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바리니 한국 여자배구 도쿄올림픽 대표팀 감독(왼쪽)-토미 대한항공 감독

라바리니 한국 여자배구 도쿄올림픽 대표팀 감독(왼쪽)-토미 대한항공 감독 ⓒ 박진철·KOVO

 
여자배구 팬들의 '국내 감독 불신-외국인 감독 선호' 경향은 그간의 경험과 기억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특히 한국 여자배구는 라바리니(43·이탈리아) 감독이 이끈 도쿄 올림픽 대표팀이 4강 신화를 달성하면서 더욱 기름을 부었다. 외국인 감독 성공 사례로 확실한 유산을 남겼기 때문이다.

물론 김연경(192cm)이라는 세계 최고 완성형 공격수의 존재가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라바리니 감독의 지도력도 큰 기여를 한 건 부인할 수 없다. 사실 도쿄 올림픽 개막 직전까지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은 이런저런 악재가 발생했고, 객관적 전력 평가도 4강은커녕 조별 리그에서 탈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그래서 일반 대중과 해외 언론조차 '기적의 4강 신화'라고 말한다.

지난해 김연경과 한국 도쿄 올림픽 대표팀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이번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도 여실히 증명됐다. 

지난달 24일(아래 한국시간) 개막한 '2022 여자배구 세계선수권' 대회가 12일 새벽 4강 진출 팀이 모두 가려졌다. 미국, 브라질, 세르비아, 이탈리아가 4강에 진출했다. 지난해 도쿄 올림픽 4강 진출 팀은 미국, 브라질, 세르비아, 대한민국이었다. 대한민국의 자리에 이탈리아만 바뀐 것이다. 국가적으로 총력을 쏟아부었던 중국, 일본, 태국 아시아 강호들은 아쉽게 모두 4강 진출에 실패했다.

한편, 대한민국배구협회는 지난해 라바리니 감독 체제에서 기술 코치를 맡았던 세자르(45·스페인)를 후임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세자르가 이끄는 현 대표팀에는 여자배구 세계 최고 프로팀인 터키 리그 바크프방크의 코칭스태프가 3명이나 합류했다.

대표팀의 세자르 감독, 피크레 제일란 코치, 조반니 미알레 체력 트레이너가 모두 현재 바크프방크 소속이다. 바크프방크의 현 감독은 세계 최고 명장으로 꼽히는 구이데티(50·이탈리아)다. 바크프방크는 지난 시즌 팀 역사상 두 번째로 '5개 대회 싹쓸이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했다. 지난 시즌 터키 리그, 터키 컵, 터키 챔피언스컵, 클럽 세계수권, 유럽 챔피언스리그까지 5관왕을 차지한 것이다. 

도쿄올림픽 대표팀, V리그 대한항공.. 외국인 감독 '초대박' 

남자배구에도 최근 외국인 감독 영입으로 초대박을 친 사례가 발생했다. 바로 대한항공이다. 대한항공은 지난 2020-2021, 2021-2022시즌 연속 V리그 정규리그와 포스트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했다. 2시즌 연속 통합 우승이다. 이는 대한항공 팀 창단 역사상 최초 기록이다. 

그런데 2시즌 동안 최고 황금기를 이끈 사령탑이 모두 외국인 감독이었다. 더군다나 V리그 남녀 14개 팀 중 유일한 외국인 감독이었고, 현재도 유일하다. 일각에선 국내 선수 구성이 좋기 때문에 우승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프로 스포츠에서 당연한 건 없다. 해외와 국내를 막론하고, 역대급 '초호화 군단'이라고 불렸던 팀들도 우승도 못하고 망가진 사례가 부지기수다. 

국내 선수 육성 면에서도 대한항공의 산틸리(이탈리아), 토미(핀란드) 두 외국인 감독은 큰 공적을 남겼다. 임동혁(23·201cm)이 대표팀 주전 아포짓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급성장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임동혁의 역할이 없었다면, 2년 연속 통합 우승도 없었다. 외국인 감독들은 임동혁을 단순히 외국인 선수의 보조 역할이 아닌, 동등하게 출전 기회를 주면서 의도적으로 육성을 했다. 

배구 스타일 면에서도 '토털 배구를 바탕으로 한 스피드 배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위기에 직면한 한국 남자배구에 바람직한 미래상을 선보인 것이다. 또한 토미 감독은 한국배구연맹(KOVO)이 최근 도입을 결정한 '외국인 선수 아시아쿼터'에 대해서도 V리그 감독 중 유일하게 언론에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한국 배구의 미래를 위해서 국내 선수가 코트에 더 많아야 한다"고 말했다.

남자배구 대표팀, '국내 감독의 흑역사'.. 감독 퇴출 악몽까지

반면, 남자배구 대표팀은 '국내 감독의 흑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국내 감독이 대표팀 감독을 맡아 왔지만, 중요한 타이틀이 걸린 국제대회 때마다 똑같은 패턴으로 실패를 반복해 왔다.

남자배구가 22년 동안 올림픽 출전도 못하고, 세계 배구 흐름과 아득히 멀어지고 있음을 보면서도 대표팀 감독을 국내 감독으로만 일관한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어떤 면에선 여자배구 대표팀보다 훨씬 전부터 외국인 감독이 필요했었다. 일각에선 '외국인 감독만이 능사는 아니다'고 말하지만, 단 한 번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곳에서 할 소리는 아니다.

심지어 남자배구 대표팀은 '악몽 같은' 기억도 있다. 바로 김호철(67) 감독의 '대표팀 퇴출' 사건이다. 김 감독은 지난 2019년 남자배구 대표팀의 전임 감독을 맡고 있던 당시, 도쿄 올림픽 예선전을 앞둔 중요한 상황에서 대표팀 감독을 중도 포기하고 프로팀으로 가기 위해 국내 프로구단 고위층을 만나 감독직을 요청했다가 들통이 났다. 

그 일로 배구계와 팬들의 비난 여론이 폭발했고, 결국 대한민국배구협회와 대한체육회 재심에서 각각 1년과 3개월의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김 감독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대표팀 감독을 자진 사퇴했다. 당시 김 감독은 추락하는 한국 남자배구를 구출해야 하는 선장이었다. 그런데 가장 먼저 탈출을 시도하면서 남자배구 대표팀을 더욱 서글프게 만들었다.

사실 김호철 감독 이전에도 국내 감독들이 대표팀 감독을 프로팀으로 가기 위한 스펙 쌓기용으로 여긴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프로팀 감독 아래 대표팀 감독'이라는 말까지 회자됐다. 그래서 배구협회가 대표팀 전임 감독제를 도입했지만, 첫 전임 감독부터 취지를 망가뜨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지난 7월 일부 국내 감독들이 언론을 통해 세자르 대표팀 감독에게 불평·불만을 표출하면서 논란이 일었을 때, 여자배구 팬들이 김호철 감독을 가장 강력하게 비난한 것도 그런 전력 때문이었다.

국내 감독·프로구단.. 방향 전환과 성과 필요

그런저런 일들이 쌓이다 보니, 일부 여자배구 팬들은 프로구단들이 '선수 아시아쿼터제'를 도입할 게 아니라, '외국인 감독 쿼터제'를 도입하는 게 더 시급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몇몇 여자배구 구단의 팬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서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의 감독 퇴진을 요구하는 '트럭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올해만 해도 2개 구단의 팬들이 트럭 시위를 진행했다.

한 구단의 팬들은 구단이 "외국인 감독 영입도 검토 중"이라고 공표한 것에 큰 기대를 걸고 환호했다가, 결국 돌고 돌아 국내 감독 선임을 발표하자 실망감을 쏟아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감독들도 팬들의 부정적인 인식을 모를 리 없다. 그리고 일정 부분 인정하는 대목도 있다. 때문에 최근에는 팀 플레이를 '스피드 배구'로 전환하겠다고 천명한 감독들이 계속 늘고 있다.

다만, 구체적인 성과로 평가받을 만한 수준에 도달한 사례가 없다 보니, 팬들은 여전히 국내 감독들이 토털 배구·장신화·강서브 등 세계 배구 흐름과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국내 감독들이 더 치열하게 연구하고, 혁신과 성과로 팬들에게 보여주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클럽시스템 도입.. '프로구단이 직접' 유망주 육성해야

지금 국내 감독들을 비롯해 프로배구 전체의 큰 고민은 매년 신인 드래프트 때 V리그에 즉시 투입 가능한 기량를 갖춘 신인 선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여러 제약 요건과 투자 고갈로 더 이상 학교 배구에 유망주 발굴·육성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다. 우수한 선수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투자 여력도 있는 프로구단들이 직접 유망주 발굴·육성을 책임지는 수밖에 없다.

때문에 프로구단이 필요한 선수를 직접 육성해서 쓰는 제도로 빨리 전환해야 한다. 바로 유럽식 클럽 시스템 도입이다. 프로구단이 직접 초중고 팀을 창단해서 유망주들을 육성하고, 신인 드래프트 때 해당 구단에게 최소 1~2명의 우선 지명권을 보장해줘야 한다.

더군다나 클럽 시스템은 생소한 제도도 아니다. 이미 유럽 프로 리그들은 대부분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다. 유럽, 남미, 중국 등 배구 강국들의 대표팀 주전 선수들을 보면, 20대 초반의 어린 선수들이 주전으로 활약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바로 클럽 시스템이 잘 정착돼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프로축구가 클럽 시스템을 도입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축구가 계속해서 좋은 선수가 육성되고, 해외까지 진출한 선수들이 가장 많은 종목인 결정적인 이유가 그런 체계적인 육성 시스템 때문이다.

프로구단들이 좋은 선수가 없다고 숨 넘어가는 소리만 할 게 아니라, 배구단 투자에 소극적인 팀을 빼고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빨리 클럽 시스템 가동을 결단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고 발전적이다.

아시아쿼터 같은 값싼 외국인 선수를 늘려서 국내 스타급 선수들의 고연봉을 끌어내리고, 기세를 눌러 구단이 주도권을 틀어쥐겠다는 유치한 발상으로는 현재 한국 배구의 난제를 해결할 수도 성공할 수도 없다. 자칫 V리그 중간급 국내 선수만 도태시키고, 동남아 주전급 선수를 돈 주고 육성시켜주는 리그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은 여자배구 인기를 프로야구를 위협할 정도로 끌어올린 대표팀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을 인정하고, 프로다운 구단 운영과 대표팀 경쟁력 향상을 위한 근본적 문제점들에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 그것이 배구 팬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지름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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