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의협심과 정의감이 강한 소년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 / 4회] 김재규는 매우 활달하고, 자라면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였다

등록 2020.04.27 16:44수정 2020.04.27 16:44
3
원고료로 응원
   
a

선산읍 이문동에 있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본가 (지난 가을에 찍은 사진이다) 선산읍 이문동에 있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본가 (지난 가을에 찍은 사진이다) ⓒ 박도

  김재규의 아버지는 그 시대 일반 지주들과는 많이 달랐다. 지주로서 자수성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육사업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나섰다.

그는 선산수리조합 이사를 역임하고, 감천강 제방을 쌓는 데 기여했다. 학원사업도 활발히 전개했는데 선산군의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모금하여 선산중ㆍ고등학교를 설립했고, 곧이어 선산여자 중ㆍ고등학교를 설립하는데 부지 12,000평을 희사했다. 이와 같은 각종 사회사업 활동을 인정받아 김형철은 한때 선산군 치안대장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군민들 사이에서는 선량하고 인심 좋은 모범 유지로 통했다. (주석 3)   김재규는 담대한 아버지와 근면한 어머니의 유전자를 타고나서인지 매우 활달하고, 자라면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였다.

동네의 유지이자 마을에서 손꼽히는 큰 집의 장남인 김재규는 유년시절을 아무 구김살없이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네소년들이 그를 많이 따랐고, 병정놀이에서는 대장노릇도 했다고 한다. 썩 뛰어나지는 못하나 남에게 빠지지는 않는 언변에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하고 거기에다가 가정환경에 힘입어 별로 크지 않은 몸집에도 골목대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선산읍 이문동 김재규 생가 안채 ⓒ 박도

 
그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친족들도 김재규의 유년시절에 대해 별다른 기억을 하지 못하는데,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세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한번 하고자 한 일은 꼭 해야 했다는 것. 한 친족의 회고,

"재규가 특히 말썽을 부리거나 속을 썩이지는 않았지만, 고집은 대단했어요. 한번은 재규의 모친이 사용하는 배틀의 작대기를 빼서 팽이채를 만들려고 한 모양이에요. 모친이 못하게 혼을 내니까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니 죽어버리겠다고 허리끈을 풀어 살짝 대문에 목을 맸대요. 키가 커서 목이 졸리지는 않았는데 그런 꼴로 서 있는 것을 본 할머니가 대경실색, 기절했다고 하더군요." (주석 4)

김재규는 8세 때인 1933년 4월 1일 선주보통학교(현 선산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붓글씨를 잘 써서 상을 타고 달리기도 잘했으나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가 아직 철부지이던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한반도는 일본군의 군수물자 조달처가 되어 극심한 통제와 수탈이 자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김재규는 구김살없이 성장한다.

어린 재규는 어머니의 영향 탓인지 가정 생활에서 여성적인 면을 많이 보였다. 집 밖에서는 사내다웠지만 집 안에서는 여자아이처럼 섬세하고 질서정연했다. 재규의 이런 이중적 성격은 그의 전 생애를 지배했는데,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는 불칼과 같았으면서, 평소 생활에서는 다정다감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남에게 잔정을 많이 베풀었다.

어린 재규는 집안에서 책상, 의자, 이불, 방석 등을 정돈하는 일을 즐겨했고, 집안의 물건들이 제 위치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지 않을 때는 화를 내곤했다. 자신의 몸가짐도 언제나 단정했다. (주석 5)

 

건설부장관 시절(1974~1976년)의 김재규. ⓒ 국가기록원

 
김재규는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한 소년으로 성장한다. 초등학교 시절의 비화 한 토막이 전한다. 뒷날 10ㆍ26 관련 재판 중 변호인들이 제출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의 성장과정과 성격의 일면을 보여준다.


초등학교 4학년(당시 12세) 때의 일, 어느 날 책보를 메고 집에 돌아가던 중 시장 장막나무전에서 일본인 순사가 나뭇꾼을 발길질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사연을 알아보니 15전 하는 나뭇짐을 5전에 팔라고 순사가 강요, 위세에 눌린 나뭇꾼이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또 자기집까지 운반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못하겠다고 하니 순사가 화를 내고 발길질을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순사들의 위세를 생각하면 있을 수 있는 풍경일 수도 있었지만, 이것을 보고 있던 김재규는 어린 가슴에도 의분을 참지 못해 순사에게 삿대질을 하며 "이 순사는 도둑놈이다"라고 대들었다고 한다. 순사는 나뭇꾼은 제쳐두고 어린 김재규를 잡아다 주재소 유치장에 넣었는데, 부친의 수습으로 풀려나왔다고 한다. 이때 그의 부친은 "네가 한 일은 옳다. 그러나 남자는 참아야 할 때는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라고 타일렀다 한다. (주석 6)


주석
3> 앞의 책, 15~16쪽.
4> 김대곤, 앞의 책, 112~113쪽.
5> 오성현, 앞의 책, 19쪽.
6> 김대곤, 앞의 책, 113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재규 #김재규장군평전 #김재규유년기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검찰의 돌변... 특수활동비가 아킬레스건인 이유
  3. 3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4. 4 MBC가 위험합니다... 이 글을 널리 알려 주세요
  5. 5 채상병·김건희 침묵 윤석열... 국힘 "야당이 다시 얘기 안 해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