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 중에서 MBC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 '고스톱 부부' 편에서 오은영 박사가 발언하고 있다.

▲ MBC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 중에서 MBC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 '고스톱 부부' 편에서 오은영 박사가 발언하고 있다. ⓒ 이슬기

 
오래 전에 집중 양육기를 지난 여성은 <금쪽같은 내 새끼>를 시청한 밤, 자신의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왜 너 키울 때, 네 마음 헤아릴 생각을 못했을까." 양육할 자녀가 없는 청년은 자신을 '금쪽이'에 대입해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내가 가진 심리적 문제는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구나!"
 
<금쪽같은 내 새끼>가 '육아물'로만 소비되지 않듯, 오은영 박사 역시 더 이상 '육아 대통령', '육아 멘토'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치유 문화'를 열어젖힌 존재다. 치유 문화란 각종 심리 상담, 치유서, 명상과 요가 등 치유 산업이 확장되고, "개인들이 자신의 감정과 정신을 응시하고 마음의 상처와 우울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치유 활동에 전념하는 현상"(정승화의 논문 <치유적인 것은 정치적인가>(2014) 참고)을 말한다.

미국의 경우 치유 문화가 몇십 년 전부터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심리적 문제가 있을 때 정신의학과나 상담센터를 찾는 것을 망설이거나 쉬쉬하는 경우가 많았고, 행복이나 내면보다는 성공과 성취라는 가치가 지배적이었다. 치유 문화는 개인의 심리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자아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다.
 
치유 문화의 내러티브
 

치유 문화는 자아에 대한 일정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첫째,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둘째, 자신에게 무의식적 영향을 미친 유년기의 사건을 연결 짓기. 이 유년기의 사건은 대부분 부모의 폭력, 가출, 죽음, 이혼 등 원가족과 관련되어 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오은영 박사는 부모의 양육 태도에 대해 지적하다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잠깐, 어머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는지 듣고 싶은데요?"
 

엄마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쏟고, 오은영 박사와 패널들은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 상처가 부적절한 양육 태도를 낳았음을 알고 고개를 끄덕인다. 결혼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부부를 상담하는 <오은영 리포트-결혼 지옥>에서도 마찬가지다. <결혼 지옥> 25회에서 남편의 폭력으로 갈등을 겪은 부부가 등장하자, 오은영 박사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폭력적 성향을 가지게 된 남편의 어린 시절을 언급한다. <결혼 지옥> 20회에서 딸이 싫다는 표현을 하는데도 신체적 접촉을 하는 새아빠의 사연에서도,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그가 받았을 상처가 고려된다.
 
이 내러티브는 오은영 박사만의 것이 아니다. 1986년부터 방영이 시작된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 쇼부터, 각종 TV 드라마 속 주인공의 서사까지 보편적으로 활용된 틀이다. 이 내러티브는 편의점 컵라면으로 세 끼를 떼우는 빈곤 청년부터 '걸어다니는 중소기업'이라 불리는 연예인까지, 약속시간에 늦는 것부터 알콜 중독까지, 어떤 사람의 어떤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성장 과정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거나, 일상 생활에서 아무런 문제에 부딪히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이러한 치유 내러티브가 "제작비를 크게 투자하지 않아도 되고 다양한 신상 이야기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무척 유리한 위치를 갖는다"고 말한다.
 
사회적 문제를 심리의 문제로 바꾼다?

이 내러티브가 확산되는 만큼, 이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다. 치유 문화가 우리나라에 비해 발달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치유 문화가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이자 심리의 문제로 탈정치화한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미국의 사회학자 제시카 M. 실바는 <커밍 업 쇼트>에서 노동 계급 청년들이 노동 시장의 유동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자아의 성장과 감정 관리에 집중하며, 시장과 국가 같은 제도들이 행사하는 힘을 시야에서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영국의 사회학자 프랭크 푸레디는 <치료요법 문화>에서 사회학적 상상력이 쇠퇴한 결과, 고통을 자신의 내부에서 비롯된 문제로 인식하고, 자존감, 스트레스, 신경증과 같은 심리학 용어로 정의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비판은 오은영 박사의 상담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오은영 박사는 젠더 권력, 경쟁적인 교육제도 등 개인을 둘러싼 사회구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개인적 차원에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에 집중한다. 이러한 해결 방식은 자기계발의 가치에 손을 들어주고,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개인에게 책임을 돌린다. 하지만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무리 중요하다해도, 우리에게는 당장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도 필요하다. 치유 문화는 이미 고통을 해석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대한 세계관이 되었고, 이 '대세'를 거스를 방법은 없어보인다.

과거의 상처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그렇다면 치유 문화가 사회적인 문제를 사사화(私事化)한다는 익숙한 비판 말고, 다른 방식의 비판은 어떨까? 자아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서사가 실제로 고통을 줄여주지 못하고, 도리어 고통을 심화시킨다면? 에바 일루즈는 말한다. 치유 내러티브는 자아의 고통에 대해 논의하고 이에 대해 꼬리표를 붙여 설명하기 때문에, 자아가 다시 고통을 정체성의 중심에 두게 되는 "슬픈 아이러니"가 반복된다고.
 
에바 일루즈의 주장을 내 방식으로 풀어보면 이렇다. 내게도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다. 이 상처를 나는 생의 여러 순간 이야기해왔고, 때로는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끼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도 과거의 사건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 내 인생의 이야기가 쌓였고, 나는 내 힘으로 만들어온 나의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이런 내가 상담소에 가자 선생님은 말했다. "이 일에 영향을 미친 과거의 일이 있을 것 같은데요." 유년기 가족과의 경험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는 도식적 서사 속에서, 나는 과거의 상처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를 포함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공이나 성취로는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상담이나 정신과 치료, 명상 등의 도움으로 내면의 위기를 넘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치유 문화의 소비자이자 주체로 살아왔거나 살아가고 있기에, 오은영 박사로 대표되는 치유 문화에 거리를 둘 수 없다. 그러나 하나의 방식으로 자아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반복될 때, 도식적이고 규격화된 서사 바깥의 이야기들이 설 자리를 잃어버릴 때, 가족의 과거사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자아의 성장'이라는 분명하지 않은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려야 할 때, 그때도 치유 문화는 우리를 치유할 수 있을까. 나는 오은영 박사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연예인 패널들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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