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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이어라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55] 삶과 사랑과 시대를 담는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

10.11.12 09:20최종업데이트11.05.2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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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길'만으로 삶과 사랑과 시대를 담아 낼 수 있을까요? 전부는 아니지만, 가능합니다. 25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남과 여의 가슴시린 사랑을 씨줄로 엄혹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날줄로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영화가 극장가를 찾았습니다. 때론 교차하고 때론 얽히는 눈길을 따라 그 눈동자가 품은 비밀을 조근 조근 풀어 놓는 영화는 좀체 만나기 쉽지 않은 남미 영화입니다.

소피아 로렌이 출연했던 걸작 <해바라기>의 마지막 장면인 기차역에서의 이별을 연상시키는 영화의 오프닝 역시 '눈길'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앙역에서 남과 여가 서로를 향해 파고드는 눈길은 멀어지는 기차만큼 오래도록 텅 빈 플랫폼을 맴돌며 서로를 붙잡아 둡니다. 25년 전의 그 눈동자와 눈길이 실루엣처럼 되살아나며 삶과 시대를 노래하는 영화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입니다.

25년의 세월을 견뎌내며 서로에게 향하는 눈길

백색테러를 피해 기차를 타고 피신하는 벤야민과 그를 떠나보내는 이레네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손바닥을 편 채 서로의 눈길을 파고든다. ⓒ (주)포커스픽쳐


영화는 퇴직한 법원 검사보 벤야민 에스포지토(리카도 다린)가 자신의 삶을 소설로 정리하기위해 과거로 눈길을 돌리면서 시작됩니다. 벤야민이 지난 세월을 복기하던 중 1975년 한 살인사건에 직면합니다. 23세의 아름다운 여교사가 발가벗겨진 채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은 좀체 지워지지 않는 편린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현재와 25년 전을 오가는 교차편집 속에 매혹적인 로맨스와 스릴러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소재를 물레를 켜듯 직조해 나갑니다. 여기에 작품성은 물론 배우들의 인상적인 연기까지 한 올씩 엮어가며 배합하는 감독의 솜씨가 여간 아닙니다. 아르헨티나 영화의 재발견입니다.

당시 살인사건에 대한 재조명을 위해 벤야민은 자신이 일했던 법원을 찾습니다. 그리고 상사이자 눈길로만 속내를 토해 냈던 여검사 이레네 헤이스팅스(솔레다드 빌라밀)를 만납니다. 25년 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운 이레네. 벤야민은 예나 지금이나 그녀를 눈길로만 가슴에 품습니다. 고졸에 나이도 많은 가난한 서민 출신의 그와 코넬 법대를 나온 명문가 출신의 그녀는 높은 벽만큼이나 서로의 간극을 채워내지 못하고 겉돌기만 했습니다.

다만, 그의 눈길만이 벽을 넘어서 그녀 곁으로 다가섭니다. 따라서 영화는 여느 영화보다 자주 눈길을 클로즈업합니다. 이레네를 다시 찾은 벤야민의 눈길이나 그의 눈길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눈길은 여전히 깊고, 맑고, 애틋합니다. 25년의 세월을 견뎌내며 그와 그녀가 서로를 향한 가슴을 거두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 눈길 때문인지 모릅니다.  

벤야민과 이레네의 눈길은 첫 키스를 하기 위해 다가 선 남과 여가 두근거리는 가슴만큼 머뭇거리면서 서로를 갈망하는 그런 눈길입니다. 그렇다고 둘 사이에 클래식한 눈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검은 두건으로 두 눈을 가린 법의 여신 '디케'처럼 진실과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눈길도 있습니다. 그 눈길이 가 닿는 곳이 바로 여교사 릴리아나 강간살인사건입니다.

1970년대 남미의 시대상을 투영하는 욕망의 눈길

릴리아나를 강간한 뒤 살해한 고메즈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권총을 꺼내들며 자신을 체포해 종신형을 선고받게 했던 벤야민과 이레네를 위협하고 있다. ⓒ (주)포커스픽쳐


이레네를 찾은 벤야민은 그녀와 함께 릴리아나 사건을 되짚습니다. 애초에 이 사건은 벤야민이 떠맡듯 시작한 사건입니다. 사건을 떠넘긴 다른 검사보가 애꿎은 콜롬비아 노동자들을 범인으로 지목해 체포하지만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임이 밝혀지면서 원점으로 되돌아옵니다.

릴리아나의 집을 찾은 벤야민은 남편 모랄레스가 건네준 그녀의 사진첩에서 욕망에 번들거리는 눈길 하나를 찾아냅니다. 어린 시절부터 릴리아나와 한동네에 살면서 그녀를 향해 욕망을 품어 온 고메즈를 찾아낸 것입니다.

영화는 고메즈를 통해 1970년대 남미의 시대상과 정치적 함의를 길어 올립니다. 1970년대 남미는 미국 CIA와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로 칠레의 아옌데 민주정부가 전복되면서 남미 전역에 이른바 '빨갱이 사냥'의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하던 시절입니다.

이 시기 아르헨티나는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 이사벨 페론이 집권하던 때입니다. 뮤지컬 에비타로 더 유명한 에바 페론의 뒤를 이어 후안 페론의 세 번째 아내가 된 이사벨이 남편이 죽자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극우세력의 준동으로 정국은 무정부상태로 치닫고 페론이 계엄령까지 선포하지만 역부족, 1976년 3월 군부쿠데타로 축출당하고야 맙니다.

영화에서 고메즈의 '욕망의 눈길'은 반동과 살육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군부독재시절에 대한 환기이자 기록입니다. 벤야민과 이레네가 고메즈를 체포해 종신형을 받게 하지만 아르헨티나 군부는 고메즈가 반정부 게릴라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소탕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는 이유로 풀어줍니다.

그리고 비극이 들이닥칩니다. 고메즈의 지시를 받은 극우테러 조직이 벤야민의 집을 습격하고 대신 친구 산도발이 살해당합니다. 이윽고 벤야민은 테러를 피해 이레네가 소개한 곳으로 피신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는데, 바로 이게 영화의 오프닝 장면입니다.

25년 전의 사랑을 간직하는 인고의 눈길

아내를 살해한 고메즈를 잡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앙역 대합실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모랄레스는 영화의 대반전을 이끌어 낸다. ⓒ (주)포커스픽쳐


고메즈의 대척점에 모랄레스가 있고 그 곁에 닮은꼴의 벤야민이 있습니다. 모랄레스의 눈길은 릴리아나를 향한 일편단심이며, 온 몸으로 인고의 세월을 감내하는 간고한 사랑입니다.

영화는 고메즈를 잡기 위해 중앙역 대합실을 1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찾는 모랄레스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종결된 릴리아나 사건을 재개하는 벤야민을 통해 모랄레스의 지극한 사랑을 극대화시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 벤야민이 그를 찾아 나섭니다.

소설의 마무리를 위해 한적한 시골의 모랄레스 집을 방문한 벤야민. 2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거실에는 아내 릴리아나의 사진과 결혼사진만 있습니다. 릴리아나와의 만남과 데이트 그리고 꿈만 같던 신혼의 시간들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모랄레스는 그때 그 시간에서 단 한 시간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내의 죽음과 함께 그의 사랑도 그 시간에 멈춰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랄레스를 통해 벤야민은 새로운 사실을 듣게 되고 친구 산도발의 살해 등 풀리지 않았던 극적인 순간을 재구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랄레스의 충격적인 고백.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목전에 두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한 남자의 절절한 사랑의 송가를 스크린 가득 채우며, '비밀의 눈동자'를 일순간에 벗겨버립니다.

두려움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사랑이어라

영화에서 '사람의 눈길'을 가장 절묘하게 포착해 낸 장면은 두 곳입니다. 오프닝에서 곧 쏟아질듯이 흔들리는 눈망울을 부릅뜨고 벤야민의 눈길을 따라 기차를 쫓아가며 손바닥을 펴는 이레네와 그 손위에 손바닥을 포개는 그의 손이 창문에 막히는 장면입니다. 두 사람을 가로막는 창문처럼 둘은 이별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또 다른 장면은 모랄레스를 만나고 난 뒤 걷잡을 수 없는 가슴을 부여잡고 찾아간 이레네의 사무실입니다. 그것은 벤야민이 소설 속에 써 놓았던 한 구절, "널 사랑해.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가슴과 사랑과 그리움이 날 두렵게 한다"는 25년에 걸친 애절한 사랑이 깊은 심연을 헤치고 수면위로 올라 와 언제나 열려 있었던 이레네의 방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 문을 닫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에 앞서 카메라 앵글은 벤야민이 소설을 완성한 뒤 책상위에 써 놓은 수첩을 향해 눈길을 돌립니다. 'TE MO'라고 쓰여 있는 수첩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벤야민은 이윽고 e와 M 사이에 A를 써넣어 'TE AMO'로 바꿉니다. '두렵다'가 '널 사랑해'로 바뀌는 순간이며, 25년간의 간극을 매우는 순간입니다.

팽생 한 여자만 가슴에 품은 두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사랑을 지켜가는지를 서로를 교차시켜가며 거울처럼 비추던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눈길을 돌립니다. 영원히 정지한 시간을 택하는 모랄레스와 25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시간을 움직이며, 삶의 다른 표현인 사랑을 선택하는 벤야민으로 길을 나눕니다. 

그것은 벤야민이 법원에서 근무할 때부터 항상 A자가 찍히지 않던 낡은 타자기로 소설을 쓰며 'TE MO' 사이에 직접 손으로 A를 일일이 써 넣어 'TE AMO'로 만들어 가면서, 자신의 삶의 완성은 이레네와의 완전한 합일에 있었음을 자각하는, 매혹적인 사랑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2010 .11 .11 개봉.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 아르헨티나 후안 호세 캄파넬라 이사벨 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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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열의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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