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윤여정을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고 표현했고, 누군가는 '국민엄마'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정작 본인은 이런 수식어를 싫어하며 자신을 '생계형 배우'라고 겸손하게 낮췄다.

모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무엇도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정체성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70대 노인, 55년 연기인생, 여배우, 한국인 등의 키워드를 통하여 흔히 연상되는 세상의 뻔한 기준과 고정관념만으로 윤여정의 삶과 캐릭터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윤여정은 그저 세상 어디에도 다시 없을 '윤여정스럽다'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배우 윤여정이 지난 26일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윤여정은 1966년 TBC 탤런트 공채로 연기 인생을 시작해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에서 파격적인 악녀 연기를 소화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원조 장희빈으로 출연하여 당대의 인기와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에도 윤여정은 동시대의 여배우들에 비하면 다소 다른 노선을 걸었다. 물론 대중적인 작품과 캐릭터도 많이 소화했지만, 이후로 이어질 윤여정만의 대표적인 매력과 정체성을 최초로 확립한 것은 김기영 감독이 함께했던 초창기 작품들에서였다.

젊은 시절의 윤여정은 그 시대에 유행했던 청순가련이나 현모양처형의 배우라기보다는, 지적이고 세련되면서도 묘하게 퇴폐적인 분위기를 공존하는 개성파 여배우에 가까웠다.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당시는 더빙을 했지만)와 까칠해 보이는 눈빛도 윤여정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한몫을 했다.

김기영 감독은 윤여정의 독특한 매력과 연기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을 알아보고 자신의 페르소나로 중용했던 최초의 감독이었다. 윤여정은 당시에는 김기영 감독의 섬세하고 까다로운 연출방식에 적응하지 못하여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김 감독과의 경험은 훗날 윤여정의 연기관과 작품을 보는 안목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 사실을 고백하며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윤여정은 가수 조영남과의 결혼과 이혼으로 한동안 공백기를 가졌다가 1990년대부터 다시 연기에 복귀하여 단역과 조연을 거치며 연기인생을 재개했다. 2003년부터는 <바람난 가족>을 시작으로 영화에도 복귀하며 <여배우들>, <하녀>, <돈의 맛> 등 수많은 작품에서 주조연을 넘나들며 강렬한 신스틸러 연기로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윤여정의 연기 폭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극명하게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굳세어라 금순아>, <넝쿨째 굴러온 당신>같은 가족드라마에서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 역할도 잘 소화하지만, 영화에서는 중장년 여성-여배우 이미지의 틀을 깨는 파격적이고 센 캐릭터를 소화한 경우가 많았다. 스크린 복귀작이었던 <바람난 가족>만 해도 시한부 남편을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중년 아내역을 맡았는데, 이런 캐릭터는 당시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윤여정이 이후 토크쇼에서 밝혔던 <바람난 가족> 출연배경도 걸작인데, 처음에는 그녀 역시 다른 배우들처럼 노출신에 대한 부담으로 거절하려 했지만 "집 인테리어 비용이 필요해서" 결국 수락했다고 고백했다. 윤여정은 "배우는 돈이 급할 때 제일 연기를 잘한다. 예술가도 배고프고 돈이 급할 때 좋은 작품을 만든다. 그래서 예술이 잔인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인생의 전성기에 삶이 주는 다양한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했던 윤여정의 현실주의적인 연기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목 그대로 출연자들의 실명과 캐릭터를 그대로 작품에 반영한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에서는 60대 여배우로 출연해 실제와 대본의 경계를 파악하기 어려운 자연스러운 일상 연기로 최지우, 고현정, 김옥빈 같은 후배 배우들을 리드하는 연륜을 보여줬다. 2010년 임상수 감독의 리메이크판 <하녀>에서는 하녀인 전도연의 상사 역할로 나와 그해 한국영화의 각종 조연상 부문을 싹쓸이하기도 했다. 재벌가의 탐욕을 소재로 한 <돈의 맛>에서는 욕망과 권력에 찌든 타락한 부잣집 사모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윤여정표 악역 연기의 극한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으로 가족영화였던 <고령화가족>이나 <장수상회>, <그것만이 내 세상> 등에서는 아픈 비밀을 감추고 있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만큼은 절절한 모성애 연기도 변함없이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2020년에는 독립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한글을 배우는 순박한 할머니로 출연하여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윤여정은 커리어 초창기의 김기영을 비롯하여 홍상수, 임상수, 이재용 등 역대 한국영화 계보를 잇는 거장들은 물론이고 최성현, 김초희, 정이삭 등 현재를 이끄는 젊은 감독들과도 영역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호흡을 맞췄다. 나이를 먹을수록 연기의 폭과 예술성이 더 깊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내노라하는 대배우들도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2013년부터 <꽃보다 누나> 시리즈를 시작으로 예능에도 진출하여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윤식당>, <윤스테이>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나영석 PD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등극하기도 했다.

2015년 배두나가 주연한 넷플릭스의 <센스8>과 현재 촬영 중인 애플TV플러스의 드라마 <파친코>까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해외 활동도 왕성히 이어가고 있다.어느덧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고 감각적인 대중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점점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사례는 윤여정 외에는 찾기 힘들다.

배우이자 인간으로서 윤여정의 매력은 무엇보다 '불편하지 않은 솔직함'에 있다. 예능 방송에서 비치는 윤여정의 실제 모습은 그녀가 극중에서 연기하던 인자하고 나긋나긋한 어머니상과는 차이가 있다. 불편하거나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참지않고 할 말은 하는 모습도 자주 나온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인정한다.

정작 젊은 후배 배우들이나 감독들이 윤여정의 까칠함을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다. 윤여정의 화법이 선배나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동등한 눈높이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윤스테이>에서 스스로 올드 레이디(Old lady)라고 칭하면서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손님들 앞에서는 최선을 다하여 소통하고 어떻게든 자신에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려는 책임감을 보여준다. <집사부일체>에서 후배들의 짓궂은 롤링페이퍼 폭로에 당황하면서도 "미안해, 내가 일관성이 없어" "뒷담화는 원래 친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며 저세상 쿨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윤여정의 연기스타일에도 그대로 녹아들며 <미나리>를 비롯하여 그녀가 연기하는 모든 인물들은 선역이든 악역이든 모두 어딘가 '윤여정스러운' 서사가 묻어나는 고유의 캐릭터로 재해석된다.

윤여정은 <미나리>로 각종 세계 영화에서 상을 휩쓸면서도 지나치게 겸손하지도 교만하지도 않은 쿨한 매력을 과시했다.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언급한 "콧대 높은(snobbish) 영국인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브래드 피트, 드디어 만나서 반가워요. 우리가 영화를 찍을 동안 어디에 있었나요" "나를 밖으로 나가 일하게 만든 아들들에 감사한다" 같은 표현들은 적당히 상대의 허를 찌르면서 당황하게 만드는 것을 즐기는 서양식 유머에 가깝다.

단순히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서 문화에 대한 이해와 순간적인 센스가 없다면 불가능했을 장면이다. 해외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의 노장 배우 정도로만 여겨졌던 윤여정의 반전 어록은, 그녀가 얼마나 위트가 넘치고 신세대적인 감각을 지닌 인물인지 보여준다. 

윤여정은 <미나리>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진심으로 만든 영화"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녀가 <미나리>의 순자 역할을 연기하며 진심을 느꼈다는 것은, 곧 순자가 걸어야 했던 삶의 궤적에 공감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극중 순자를 보면 젊은 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떠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온갖 역경을 견뎌 낸 윤여정의 실제 인생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하지만 순자의 삶이 그저 일반적인 한국 어머니들의 모습처럼 무조건 전형적이거나 신파적으로만 그려지지 않았던 것처럼, 윤여정이 삶의 고비를 이겨내고 뒤늦은 전성기를 맞은 과정도 그러했다. 순자가 순자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갔듯이, 윤여정 역시 윤여정만의 방식으로 후회없이 달려온 것이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것과 상관없이 윤여정은 변할 게 없다고 했다. 윤여정은 여전히 '윤여정스러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멋진 배우이자 사람이기 때문이다. 
윤여정 미나리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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