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포스터

<마녀>의 포스터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남성 감독들은 여성 배우를 주연으로 삼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성을 서사의 중심에 내세운 영화는 투자받기 힘들고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도 쉽지 않지만, 무엇보다 여성 캐릭터의 서사를 구축하는 남성 감독들의 상상력 자체가 부족하다는 것.

영화 <마녀>의 박훈정 감독도 그런 의심을 피해갈 순 없었다. 2017년 영화 <브이아이피> 개봉 당시 박훈정 감독은 극중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식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여성을 단순히 남성 캐릭터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당시 대본에 '여자 시체1'로 표기한 배역이 알려지면서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마녀> 시나리오는 <브이아이피> 보다 더 먼저 완성됐다고 한다. (2018년 7월 5일 <씨네21> <마녀> 박훈정 감독,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이었다")그럼에도 박훈정 감독에게는 <브이아이피> 논란 이후 <마녀>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는 큰 고민일 수밖에 없었다.

큰 음모 그리고 더 큰 안티-히어로

 영화 <마녀>의 한 장면.

영화 <마녀>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마녀>의 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먼저 닥터 백(조민수 분)과 미스터 최(박희순 분)의 유전자 조작 프로젝트가 있었다. 어린 아이들의 머릿속을 조종하여 살인 병기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구자윤(김다미 분) 또한 그 계획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일이 틀어져 자윤은 탈출하고, 가까스로 구선생(최정우 분) 부부에게 발견되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체를 숨기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자윤이 닥터 백과 미스터 최를 찾아내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직접 찾아오도록 자윤은 직접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기에 이른다. 그렇게 다시 귀공자(최우식 분) 일당을 마주친 순간, 자윤은 초인적인 힘을 이용해 그들을 소탕한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자윤이 그저 프로젝트의 객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내는 존재임을 알린다. 새로운 히어로의 탄생인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히어로와는 다르다. 악을 물리치고 정의를 되찾기 위한 여정은 <마녀>의 서사 속에 없다. 오히려 누가 악이고 선인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자윤은 안티 히어로(anti-hero)에 가깝다. 그녀가 고민하는 것은 오로지 감당하기 어려운 이 에너지를 부여한 시스템의 핵심에 가닿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히어로라면 불가피하게 부딪치는 윤리와 도덕의 문제에서 자윤은 자유롭다.

안티 히어로인 자윤은 '마녀'다. 귀공자도 그녀와의 첫 대면에서 '마녀 아가씨'라고 불렀다. 하지만 통상적인 의미의 마녀는 아니다. <못생긴 여자들의 역사>를 쓴 클로딘느 사게르에 따르면 마녀라는 호칭은 통제하기 힘든 존재들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를 담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여성들을 단죄하기 위해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단죄는 역사적으로 성공적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희생 당했기 때문이다.

반면 자윤은 그 전통적인 프레임을 전복(subversion: <마녀>의 영어제목) 시킨다. 마녀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을 역으로 단죄한다. 자윤이 주체적이고 강력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마녀'의 전통적 이미지를 뒤집어 엎어버리기 때문이다.

귀공자 일당들이 미국에서 왔다는 설정에 대해 박훈정 감독은 1970년대 미국에서 실제로 진행되었던 '울트라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는 자윤이 구선생과 헤어지고 시스템의 핵심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는다. 속편이 제작된다면 이 설정은 중요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70년대 미국이 비밀리에 진행한 'MK 울트라 프로젝트'가 있었고, 자윤이 닿길 원하는 시스템의 핵심에 모티브를 제공했다.

아쉽지만 다음이 기대된다

 영화 <마녀>의 한 장면

영화 <마녀>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닥터 백이 영화 후반부에서 구구절절 과거 사연과 줄거리를 읊는 설정은 조금 의아하다. 1부를 마무리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을까. 이전까지 윤리와 도덕 따위 전혀 아랑곳 하지 않던 과학자 닥터 백이었기에 더 어울리지 않았다. 유전자를 조작해 개인을 통제한다는 설정은 낯설지 않다. 그래서 더 닥터 백의 대사는 불필요해 보였다. <마녀>가 특별한 지점은 설정이 아니라 그 설정에 놓여있는 인물이 시스템을 뒤엎는 여성 안티 히어로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매력이 그 부분에서는 조금 지루해졌다.

또한 인물들의 대치 장면에서 과도하게 느껴질 정도로 욕설이 많아 또 한번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굳이 여성다움에 갇히지 않은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욕을 주고받는 수밖에 없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녀>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발굴해냈고 이미지의 전복까지 꾀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영화였다.

#마녀 #구자윤 #박훈정 #여성 안티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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