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째 '각방생활'..."여보 계속 따로 잘거야?"

[엄을순의 아줌마 이야기 ⑪] 혼자 자니 편하고 좋은데, 한없이 쓸쓸하네

등록 2012.03.13 21:33수정 2012.03.1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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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애정만만세> 오정희(배정옥 분) 강형도(천호진 분) 부부의 모습. ⓒ MBC


드디어 안방에서 쫓겨났다. 엄밀히 말하자면야 자진해서 베개를 들고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잘 때 코 좀 곤다고 (같이 잔 경험이 있는 애들 말에 의하면 '보통 수준'이라고 하던데 괜히 예민한 척 하는 남편이 밉다.) 그리 유세를 떨며 내 목을 젖히고 밀고 당기고 하는 그의 구박을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얼마 전 이사 온 양평 집엔 남는 방이 하나 있다. 안방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에다 포근하고 아담한 나만의 잠자리를 마련했다. 홈쇼핑에서 구입한 8센티미터 두께의 라텍스매트 위에 깨끗이 빨아 햇볕에 바짝 말린 뽀송뽀송한 면 패드를 깐 다음, 역시 홈쇼핑에서 산 거위 털 이불을 덮어 놓고 예쁜 스탠드와 읽던 책과 돋보기까지 준비해 놓았다. 잘 때 너무 깜깜하지 않도록 연꽃모양의 취침용 전등도 소켓에 꽂아 놓으니 '으아~ 이뻐~'  환상적인 나만의 방이 완성됐다. 40일 전, 이렇게 우리 부부는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남편의 코골이 구박 피해 나온 안방... '세상에, 속이 다 시원하네'

따끈따끈한 방바닥도 좋고 몸을 대자로 뻗고 잘 수도, 새우 꺾기를 하며 잘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구박받지 않고 당당하게 한밤중까지 책을 읽다가 맘껏 코를 골거나 이빨을 박박 갈며 잘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은 좁은 침대에 붙어서 구박받으며 자진 않으련다. 세상에… 속이 다 시원하고 편하네. 진작 따로 잘 것을 그랬어.'

어릴 적 내 방이 처음으로 생겼을 때의 기쁨을 다시 찾기나 한 것 같이 잠자리에 들 때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보란 듯이 내 방문을 꼭 닫고 들어가 잤다. 3일쯤 지났을까. 남편이 묻는다.


"같이 안 자? 코 골아도 봐줄게 들어와."
"내가 미쳤냐? 내 이불 속으로 한번 들어가 봐. 얼마나 포근하고 뽀송뽀송한지. 부러울 거다. 너, 부러우면 지는 거다. 나 이제부터 혼자 잘래."

또 3일이 지났다. 아늑하고 포근하긴 하지만 뭔가 약간 허전~하다.

"야, 너 정말 따로 잘 거야? 코고는 거 구박 안 할게."
"싫어, 늦었어. 혼자 자는 편리함을 이미 알고야 말았다네여~."

또 3일인가가 지났다. 이상하다. 이제는 허전하다 못해 잠을 잔다는 것이 허무하기까지 하다.

"여보, 이제 그만 같이 자지 그러냐?"
"왜? 자면서 구박할 사람이 없어서 심심허냐? 그렇게 후회가 되면 A4 용지 2장에다 '같이 자야할 이유'를 써와. 그러면 이번만 내가 특별히 용서해주지."
"말로 할게. 나 글 쓰는 거 싫어하잖아."
"안 돼. 원하면 그러라는 거야. 싫음 하지 마."

말은 이렇게 했지만 혼자 자는 날이 하루하루 늘어감에 따라 내 몸은, 호떡같이 생긴 속이 텅 빈 공갈빵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 거, 참 이상도 하다. 오십 중반을 넘은 나이. 부부관계 때문은 아닐 것 같고. 그냥 단순한 스킨십, 그것도 발로 차고 밀고 당기고 하는 부정적인 스킨십 때문인가.

좁은 침대 좁은 이불 속. 발을 남편 배 위에 얹어놓을 때마다 이불 밖으로 내팽개침을 당하기도 하고, 옆으로 돌아 눕다가 남편 팔을 깔아뭉개 혼나기도 하고 손으로 얼굴을 냅다 쳤다고 벌떡 일어나 소리 지르기도 하고. 이런 것도 내겐 소중한 스킨십이었구나. 잠을 자는 무의식 중에도 누군가 내 옆에 있다는 것, 나는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 이런 것들이 내게는 필요한가 보다.

혼자 잘수록 허전해지는 마음... '소소한 스킨십'의 소중함

드라마 <애정만만세> 오정심(윤현숙 분) 남대문(안상태 분) 부부의 모습 ⓒ MBC


아침에 일어나 핸드드립으로 내려주던 맛있는 커피도 해주기 싫어서 일회용 다방 커피로 대체했다. 늘 새로운 음식 만들기 도전을 즐기는 나였지만 다 하기 싫다. 매일 매일 김치찌개다. 한번 만들어 3일씩 데워 먹는다.

오십이 넘어 육십이 가까워오는 남편. 나이 들수록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각방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도 같이 집에 있는 날에는 하루 종일 내 옆에 붙어 다니며 계속 묻는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허접한 질문들이다. 대답도 하기 싫어 몇 번은 못 들은 척하고 몇 번은 응, 혹은 아냐 해버린다.

깊숙이 들어앉은 양평 집에서 둘만 사니, 남편이 싫어도 밖에 나가기가 쉽지 않다. 얼굴 마주보기 싫어 양평 읍내로 목욕을 갔다. 마사지라도 하면 나을까 해서다. 살도 별로 없는 마른 체격의 아줌마가 열심히 내 몸을 만지고 비비고 쓰다듬어 준다. 체력이 달리는지 힘도 들이지 않고 그냥 살살 만지기만 하는데도 기분은 금방 좋아진다. 아, 이제야 내가 누군가의 케어를(사랑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받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고마워서 팁을 듬뿍 주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 없는 동안 혹시 빽빽하게 사연이 적힌 A4 용지를 준비했나 싶어서 슬며시 눈치를 살폈다. 없…다. 미운 이 인간. 밥 때가 되었는지 나만 바라보고 있다. 밥을 차리며 곰곰이 생각해봤다. 각방을 쓰기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새삼스레 남편이 남 같다. 서먹하고 이상하고 낯설고. 감정을 받아들이는 기관이 남보다 예민한 나는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하고 크게 슬퍼한다. 아직은 남편에 대한 미운 감정이라도 남아있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각방 쓰는 것이 더 깔끔하고 더 편하게 느껴지리라. 남편 또한 굳이 자존심 버리고 같이 자자고 더 이상 묻지도 않을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무덤덤한 사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이가 될 거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날 법정에 같이 설 수도 있겠다 싶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그간 남의 문제만 상담해주던 내가 우리부부 문제를 스스로 상담해보기로 했다. 너무 흔한 케이스이다. 그래서 많이 조언해주고 조언 후 감사 전화도 많이 받은 케이스다.

'곪기 전에 먼저 대화로 푸세요. 부부사이엔 자존심 내세우지 마세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고 이해해 보세요.'

해답이 나와 있고 남들에겐 그렇게 잘도 권했건만 난 왜 못하는 걸까? '나도 자존심이 있거든요. 남편에게 내가 공을 던졌잖아요. 종이에 몇 자 적으면 되는데 안 하는 그가 잘못이지.' 그건 금성과 화성의 서로 다른 대화법 때문이리라. 비록 A4 용지에 글로 채우지는 못했지만, 내게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면서 관심을 끄는 것, 자꾸 배고프다고 하는 것, 아프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미안하고 후회한다'는 표현도 되고 자기도 사랑 받고 싶고 외롭다는 의미이기도 할 터인데.

요즘 각방 쓰는 부부들이 굉장히 많다던데, 내가 직접 각방을 써보니 날이 갈수록 빠르게 싸늘히 식어가는 상대에 대한 감정을 피할 수가 없더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엔 '창대한 일'로 커질 수도 있겠다 싶다. 부부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차이야 있겠지만 각방만은 아니더라. 적어도 내겐. 우리 부부가 같이 산 세월도 꽤 많이 흘렀다. 차가운 내 발을 따뜻한 배 위에 올려놓고 녹여주던 그 사람이, 자다가 얹어진 자기 배 위에 내발을 내동댕이 쳐버리는 사람으로 변하긴 했어도 잠은 '같은 이불 속'이 맞을 것 같다. 굳이, 새삼, 이 나이에, 새 사람을 찾을 요량이 아니라면 말이다.

부부문제는 스킨십을 통해 풀어야한다던 우스갯소리. 다 뼈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큰일이다. 그가 답이 없다. 사실 A4 용지 2장은 좀 길긴 하다. 문자로 보내라고 할 걸 그랬나. 이제 와서 뭐라 하며 무슨 이유를 들이대고 말을 바꾸나. 귀찮고 쪽도 팔리는데 에이~ 그냥 계속 이렇게 쿨하게 살까. 코 좀 곤다고 구박하며 안방에서 날 내쫓은 남편아. '이제는 네가 네 죄를 알겠느냐?' 오늘이 화이트 데이라고 하는데 일단은 '특별사면'이라도 해주어야겠다. 싫음 말고.
#부부관계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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