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2월 26일 조선수군 사령부에서 "통제사 이순신을 의금부로 압송하라는 주상전하의 명이다"라는 뜻밖의 외침이 울려퍼진다. 조선수군의 총사령관이자 백전불패의 명장인 이순신이 하루아침에 관복을 벗고 의금부로 끌려가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순신에 대한 신망이 두터웠던 백성들은 갑작스러운 압송에 놀라 길거리에 쏟아져나와 통곡했다고 한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은 왜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8월 31일 방송된 tvN STORY 오리지널 역사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19회에서는 '1597년, 이순신은 왜 죽음을 생각했나'라는 주제하에 우리에게 익숙한 명장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시간은 15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월 13일 부산포에 대규모의 일본군이 상륙하며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막이 올랐다. 파죽지세의 일본군은 20일 만에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북상한다. 육지에서의 조선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선조가 이끄는 조정은 북쪽 변경까지 피난을 떠나며 나라는 그야말로 존망의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조선의 바다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바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제해권을 장악하고 일본군의 보급 길목을 차단함으로써 전황을 반전시켰다. 이순신의 활약에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바로 조선의 국왕인 선조였다.
 
일본의 집권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눈엣가시였던 이순신 함대를 물리치기 위하여 대규모 함대를 남해로 파견한다. 양국 수군의 전면전이 바로 임진왜란 최고의 해전으로 꼽히는 '한산도 대첩(1592년 7월 8일)'이다.
 
이순신은 철저한 전략에 따라 지역이 협소하고 암초가 많은 견내량에서 일본 함대를 한산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펼쳐 무차별 포격전을 전개했다. 조선 수군은 한산도에서 왜선 73척 중 59척을 격침시켰고 3일에 걸쳐 지속된 전투에서 총 100여척의 왜선이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한산대첩은 임진왜란의 가장 큰 대승이자, 세계 해전사에서도 보기 드문 포위섬멸전의 모범사례로 꼽힌다.
 
히데요시는 해상전투에서 이순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해전 금지령'을 내린다. 일본군에게 이순신의 존재가 두려움으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이순신은 놀라운 전공을 인정받아 수군총사령관인 삼도수군 통제사에 임명된다. 이순신과 수군의 활약을 기반으로 전력을 추스린 조선은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받아 일 년 만에 한성을 되찾고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루아침에 죄인으로 체포된 전쟁 영웅 이순신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여기서 이야기는 이순신이 의금부에 압송된 다시 1597년으로 돌아온다. 전쟁 영웅 이순신이 하루아침에 죄인으로 체포된 죄목은 놀랍게도 '게으름'이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이라도 잡는 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의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이순신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히데요시의 해전 금지령으로 일본군은 이순신과의 대결을 기피했다. 이순신은 전황에 대하여 정확한 보고를 올렸지만 선조는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고 차츰 이순신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커졌다.
 
일본군의 수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앙숙이었다. 1597년 고니시는 조선 조정에 밀서를 보내 '가토가 군대를 이끌고 바다에 나갈 것이니 그때 공격하라'는 정보를 흘린다. 솔깃한 선조는 이순신에 출전을 명하지만, 이순신은 고니시의 첩보를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왕명을 거부한다.

분노한 선조는 "지금 와서 가토의 목을 베어오더라도 이순신의 죄를 용서해줄 수 없다"고 길길이 날뛰었다고. 그 이면에는 임금보다 높은 명성과 신망을 얻고 있던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경계심과 질투가 있었다. 

이순신은 신중히 사태를 파악하고 출전을 결정했으나 이미 선조의 체포명령이 떨어진 뒤였다. 의금부로 압송된 이순신은 53세의 나이에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순신은 28일 만에야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순신이 집필한 <난중일기>의 1597년은, 감옥에서 풀려난 4월 1일부터 '맑음, 옥문밖으로 나왔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하루아침에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던 이순신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이순신은 사형은 면했지만 아직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백의종군의 처벌을 내린다. 백의종군은 현대적인 의미로 보직해임을 의미하며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것과 같은 강제노역을 시킨 것이 아니라, 종군하여 다른 장군을 보좌하거나 스스로 공을 세워 죄를 만회하도록 한 처벌이다. 이순신은 경남 합천으로 내려가 당시 조선군의 총사령관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배석된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도중 모친의 안타까운 비보를 전해듣는다. 모친은 이순신이 옥에 갇힌 것을 알고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83세의 고령에도 배편으로 한성으로 올라가다가 사고로 별세한 것이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어머니에 대한 언급만 100여 차례 이상 등장할 만큼 애틋한 마음을 드러낸 바 있다. 그런 어머니를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잃어야 했던 이순신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설상가상 죄인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장례는 허용되지 않았다. 1597년 4월 19일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와 같은 사정이 또 어디있으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라며 절절하고 애통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슬픔에 잠긴 이순신에게 또다른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이순신이 공들여 키운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의 참패로 궤멸했다는 비보가 전해진 것. 평소 이순신을 질투하고 모함했던 원균은 1597년 선조의 후원을 등에 업고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하지만 선조의 명령에 따라 출격했던 원균은 일본의 유인책에 말려 대패했고 수군 전체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 사상 조선 수군이 당한 유일한, 그리고 최악의 패배였다. 제해권을 빼앗긴 조선은 해상진출로 내주고 위기에 처했다. 이순신은 1597년 7월 16일 <난중일기>에서 "우리나라에 미더운 것은 수군 뿐인데, 이와 같이 희망이 없어지니 통곡함을 찾지 못했다"고 기술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패전 이후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 통제사로 복직시키며 편지를 보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이순신은 묵묵히 선조의 명을 받아 수군총사령관으로 돌아왔지만 병력과 함선은 모두 궤멸된 상황이었다. 다행히 칠천량에서 미리 도주했던 12척의 배가 귀환하며 이순신에게는 수군 재건의 천금같은 희망이 됐다. 또한 이순신의 복직 소식을 듣고 도망친 장수들도 하나둘씩 합류했다.
 
선조는 또다시 이순신에게 서신을 보내 수군의 전력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하여 육지에서 전투에 임하라는 명을 내린다. 하지만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유명한 문구와 함께 절대 일본에게 바다를 내줘서는 안 된다고 선조를 설득한다.
 
겁에 질려 전진을 거부한 병사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1597년 9월 16일, 이순신은 총 13척의 배를 이끌고 300여 척에 이르는 일본군 대함대와 울돌목에서 조우한다. 조류의 변화가 심하여 '울며 돌아가는 길목'이라는 의미의 울돌목을 한자로 옮긴 것이 바로 '명량'이다. 울돌목은 바다에서 흘러온 물이 폭이 비좁은 지형에서 물살이 급격히 거세지고 암초에 부딪힌 물살은 회오리치기까지 하는 구역이었다.

이순신은 압도적인 전력차에 두려움을 집어먹은 병사들에게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말로 독려하여 용기를 불어넣었다. 전투 개시 초기, 양군 함대가 대치하는 가운데 이순신이 탄 대장선만 선두에 서고 12척의 함대가 겁에 질려 전진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순신은 물러서지 않고 대장선만으로 약 1시간 가까이 홀로 고군분투했다. 대장선은 주변을 에워싼 일본함대에 함포와 화살로 맞섰고 배 위에 올라탄 일본군과 백병전까지 벌였다. 이순신은 후방에서 참전을 주저하던 부하들에게 "너희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당장 처형할 일이지만 우선 공을 세울 기회를 주겠다"며 독려한다. 그제야 머뭇거리던 배들이 하나둘씩 전진하여 대장선 주위에 합류하며 조선수군이 다시 뭉쳤다.
 
오후 1시, 명량해협의 물살 방향이 바뀌며 전투의 흐름도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역류를 맞이한 일본 함대는 조선군의 판옥선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뒤바뀐 물살의 흐름에 일본 함대가 혼란을 맞이한 틈을 타 반격의 기회를 맞이한 조선군은 공세로 돌아섰다. 많은 함선들이 거센 물살과 포화세례를 이기지 못하고 침몰했고 패색이 짙어진 일본 함대는 결국 철수한다. 극적인 승리 이후 이순신은 "이번 일은 실로 천행이었다"라고 평가했다. 10배 이상의 전력차를 극복해낸 명량해전은 지금도 세계 해전사에 보기드문 전투로 꼽힌다.

1597년은 이순신에게 유난히 길고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역사에 남을 영광스러운 승리를 이뤄낸 이순신이지만 개인적인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명량해전이 끝나고 한 달 뒤, 이순신은 이번엔 셋째 아들의 갑작스러운 비보를 전해 듣는다. 거듭해서 이순신에게 당했던 일본이 복수를 위하여 이순신의 본가가 있는 아산을 급습했던 것.
 
그해 10월 14일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너를 따라 함께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내 마음은 이미 죽고 형상만 남아있어 울부짖을 뿐이다"라며 기록하고 있다. 어머니에 이어 아들까지 잃은 이순신의 참담한 심정이 절절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순신은 아들의 부음을 듣고도 전쟁중이라 아들을 보러갈 수도, 마음놓고 드러내 울지도 못했다.
 
이순신은 슬픔을 가슴에 묻고 묵묵히 조선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11월 1일, 수군 기지를 보화도로 옮긴 추운 날에 이순신은 '도일여년(하루를 지내기가 일 년 같구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묵묵히 나라를 지켜야 하는 임무를 다해야 했던 이순신의 통절한 심정은 <난중일기> 속 기록에서 드러난다.
 
1597년은 이순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와 가장 고통스러운 아픔이 공존했던 시간이었다. 이순신은 화려한 명장의 이면에 개인으로는 죽음까지 생각했을 만큼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순신의 이미지는 임진왜란에서의 화려한 전공과 영웅적 활약으로 추앙되고 있지만, 한편으로 인간 이순신이 겪어야 했던 슬픔과 고뇌에 대해서도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존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낸 구국의 영웅, 세계 해전사에 손꼽히는 전적을 이뤄낸 신회적 명장, 대한민국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평가하는 수식어들이다. 이순신은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이상적이고 완벽한 성인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이순신 역시 영웅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너무 완벽해서 초월적이기만 한 인물보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고뇌할 줄도 아는 친근한 모습이 인간미를 자아낸다. 이순신의 진정한 위대함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극한의 인내와 노력을 바탕으로 나약한 인간의 한계마저 극복하려고 했던 숭고한 의지에 있을 것이다.
이순신 벌거벗은한국사 명량해전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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