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가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 천신만고 끝에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하고 겨우 한숨을 돌리는가 했더니 오히려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축구협회는 내부 비리와 히딩크 파동 등으로 만신창이가 됐고, 대표팀은 분위기 반전을 기대했던 유럽 원정 2연전에서 '참사'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아들며 고개를 숙였다. 리더십은 실종됐고 방향성도 잃었다. 아래로는 선수에서부터 위로는 감독, 협회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믿음이 가는 구석이 없다. 총체적 불신의 늪에 빠진 한국축구에 팬들도 하나둘씩 등을 돌리고 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경쟁의식과 동기부여가 사라진 국가대표 선수들

 10일 오후(현지시간) 스위스 빌/비엔 티쏘 아레나에서 열린 축구 국가대표팀 평가전 대한민국 대 모로코의 경기. 신태용 감독이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10일 오후(현지시간) 스위스 빌/비엔 티쏘 아레나에서 열린 축구 국가대표팀 평가전 대한민국 대 모로코의 경기. 신태용 감독이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해외파 선수들로만 구성된 유럽 원정 2연전에서 신태용호의 경쟁력은 최악이었다. 국내파가 제외되어 완전체 전력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선수들 개개인의 면면은 현재 한국축구가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자원들이 대부분 소집된 상태였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세계적인 강호라고 할 수 없는 러시아와 모로코를 상대로도 개인기-체력-투지-활동량 등 모든 면에서 현격한 수준차를 드러내며 그야말로 농락당했다.

'아시아의 맹주'라는 허상에 안주하던 한국축구의 현 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 장면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 이후 10여년간 한국축구의 위상이 상승하고 재능있는 선수들이 대거 해외로 진출하는 현상이 보편화되면서 '이름값'은 높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순 투성이였다.

한국 유럽파들 중 빅리그의 강팀에서 꾸준히 주전급으로 활약하는 선수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오히려 한창 전성기를 보내야 할 시기의 선수들이 소속팀에서 출전기회도 잡지못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혹은 돈만을 쫓아 중국이나 중동으로 진출했던 선수들이 이른 나이에 성장이 정체되거나 퇴보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정작 국내에서는 한동안 '해외파 우월론'에 대한 그릇된 환상으로 인하여 유럽파나 중국파라면 최근의 기량이나 소속팀에서의 활약과 상관없이 무조건 중용하는 풍토가 지속됐다. 이는 국내파 선수들과의 위화감을 조성하며 한국축구의 강점이던 끈끈한 팀워크에도 악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또한 재능있는 유망주들이 무조건 해외에 진출하는 것만을 정답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되면서 국내 리그의 인재 유출이 가속화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전력이 약해진 K리그는 올해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 조기탈락하는 굴욕을 피하지 못했다. 또한 젊은 나이에 해외무대까지 진출하여 이미 달콤한 부와 명예를 맛본 해외파 선수들은 태극마크에 대한 절실한 동기부여와 경쟁의식을 잃고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늘어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차범근이나 박지성, 홍명보처럼 그 시대에 확실한 롤모델 혹은 구심점이 되어줄 리더형 슈퍼스타의 부재도 아쉽다. 현재 한국축구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손흥민은 소속팀에서의 활약에 비하여 대표팀에서는 그만큼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성용이나 이청용, 구자철은 기량이 조금씩 정점에서 내려오고 있는 상황인 데다 또래를 넘어 전 선수단을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이나 카리스마도 부족하다는 평가다. 소위 '런던올림픽 세대'(88~92년생)로 불리우는 현재 대표팀 주축 선수층을 대체할만한 '세대교체'나 '내부 경쟁체제 '육성에 소홀한 대가가 지금의 위기를 초래한 셈이다. 

원칙없는 감독 선임, 반복되는 인사 참사

이러한 대표팀의 구조적인 개혁을 진두지휘해야 할 감독 선임에 있어서도 한국축구는 패착을 거듭했다. 그나마 박지성-이영표 등 '한일월드컵 세대'가 마지막으로 활약한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원정 16강의 성과를 이끈 허정무호를 끝으로, 이후 한국축구는 7년간 무려 5명의 감독이 교체되는 혼란을 겪으며 본격적인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조광래-최강희-홍명보-슈틸리케-신태용으로 이어지는 2010년대 이후의 대표팀 감독들은 한일월드컵 황금기 이후 달라진 세계축구의 지형도에서 한국축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나 개혁 과제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가 부족했다. 감독들은 항상 당장의 성적을 내야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선수들은 선수대로 감독이 바뀔 때 마다 각기 다른 색깔에 적응해야 한다는 혼란에 시달리며 장기적이고 연속성 있는 팀운영이 이뤄지지 못했다.

흔히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이 '독이 든 성배'로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닌 인재(人災)에 가깝다. 평균 1년 반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빈번하고 성급한 감독교체 속에 감독의 능력과 비전에 대한 제대로 된 '사전 검증'이 이뤄지지 못했고 이는 반복되는 '인사 참사'로 이어질수 밖에 없었다.

최근 7년간의 감독선임 과정만 봐도 K리그에서 본인이 대표팀을 원하지 않는 감독을 강제로 빼내오며 '시한부 감독'을 초래하거나(최강희 감독), 지도자로서 성인무대 경험이 부족한 초보 감독을 선수 시절의 명성만 앞세운 '낙하산'이거나(홍명보 감독), 아예 지도자로서 성공한 경험 자체가 전무한 인물을 뜬금없이 영입하는(슈틸리케 감독) 등 막장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인사 참사의 공통점은 정상적인 절차와 원칙에 따른 검증 과정보다는 소수 수뇌부의 주관적인 판단에 편중된 주먹구구식 인사였다는 점. 그리고 장기적인 전략이나 목표의식 없이 '그때 그 시점'에서 축구협회 입장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선택'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신태용 감독 역시 각급 연령대별 대표팀을 거쳐 A대표팀 사령탑에 오르기까지 실제의 성과보다는 협회의 특별대우로 지나치게 많은 '기회 몰아주기'를 했다는 의구심을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과연 더 나은 지도자를 영입할 수 있는 기회가 정말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최근 수년간 한국대표팀 사령탑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거나 실제로 관심을 보였던 인물만 해도 세뇰 귀네슈(터키), 베르트 판 마르바이크(네덜란드) 등이 있었고 이들은 지금도 잘나가는 거물급 현역 감독들이다. 최근 히딩크 감독의 국내 복귀설이 불거졌을 때 전례없이 여론이 격렬하게 타올랐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설상가상 신태용 감독은 지난 최종예선과 유럽원정에서 연이은 졸전과 미숙한 팀운영으로 불붙은 '대표팀 감독 자격 논란'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됐다.

불신과 비리로 점철된 축구협회, 인적쇄신 불가피

정작 대표팀이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감독과 선수들을 보호하고 중심을 잡아줘야 할 축구협회는 어떤가. 지금 축그팬들 사이에서 오히려 '악의 근원지' 취급을 받으며 집중 포화를 맞고 있다.

사실 축구협회가 진작에 위기의식을 느꼈더라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기전에 바로잡을 기회는 차고 넘쳤다. 일찌감치 한계를 드러낸 슈틸리케 감독의 경질 타이밍을 놓쳐서 본선탈락의 위기를 자초했고, 히딩크 복귀설에 대하여 안이하게 대응하다가 여론의 역풍을 불러왔으며, 결과적으로 이로 인하여 출범 4개월만에 신태용호의 '레임덕'을 더욱 부추긴 원흉도 모두 축구협회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보다, 앞으로도 축구협회가 '자력으로' 혁신에 나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이다. 축구협회는 최근 내부 비리와 행정력 부재를 잇달아 드러내며 도덕성과 신뢰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책임을 통감해야 할 협회 수뇌부의 문제인식과 대응은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협회는 핵심 인사들이 연루된 심각한 내부 비리 사건에 대해서도 홈페이지에 올린 무성의한 사과문이 입장표명의 전부였고, 대표팀의 거듭된 부진에 대해서도 이용수 부회장과 김호곤 기술위원장 같은 임원들이 은근슬쩍 자리만 바꾸는 '회전문 인사'로 눈가리고 아웅하기에만 급급했다. 한국축구의 수장으로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정몽규 회장은 지금도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 김호곤 위원장이나 신태용 감독의 등 뒤에 숨어 비겁한 침묵만 지키고 있다. 그동안 형식적인 꼬리자르기와 사후약방문에만 급급했던 축구협회의 낡은 대응 패턴으로는 더 이상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축구협회는 FIFA로부터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받고 있다. 스포츠가 정치나 외부의 입김으로부터 잘못된 영향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다. 하지만 특정 재벌집단과 소수의 카르텔이 독점한 현재의 한국축구계는, 오히려 이를 악용하여 정부라든가 외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한 개혁이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가 되어버렸다. 현재로서 그나마 유일하게 축구협회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여론뿐이다.

이번에야말로 한국축구의 진정한 변화를 끌어내고 싶다면, 평가전 결과에만 일비일희하는 냄비 수준을 넘어서 지속적인 여론의 응집력이 필요하다. 축구협회의 인적 쇄신과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안이 되어 있다. 필요하다면 코칭스태프나 기술위 전면교체 같은 극약처방도 검토해야 한다. 박지성, 김호, 차범근 등 한국축구에서 명망과 능력을 갖춘 인사들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고려해볼 시점이다. '권력은 휘두르면서 책임은 지지않는' 지금의 축구협회부터 바꾸지 못한다면, 대표팀의 미래도 월드컵을 논하는 것도 더 이상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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