중에 몰래 우물가 담을 넘어 우리 집으로 도망쳐왔다고 했다.

셋째 고모는 그 누이가 새벽 열차 편에 다시 대구 동촌비행장 앞 양공주 촌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옷과 여비 등, 편의를 봐줬다. 그 일로 우리 집은 그 누이의 혜택을 많이 봤다.
  

허쉬 초콜릿 ⓒ 박도

 
이따금 나는 그 누이가 동생 편에 보내준 허쉬 초콜릿이나 릿츠 비스킷과 같은 과자, 그리고 포도나 오렌지와 같은 그 시절 매우 귀한 외제 과일들을 맛볼 수 있었다. 기울어져가던 그 집은 그 누이가 피엑스에서 빼돌린 미제 물건을 시장에 내다팔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그 누이는 미군과 국제 결혼을 했다. 이후 그 집 식구들은 그 누이 덕분에 남보다 일찍 해외로 나돌았다. 그 모두가 그 누이 때문이었다.

"자식 키우는 사람은 막말 못한다."

이런 일을 곁에서 지켜본 할머니는 그런 말을 자주 들먹거리시며, 늘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괄시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 시절 집안의 딸이 '양공주'가 돼, 후일 재벌가로 발돋움한 집안도 있었다고 한다.
  

1953. 6. 5. 서울. 초등학교. 모자란 교실 때문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야외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 박도

 
구미초등학교에 입학하다


나는 호적이 1년 늦어 취학통지서를 받지 못해 제때에 초등학교를 입학치 못했다. 어느 하루, 흰 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구미초등학교로 갔다. 또래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앞으로 나란히!' '바로!' 등의 질서 교육을 한창 받고 있었다.

검은 치마와 흰 저고리를 입은 담임 선생님은 수업을 하다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한 뒤 나를 인계받았다. 그 순간부터 나도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때는 1952년 봄으로 다른 아이들보다 한 달 남짓 입학이 늦었다.

그날 운동장 수업을 마치고 교실로 가보니 초가지붕으로 맨바닥에는 가마니가 깔려 있었다. 아이들은 책상도 없이 가마니 위에 앉은 채 수업을 받았다. 교실 바닥은 가마니를 깔아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뛰놀면 폴싹폴싹 먼지가 일어 목이 금세 괄괄했다.

겨울철이면 학동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꼴로 등교 때 난로용 나무를 가지고 갔다. 너나없이 가난한 시절이라 마른 나무가 귀해 대부분 생나무였다. 그걸 난로에 넣고 불을 지피자 선생님도, 학생들도, 난로를 쬐기보다 매운 연기로 눈물을 무척 흘렸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그제야 책걸상을 배정받아 마루로 된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때 우리 학동들은 배정받은 책상 가운데 선을 긋고 학용품이 선을 넘으면 가지거나 신체가 선을 넘으면 서로 때렸다.

그런 유치한 짓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휴전선'이란 선을 긋고 여태 남북 두 정부간에 일어나고 있다. 그런 웃기는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생각보다 일부 백성들은 대단한 애국자인 양, 정부에게 더 강하게 대응하라고 충동질하고 있다. 그러면서 태극기,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 기까지 흔들고 야단법석이다. 이들은 국적 불명의 괴물로 단군할아버지조차도 애써 외면하실 거다.

초등학교 시절, 수업이 끝난 뒤 청소시간에는 초로 교실 마루를 칠한 다음 병이나 사금파리 같은 걸로 번들번들할 때까지 밀었다. 그 무렵 학교에서는 미군들이 준 원조품으로 준 분유를 가마니솥에다 끓여 아이들에게 한 그릇씩 나눠줬다. 그걸 마시자 우유에 익지 않은 위장이라 배탈이 나서 설사를 했던 기억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1952. 8. 6. 포항, 한국 노인의 나들이 정장차림. ⓒ NARA / 박도

 
<명심보감>을 배우다

그 무렵 학교에서는 비로소 전쟁으로 불탄 교실을 한창 새로 지었다. 나라에서 시멘트나 목재는 보조해주었지만, 모래와 자갈은 자급자족케 했나 보다. 그래서 우리 학동들은 체조시간이나 방과 후에는 책보를 들고 학교에서 가까운 금오천으로 갔다. 거기 냇가에서 모래와 자갈을 책보에 담아 공사장에다 나르곤 했다. 

그 시절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가 거처하던 사랑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을 배웠다. 나는 '군자(君子)'가 뭔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 언행을 배웠다. 그때 배웠던 <명심보감>의 한 구절은 아직도 내 입안에 맴돈다.
 
"군자는 식무구포요 거무구안이라(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군자는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사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할아버지가 강독한 대로 앵무새처럼 따라 외웠다. 그때 할아버지 교육 영향 탓인지 평생 좁은 집에서만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평소 인자했지만 글을 가르칠 때만은 무척 엄했다. 내가 글을 읽을 때 게으름을 피우거나, 한눈을 팔면 당신의 목침에 올라서게 한 뒤 종아리를 회초리로 따끔하게 쳤다.

내가 글공부를 제대로 하면 그날 강독 뒤에는 미리 사둔 엿을 상으로 주곤 했다. 할아버지는 나날이 변해가는 세태에 손자에게 <명심보감> 강독이 부질없음을 알았나 보다.
 

1950. 10. 10. 함흥, 동굴에서 학살된 시신 300여 구를 꺼내고 있다. ⓒ NARA / 박도

   
조선 백성들 많이 죽었다

어느 날 아침, 마침내 할아버지는 나에게 한학 전수를 단념하고 당신이 손수 만든 흑판마저도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그런 뒤 날마다 폭음을 했다. 어느 하루, 할아버지는 술기운을 빌어 어린 손자에게 몇 말씀했다.

"니는 잘 모를 거다마는 이번 전쟁은 김일성이와 이승만 때문에 일어났다. 어쨌든동 둘이 손잡고 쪼개진 나라를 하나로 합칠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소련제, 미국제 무기 마구 끌어다가 애꿎은 조선 백성들 마이(많이) 죽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또래 아이들보다 한자를 많이 알았다. 또 할머니는 이야기꾼으로 어려서부터 우리나라 산하, 특히 내 고장 선산 구미에 유래된 애달픈 이야기들을 이불 속에서 많이 들려줬다. 그래서 아마도 뒷날 내가 국어교사로, 작가로, 기자로, 평생 그때 배우고 들은 걸 울겨 먹으며 살아가나 보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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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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