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임종', 왜 이리 후회가 될까

[엄을순의 아줌마 이야기 ⑬] 청개구리 자식은 오늘도 웁니다

등록 2012.05.16 09:45수정 2012.05.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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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사람은 있는 것 같은데 문도 안 열어주고 전화도 안 받으시는 모양인데요. 배달 간 아저씨가 화가 잔뜩 나서 연락을 했던데 빨리 확인 좀 해보세요."

어버이날 꽃 배달을 부탁했는데 집 앞까지 도착한 꽃을 안 받겠다고 엄마가 문도 안 열어주시고 우기고 있는지 화가 잔뜩 난 꽃집 사장님이 전화를 했다.

"시들면 금방 버려야 되는데 아깝잖아. 네가 꽃 보냈다고 받으라고 해서 내가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 내가 안 받으면 너 돈 안 내도 되잖냐. 물건도 안 받았는데 돈을 내라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너 돈 내지마."

정말 미치겠다. 결국 돈은 돈대로 다 내고 오히려 꽃집 사장님한테 혼만 잔뜩 났다. 우리 엄마는 이런 분이다. 보통의 이성으로 생각하면 참 알기 힘든 분이다.

평생 자식 위해 사신 엄마, "꽃 시들면 아까운데... 돈 쓰지 마라"

영화 <친정엄마>에서 엄마(김해숙 분)와 지숙(박진희 분) ⓒ 싸이더스 FNH


중학교 몇 학년이었던가. 엄마랑 같이 버스를 탔다. 그때 누군가 일어나며 엄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엄마는 그 자리에 앉지 않고 대신 나를 그곳에 눌러 앉히면서 "우리 딸이 몸이 좀 불편해서요"라고 말했다.

몸이 멀쩡한 난, 엄마가 위에서 찍어 누르는 바람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홍당무가 된 채 고개를 숙이고 눈도 아예 감고 있었는데 옆 자리 어떤 청년이 엄마를 위해 또 자리를 양보한 덕에 둘이 나란히 앉아 집에 온 적도 있다. 그때 그 당황스러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자식을 위한 것이라면 체면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교양도 없는 분. 몸은 약한 분이 그럴 때마다 어디서 힘이 나오시는지 무지 용감하다. 그렇게 당신 몸은 챙기지 않고 자식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시더니 말년에는 몸이 안 좋아 자식들 애를 무던히도 먹이셨던 엄마.

엄마, 아버지 부부 사이는 그저 그랬다. 그 시절 남자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아버지는 그다지 자상하지도 그다지 가정적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남들처럼 오래라도 사시면 좋았을 것을 쉰 조금 넘어 암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엄마는 마흔여섯 나이에 혼자가 되셨다.

지금 생각하면 여자나이 46살, 참 한창 때인데. 그 후로 30여 년을 혼자 외롭게 사신 걸 생각하면 가슴이 짜안해진다. 그나마 딸 하나 있는 것이 미국에 있어 자주 보지도 못하고 아들들은 결혼해서 자기 식구들 챙기느라 엄마 외로움에 별반 도움도 못 되고. 그러다가 내가 영구 귀국하게 되었다. 

보는 이들마다 한마디씩 했다. "딸이 옆에 있으니 기가 사셨네"하며 엄마가 매우 밝아지셨다고. 하지만 내가 귀국한 지 10년도 못 채운 어느 날 엄마는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고, 합병증 끝에 마지막에는 폐렴으로 내 곁을 떠나셨다. 입원하신 지 7개월 만이었다.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 그리며 들은 노래 '유정천리'

간병인을 두고, 난 이틀에 한 번쯤 병원에 들락거렸는데 어느 날 엄마 침대 맡에 40대 초쯤 된 어느 낯익은 남자 사진이 붙어있었다.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백구두에다 손은 허리에 얹은 채 잔뜩 멋을 부린 남자.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젊은 시절의 아버지 사진이다. 아들보다도 어린, 사진 속 아버지가 맘에 드셨던지 하도 만지고 품고 다녀서 애들이 갖고 노는 딱지만큼이나 너덜너덜해졌다.

팔뚝에는 링거를 꽂으신 채 눈을 가늘게 뜨시고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던 엄마. 갑자기 "얘, '유정천리'라는 노래 요즘도 들을 수 있냐?"하신다. 아버지가 생전에 무척이나 좋아하시던 노래라면서. 다음날, 잘 아는 엘피판 뮤직바에 들러 사장님께 부탁을 해 녹음해서 갖다드렸다. 그 후로 중환자실로 가시기 전까지 몇 달 동안이나 그 노래를, 다 헐어 발갛게 짓무른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들으셨다.

팔뚝에 아무리 바늘을 수없이 꽂아대도, 한주먹 약을 입에 털어 넣으셔도 귀에는 '유정천리'다. 가끔은 마치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꿈이라도 꾸시는 듯 눈동자가 몽롱하니 풀어진 채 입가엔 잔잔한 미소까지 지으신다. 한창 때의 아버지 사진을 품고 생전에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유정천리'를 들으며 엄마의 생명은 그렇게 천천히 꺼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폐에 물이 차고 가래가 심하게 끓어 정신을 잃은 뒤 엄마는 중환자실로 가셨다. 중환자실 밖에서 대기한 지 보름쯤 되었던가. 모든 상태, 모든 장기가 쇠약해져 이제는 이삼일도 버티시기 힘들 것 같다며 일반 병실로 옮겨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

이미 예상도 했고 마음의 준비도 한 상태였지만 막상 '마음의 준비'라는 그 말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아 엉엉 울면서 엄마를 일반 병실로 옮기고 다른 식구들에게도 얘기를 했다. 다들 달려왔다. 사실 하나도 놀랄 일 없는 닥칠 것이 왔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데 한 명. 캐나다로 이민 간 동생이 큰일이다. 그곳서 지금 표 끊고 와도 일 당하면 엄마를 못 볼 것 같은데.

"알았어, 곧 갈게"하던 동생. 일주일이 넘도록 오지를 않고 이삼일이라던 엄마는 계속 버티고 있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아침 회진 때마다 의료진이 "참 신기하네요, 이 상태에서 어머님이 어떻게 계속 버티고 계신지, 아마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에요"라고 하신 지 열흘 가까이 되었다. 금방 온다던 동생은 소식이 없고 오빠, 언니, 올케, 모두 예전에 마음의 준비가 끝났는지, 아님 하던 일을 그리 비워둘 수 없어서인지 이제는 위급하다고 해도 믿지도 않고 늦장이다.

"엄마, 버티느라 애썼어... 우리가 나중에 따라 갈게"

영화 <친정엄마>의 한 장면 ⓒ 싸이더스 FNH


난, 얼굴에 온통 호수며 마스크로 중무장하신 엄마의 얼굴을 살며시 감싼 채 들여다 보았다. 벌써 발가락과 척추 옆에는 괴사가 생겨 진물이 나기 시작했다. 발갛게 짓무른 엄마 귀에 입을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엄마, 이제껏 버티느라 힘들었어. 애썼어. 이제 그만 가도 돼. 동생이 엄청 바쁜가 봐. 엄마 가면 금방 올 거니까 맘 편히 먹고 가. 우리가 나중에 엄마 따라 갈게."

그러면서 엄마 얼굴을 한없이 만지고 쓰다듬고 입 맞추고… 그때 정말 원 없이 스킨십 한 번 제대로 해봤다. 그런지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혈압이 떨어져서 비상벨이 계속 울리더니 다시 회복하지 못하시고 그렇게 내 말 대로… 평온한 얼굴로 가셨다.

다행히 장례 첫날 동생이 도착했고, 이미 보름 가까이 마음의 준비가 끝난 식구들은 순서대로 장례 준비를 했다. 그런데 큰일이다. 화장을 할 것인지 아버지가 계신 선산에 모실 것인지 미처 엄마한테 물어보질 못했다. 그러다 예전에 엄마가 내게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나 죽거든 화장해서 깨끗하게 태워버려라. 무덤이 있어봐야 너네들이 제대로 오지도 못 할 것이고 부담도 주기 싫다."

"오빠, 엄마가 나한테 그러셨어. 화장하라고."
"아니 그래도 아버지 옆을 좋아하시지 않을까? 선산도 있는데."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내가 엄마랑 가장 가까우니 내 의견을 존중하기로 하고 화장터로 향했다. 관을 화덕 같은 곳에 밀어 넣기 전, 모든 유족들이 보는 앞에서 불의 스위치를 당기게 되어 있는 순간. 난 갑자기 발작을 했다. 청개구리 엄마가 자기 자식에게 "나 죽거든 물가에 묻으라" 한 말처럼 내가 말 안 들으니까 속상해서 화장해버리라고 던진 말은 아니었을까.

"잠깐. 엄마 거기서 꺼내세요. 아니에요. 내가 실수했어요. 아니 나 맘 바꿨어요. 아니 엄마가 뜨거운 거 싫대요. 야, 뭐해. 빨리 꺼내라니깐."

유리창을 두드리며 난 발악을 했고, 오빠는 내 어깨를 잡고 말렸고, 유리 너머 사람들은 내가 보이지도 않는지 전혀 요동하지 않고. 그렇게 난, 엄마를 화장시켰다. 그렇게 난, 근근이 생명줄을 잡고 있는 엄마를 가시라고 했다. 해마다, 이맘때면 내가 보낸 엄마가 무척이나 그리워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끓어오른다.

평소에 엄마 말을 잘 안 듣고 빤질거리던 내 별명은 청개구리. 혹시 화장하라하면 선산에 모실 것 같아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닐까.

"엄마, 그때 뜨거웠지? 나도 죽으면 화장하라 했어. 엄마만 뜨겁게 할 수는 없잖아."

평생을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시고 남편 말, 자식 말이라면 무조건 토를 달지 않으시던 엄마. 내가 성인이 된 다음에는 내 말만을 철석같이 믿으시던 엄마. 난 그런 엄마를 그렇게… 내 맘대로… 보냈다. 오월만 되면 수백 번도 더 되뇌는 말.

"엄마! 미안해."

덧붙이는 글 | '나의 어머니' 응모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나의 어머니' 응모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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