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디 버드> 포스터 포스터

▲ 영화 <레이디 버드> 포스터 포스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주인공 소녀는 부모가 지어준 '크리스틴(시얼샤 로넌 분)'이란 이름 대신 '레이디 버드(Lady Bird)'로 불리길 원한다. 왜 인용부호를 붙였냐고 물으면, "자기가 직접 불렀기 때문"이라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설명한다. 심지어 학교 게시판 공고문에 적힌 자기 본명 옆에 펜으로 직접 '레이디 버드'라고 적는 수고도 아끼지 않는다.

자기에게 붙인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에는 그들이 바라는 '딸'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소녀다. 고향 새크라멘토에서 공부를 마친 후 취업하고 무난한 경제활동을 하며 평범히 살라는 부모의 바람이 담겼다는 것. 특히 엄마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 소녀다.

크리스틴은 자기가 직접 지은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반항한다. 그녀에게 이름은 정체성이다. 부모가 준 이름을 거부하고 부모가 살길 원하는 삶도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소녀는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뉴욕으로 가길 원한다. 뉴욕이 아니라면 동부의 다른 전통 깊은 대학이라도 가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성적도 모자라고 불황의 기운이 집까지 뻗쳐오는 분위기다.

왜 레이디 버드(Lady Bird)일까?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엄마(로리 멧칼프)와 사사건건 부딪친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 권오윤


영화에서 크리스틴이 하필 '레이디 버드'로 불리길 원하는 이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나오진 않는다. 적어도 대사로는 그렇다. 다만 그녀의 주장과 행동이 그 의미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며, 단어의 의미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

'레이디'는 유럽에서 귀부인에게 붙이는 경칭이다. 'Sir'처럼 이름 앞에 붙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혹은 자기가 붙이고 싶다고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 경제, 정치 분야에서 영향을 준 사람 중에서도 엄선하여 권위를 가진 기관이(왕이나 의회) 붙여주는 칭호다. 물론 봉건시대의 유산이긴 하지만 존경과 명예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의견을 가진 한 인격체로 대우해 달라는 의미로 말이다.

'버드(Bird)'는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다는 그의 의중이 반영된 건 아닐까? 동부로 가고 싶지만 여의치 않은 현실에 새라도 되어 날아가고 싶다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새들은 모두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졌고 개성 있는 울음소리로 노래한다. 크리스틴 또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분노한다. 그렇다면 들어줄 때까지 울리라. 소녀는 지치지 않고 우는 새를 닮고 싶었을 수도 있다. 산에서 들어보면 산새의 소리는 생각보다 멀리 간다. '이 나무에서 울고 있는건가?' 하고 보면 아주 멀리 있는 나무에 있다. 작은 새지만 의외로 큰 목소리로 산이 울리도록 울어대기도 한다. 크리스틴은 자기 목소리로 우렁차게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내 얘기 좀 들어달라고 말이다.

'레이디 버드'에는 '무당벌레'라는 뜻도 있다. 두 단어를 붙이니 전혀 다른 뜻이 되었다. 그냥 곤충일까? 유럽 여러 설화에 'ladybird'가 나오는데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곤충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동정녀 마리아'로 해석하기도 한다. 영화의 '레이디 버드' 역시 뭔가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걸까? 감독이 심어놓은 복선일 수도 있다. 마침 소녀는 카톨릭계 고등학교에 다닌다.

깊이 들어갈 필요 없이, 직접 자기에게 붙여준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은 "남들이 바꾸기 어렵다는 현실을 박차고 날아올라,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소녀의 마음이 담긴 것으로도 해석하는 게 가장 타당할 것 같다.

그렇다면 그녀가 가고 싶은 동부는?

 영화 <레이디 버드> 스틸 컷.

영화 <레이디 버드> 스틸 컷.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크리스틴에게 새크라멘토(캘리포니아의 주도)는 물론 샌프란시스코와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서부는 답답해 비좁아 터진 세상이다. 영화는 9.11이 발생한 지 1년여 지난 2002년 여름쯤부터 그려진다. 주 무대인 새크라멘토는 세상 안전하지만 그래서 재미없고, 좁은 영역에서 먹고 살기는 힘든 그런 곳으로 보인다. 뉴욕은 테러가 일어났지만 새로운 성향과 생각들이 일어나는 진취적 세상이다.

영화는 2001년 뉴욕에서 발생한 테러로 인해 보수적인 정치색으로 회귀하던 당시 미국을 은근히 비판한다. 정치와 언론은 국민에게 '잠재적 위험은 미리 제거해야 한다'고 믿게끔 만든다. 당시로선 신기술이었을 휴대전화로 '선량한 시민까지 통제하지 않을까?'라는 공포가 퍼지는 당시의 모습들을 풍자한다. 그래서일까? 크리스틴은 공화당을 싫어하고 영화에는 공화당을 희화화하는 은유가 곳곳에 숨어있다.

크리스틴에게 뉴욕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헤쳐 나가 도달하고 싶은 세상이다. 그녀에게 새크라멘토에서의 삶은 아직 알을 깨기 전 껍질 속에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병아리의 삶일 뿐이다. 뉴욕에 간다는 건 안전한 알을 깨고 나와 위험하지만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동부에서 찾은 것은?

 <레이디 버드> 속 크리스틴(좌)와 단짝친구 줄리(우)

<레이디 버드> 영화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크리스틴이 뉴욕에 도착한 이후, 영화에는 4개의 시퀀스가 이어진다. 첫 번째는 노란색 '리갈 패드(Legal Pad)'에 빼곡히 적은 편지다. 철자가 틀려서, 문법에 맞지 않아서 구겨 버리고 차마 전하지 못했던 편지였다. 두 번째는 크리스틴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름을 '레이디 버드'가 아닌, 부모가 지어준 이름 '크리스틴'으로 소개하는 모습이다. 세 번째는 크리스틴이 거리를 걷다 들어간 성당에서 '로자 미스티카(신비로운 장미)'라는 성가를 듣는 장면이다. 이어 네 번째 시퀀스에서 크리스틴은 집에 전화해 '자동응답기'에 음성 메시지를 남긴다.

편지와 자동응답기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다. 다만 상대방이 반응했을 때 완성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편지는 상대방이 받아 읽어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자동응답기도 상대방이 들어야 완성이 된다. 쓰레기통에 들어갔던 편지는 사랑이라는 우체부가 전달해서 읽게 만든다. 그 편지가 레이디버드를 '크리스틴'으로 만들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거부했던 소녀가 자기가 지은 이름을 포기하려 한다.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성당에서 들은 '로자 미스티카'라는 성가는 신비로운 결합을 의미한다. '성모마리아'와 '예수'의 만남을 은유하는 것이다. 카톨릭 고등학교를 졸업한 크리스틴은 그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엄마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전화를 건 소녀는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긴다. 레이디버드도 아니고 '크리스틴'도 아닌 '딸'로서 말이다. 부모가 준 이름을 부정하고 싶었던 소녀는 긴 여정 끝에 원래 이름을 찾았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대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레이디 버드> LADY 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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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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