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사회를 바꾸고 악습을 근절하는 개혁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일 때가 많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공감하고 연대하는 과정을 통하여 지금껏 가보지못한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다.
 
19일 방송된 JTBC <차이나는 클라스-질문 있습니다>에서는 이욱연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교수가 강연자로 나서서 중국의 대문호 루쉰의 작품세계를 통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의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짚어봤다.
 
중국의 작가이자 사회사상가였던 루쉰은 <아Q정전> <광인일기> 등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을 통하여 19-20세기 중국 사회의 현실을 냉철하게 비판했다. 그가 남긴 글들은 국경과 세대를 초월하여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저항시인인 이육사도 루쉰 추도문에서 "이 위대한 중국 문학가의 영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인다"며 존경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의 한 장면

JTBC <차이나는 클라스>의 한 장면 ⓒ JTBC

 
오늘날 한국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말 중에 루쉰이 창안해낸 표현이 있다. 바로 '정신승리'. 루쉰의 대표작 <아Q정전>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표현이다. 1921년 발표된 <아Q정전>은 한 농민의 삶과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중국사회를 풍자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아Q는 우리 말로 하면 본명 대신 '모 아무개' 정도의 지칭을 의미한다.
 
농촌에서 살고있는 가난한 아Q는 마을에서도 최하층에 해당하며 매일 갑질을 당하면서 날품을 파는 신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Q가 늘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정신승리에 있었다.
 
아Q에게는 4단계의 정신승리법이 있었다. 동네건달들에 괴롭힘을 당하던 아Q는 "아들놈에게 맞은 셈 치지"하며 1단계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를 눈치챈 건달들이 더욱 아Q를 괴롭히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를 버러지로 비하한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정신승리 2단계였다. 남탓 또한 내 탓을 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자기방어 기제'에 해당한다. 
 
아Q는 어느날 도박으로 모처럼 큰 돈을 땄지만, 다른 사람과 싸움이 붙어 흠씬 얻어맞고 돈까지 다 털리고 만다. 그러자 아Q는 자기 뺨을 힘껏 때렸다. 스스로를 때리면서 아Q는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졌다. 남이 나를 때리면 억울하지만 내가 나를 때리면 억울할 게 없으니까. 이른바 '자아분리'와 '자기학대'로 이어지는 아Q의 3단계 정신승리법이었다.
 
아Q의 마지막 정신승리 4단계는 자신보다 더 약자를 대상으로 한 화풀이였다. 아Q는 동네 절에 머물던 비구니에게 이유없이 시비를 걸고 성희롱을 했다. 3단계까지 부조리한 현실을 일방적으로 감수하는 피해자의 입장이었던 아Q는, 4단계에 이르러 강약약강의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내며 '가해자가 된 피해자'로 전락한 것.
 
아Q표 정신승리법의 문제점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 부정과 객관적인 자기 반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처한 진짜 현실을 마주하고 대항하면서 바꾸려는 의지가 없으니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 아Q가 주는 반면교사는 비극적 현실이라도 직시해야 진정한 승리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Q는 당시 중국인들과 중국 사회의 악한 근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당시의 중국은 무능한 정부와 외국의 침략으로 사실상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굴욕을 당했고, 중국인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국인들은 여전히 현실을 회피하고 과거의 영광에만 도취되어 자신과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보다는 정신승리를 일삼았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암흑기에 출생한 루쉰은, 바로 아Q같은 인물들 때문에 중국이 무너졌다며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청나라는 여러 차례 개혁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급기야 제정을 타파하고 공화정부를 수립하자는 신해혁명(1911-1912년)이 일어난다. <아Q정전>에서도 신해혁명이 중요한 전환점으로 등장한다. 처음엔 혁명을 싫어하던 아Q는 마을의 권력자들이 혁명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갑자기 마음을 바꿔 혁명을 외치고 다니기 시작한다. 혁명을 이용하여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자신이 갖고싶은 것은 모두 차지하겠다는 개인의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혁명이 벌어졌어도 관직만 달라졌을 뿐 지배층과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다. 혁명이 벌어졌어도 정작 크게 개선되지 않은 중국인들의 삶을 풍자한 대목이다. 결국 혁명의 이름을 빌려 각종 악행을 저지르던 아Q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사형대에 끌려가 총살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루쉰은 신해혁명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당시 중국에 아Q같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신해혁명을 주도한 정치가 쑨원은 순수한 의도에서 중국의 진정한 변화를 갈망했지만, 실제로는 아Q처럼 본질은 바뀌지 않으면서 혁명을 그저 개인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 사람들이 더 많았다. 루쉰은 자신의 이익과 복수만을 추구하는 이들을 아Q식 혁명가, 민중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혁명을 아Q식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중국에는 왜 아Q같은 사람들이 많았는가. 루쉰은 이를 중국 특유의 등급 질서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춘추시대의 역사서 <좌전>에는 하늘에는 열 개의 태양이 있고, 인간에게는 열 개의 등급이 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중국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등급질서와 능력주의가 뿌리깊게 박혀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대에 이르면서 사회변동으로 능력과 재력이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기는 했지만, 현재의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기반이 없으면 경쟁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하층민들이 대다수였다. 아Q 역시 중국 사회에서 가장 등급이 낮은 하층민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한국 사회에도 이러한 보이지 않는 등급이 존재한다. 금수저-흙수저-다이아몬드수저 등으로 요약되는 '수저론'은 한국식 등급 질서의 근거로 꼽힌다. 이른바 직장 내 갑질, 부모 찬스 등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등급 질서의 폐해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피라미드 구조로 형성된 등급질서에서 위로 갈수록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소수가 되는 구조다. 루쉰은 <기어가기와 얻어걸리기>에서 이러한 등급질서를 강하게 비판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성실하게 정해진 규칙만을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어오르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밀치고 넘어뜨리고 어깨와 머리로 밟고 올라서는 사람들이 성공한다. 대다수는 그저 기면서 자기의 원수가 자기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옆에서 함께 기고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대입할 수 있는 내용이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의 한 장면

JTBC <차이나는 클라스>의 한 장면 ⓒ JTBC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욱연 교수는 "요즘 대학에서는 조별과제가 없는 강의가 인기만점"이라고 설명하며 그 이유로 "조별과제는 상대평가로 인한 학생들의 갈등을 조장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권자들이 상대평가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관념적으로 상대평가가 자연스럽게 뿌리박힌 것도 있고, 한편으로 등급질서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승자가 될 수 있어'라는 믿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는 등급질서내에서 같은 등급에 놓인 이들을 동료가 아닌 경쟁자로 만든다. 이처럼 끝없는 경쟁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고통은 결국 청년들의 몫이 된다.
 
사회는 항상 많은 갈등이 벌어지기 마련이지만, 항상 그 갈등의 양상만 주목할뿐 오히려 그 갈등을 초래한 본질적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다. 루쉰은 이 사회 구조와 시스템을 "귀신이 친 담장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사회 시스템안에 갇혀 사람들은 앞만 보고 달려야하고 설사 낙오되고 뒤처지는 사람들이 있어도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루쉰은 이러한 사회의 해결책으로 <광인일기>를 통하여 습관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관습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한다. 수천년부터 식인 관습이 존재하던 마을에서 주인공인 광인은 유일하게 '식인은 없애야할 관습'이라고 주장했다.
 
옛날부터 이어온 전통이라고 이야기하는 청년에게 광인은 "옛날부터 그래왔다고 식인이 옳은가?"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관습을 비판없이 따르는 이들과,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사람의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한 다수가 생각하는 것이 무조건 정상이고, 소수의 의견은 비정상이라고 치부하는 선입견의 오류를 지적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루쉰은 사람들의 잘못된 관념을 광인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비판하고 있다. 광인은 모두가 미쳤다고 해도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고 집요하게 사람들을 설득했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왜 나만 갖고 그러냐'하는 생각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한번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옳은 일이야?' '모두가 반대해도 아닌건 아니다'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변화는 시작된다.
 
그런데 광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도 식인을 했던 것을 알게되는 반전이 나온다. 충격을 받은 광인은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았다. 진정한 인간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이라며 관습에 물든 자신도 이 사회를 바꿀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계몽가이면서 기성세대인 광인은 루쉰의 자아를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루쉰은 당대로서 신학문을 습득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오히려 낡은 구시대인으로 규정했다. 그만큼 루쉰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고 철저한 자기반성을 했던 인물이었다. 오늘날 개혁과 변화를 부르짖으며 깨어있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실상은 위선적인 행보를 보이는 정치인-지식인들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루쉰은 '중간물 이론'을 통하여 강을 이어주는 다리처럼 과거와 미래,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다리, 그 중간물 역할을 자신과 그 세대의 시대적 소명으로 여겼다. 루쉰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리더가 아닌, 구시대를 닫는 마지막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가지고 있었다.
 
기성세대는 어떻게 미래세대인 청년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선물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루쉰은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사회 구조에서 기성세대가 "청년들의 피를 빨아먹는다"며 분개했다. 한국 사회도 정치는 민주화되었지만 문화와 일상적으로는 여저히 낡고 보수적인 관습, 권위주의적인 잔재가 남아있다.
 
루쉰은 기성세대의 무능함으로 피폐해진 중국 사회의 희망이 청년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광인일기>에서 광인의 마지막 외침은 "아이들을 구하라"는 것이었다. 식인이 낡은 사회적 악습을 상징한다면, 그러한 악습에 젖지 않은 청년과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청년도 기존의 관습에 물들 수가 있다. 기성세대가 중간물 역할을 해야한다면 청년세대의 역할은 낡은 관습에 저항하여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다.
 
루쉰의 삶도 평탄하지않았다. 평생 중국의 변화를 갈망했지만 현실은 쉽게 바꾸지 않았다. 여기에 불행한 가정사, 폐병으로 인한 건강문제 등도 루쉰을 괴롭혔다. 루쉰은 <먼 곳에서 온 편지>에서 "나는 고통과 인생은 늘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통이 잠시 사라질 때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깊이 잠들었을 때 뿐"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루쉰은 정신승리로 현실을 도피한 아Q와는 정반대의 길을 길었다. 루신은 '절망적 현실을 인정하되, 패배를 외면하지말고 절망에 저항하라'고 주장했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의 한 장면

JTBC <차이나는 클라스>의 한 장면 ⓒ JTBC

 
루쉰의 시극 <행인>에서 행인은 바로 앞에 놓인 길이 '무덤'이라고 다시 돌아가라는 노인과 '꽃밭'이라는 소녀의 상반된 이야기를 듣는다. 행인의 선택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행인은 위선과 저주, 추방과 감옥, 가식과 거짓눈물이 있는 곳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내 앞에 펼쳐진 것이 설령 무덤뿐이라고 해도 악습에 찌든 곳으로 돌아갈수 없다는 의지였다. 지친 몸으로 한걸음을 내딛는 행인의 길은 '희망을 지향하며 걷는 것이 아니라, 절망에 저항하며 걷는 것'이다.
 
루쉰은 <고향>에서 "희망은 원래 있다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길이 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희망을 만드는 것은 발걸음에 달렸다. 하지만 그 첫걸음을 내딛는 것은 정말 쉽지않다. 설령 걸어간다고해도 수많은 고난과 번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힘든 길을 걸어가는데 위안이 되는 것은 같은 길을 바라보는 진정한 친구들이다. 절망에 저항할 때 필요한 것은 사람들간의 연대다. 개인의 삶도, 사회 구조도 혼자의 노력만으로는 바뀌기 어렵다.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작은 힘들을 모아 연대하다 보면 언젠가 새로운 길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거창한 변화도, 엄청난 꽃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함께한다면 세상을 바꾸는 일은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떠한 청년에서 어떤 어른이 되어가야할지 지금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루쉰의 메시지다.
차이나는클라스 광인일기 아Q정전 루쉰 등급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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