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결과는 1무 2패(2골 9실점). 대회 도중 감독 경질이라는 참담한 결과였지만 당시 축구 국가대표팀을 향한 비난은 없었다. 마지막 벨기에전에서 몸은 날리며 공을 막는 선수들과 붕대 투혼을 보여준 이임생 선수 등을 보며 이미 16강 탈락이 확정됐음에도 새벽부터 TV 앞을 지킨 많은 국민에게 감동을 줬다.

굳이 2002년 월드컵을 말하지 않겠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3:0으로 지고 있던 독일과의 경기를 3:2까지 추격했지만 결국 패배했을 때도, 2006년 월드컵 주심과 부심의 오프사이드 에러로 16강 진출이 좌절됐을 때도, 2010년 16강 전에서 이동국 선수의 슛이 골대 앞으로 굴러가고 있던 걸 우루과이 선수가 걷어내 결국 패배했을 때도 그랬다. 비록 아쉬웠지만, 물론 졌지만 그래도 잘 싸웠다고….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이 그립다

 10일 오후(현지시간) 스위스 빌/비엔 티쏘 아레나에서 열린 축구 국가대표팀 평가전 대한민국 대 모로코의 경기. 신태용 감독이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10일 오후(현지시간) 스위스 빌/비엔 티쏘 아레나에서 열린 축구 국가대표팀 평가전 대한민국 대 모로코의 경기. 신태용 감독이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10일(한국시각) 스위스 빌-비엔느 티솟 아레나에서 열린 모로코와 평가전에서 1-3으로 완패했다. 지난 러시아와 경기에서 2-4로 패배한 이후 다시 참패를 당하며 신태용호의 첫 해외 원정은 2연패로 마감했다. 신태용 감독 부임 이후 2무 2패의 초라한 성적표다.

결과도 결과였지만 내용은 더 처참하다. 특히 수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모로코 공격에 상식적으로 한 명의 수비수는 붙어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상대 선수를 놓아주는 모습이 보였다. "붙어!" 하는 한국 코치진의 절박한 목소리가 TV에 들릴 정도로 크게 들렸으나 붙어주는 선수는 없었다.

중원에서의 압박 역시 사라졌다. 당연히 느슨한 공간으로부터 치고 들어오는 모로코 대표팀은 빈 곳을 활용하는 빠른 침투와 다양한 패스로 한국을 농락했다. 과거 진공청소기라고 불린 김남일 선수처럼 흐름을 끊어주는 선수가 부재했고 박지성 선수처럼 공이 안 보이는 곳에서 한 발짝 빨리 움직여 기회를 만드는 선수도 없었다.

공격옵션도 부재했다. 기성용은 부상에서 회복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활약이 미미했고 손흥민 선수도 애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자주 흐름이 끊겼다. 전통적으로 한국 축구가 강점을 보여왔던 측면에서 제대로 활약한 선수 역시 찾기 힘들었다. 공수에서 균형적 모습을 보였던 이영표 선수나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보여줬던 이천수 선수, 가깝게는 지난 아시안컵에서 경기장 오른쪽을 장악한 차두리 같은 선수도 없었다.

같은 날 호주에서 연장 접전 끝에 패배해 월드컵 진출이 좌절된 시리아도 스웨덴에 이기고도 골 득실차로 월드컵 진출이 좌절된 네덜란드도 우리보다 오히려 '잘했다' 라는 말을 듣고 있다. 특히 네덜란드의 노장 아르옌 로벤(33)은 월드컵에 탈락한 채 국가대표를 은퇴하게 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두 골을 넣은 그를 보며 팬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고 한다. 우리가 특정 선수의 이름은 연호한 게 언제였던가?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지난 월드컵을 돌아보면 한국 축구는 크게 세 가지 강점을 바탕으로 선전해왔다. 바로 ▲ 체력 ▲ 스피드 ▲ 압박이었다.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이 세 가지 강점이 극대화됐던 시기였다. 모로코전에서 30분도 채 안 돼 포기한 쓰리백 수비를 비교해 보면 2002년 월드컵에서 최진철-홍명보-김태영의 쓰리백은 이 세 가지 장점이 분명했다. 즉, 한국 축구의 선전은 의미 없는 점유율 축구, 어설픈 티키타카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 축구는 이런 장점이 모두 사라졌다. 골 결정력 부재, 수비 불안과 같은 약점은 고스란히 남긴 채 장점은 사라진 약체팀이 된 셈이다.

주전으로 나서지 못한 채 벤치만 달고 있는 해외파 선수기용도 문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 박주영 선수 등 리그에서 부진한 선수를 이름값을 믿고 기용해 실패한 월드컵이 됐다는 점을 반면교사 삼을 필요가 있다. 비록 이번 러시아-모로코전은 K리그 사정상 전원 해외파 기용이라는 무리수를 둔 점을 이해하더라도 이번 평가전의 중요성을 고려해볼 때 해외파 기용의 전술적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한다.

또 한 가지 문제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중심이 되는 선수가 없다는 점이다.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이룬 2010년 월드컵만 하더라도 비록 선발로 나서진 못했지만 안정환, 이운재 같은 선수들을 비롯해 신구조화가 잘 이뤄졌었다. 또한 2002년 월드컵 이후 10여 년간 박지성이라는 팀에 중심이 되는 에이스도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 공수에 핵심이 되는 선수가 도대체 누군지 의문이다.

이외에도 히딩크 감독 선임 문제에 어설픈 대응과 부적절한 논란에 휩싸인 축구협회, 잊을 만하면 나오는 K리그의 승부조작이나 심판매수, 똑같이 뛴 경기장의 상태나 만원 관중의 응원을 탓하는 선수 등의 자세도 고려해봐야 한다. 

지난 러시아-모로코 평가전은 우리가 독일이나 브라질 같은 유럽과 남미의 강호와 싸웠다고 해도 경기력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경기였다. 한국 축구가 러시아와 모로코보다 실력이 부족해도 이 정도까지 부족하다고 믿기 힘든 것도 사실이며 심지어 한 명이 퇴장당하고 보인 이란의 수비 전술을 부러워하거나, 카타르의 소리아 선수를 부러워할 수준에 이른 셈이다.

물론 신태용 감독은 억울할 수 있다. 대표팀 지휘봉을 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제 고작 4경기에 불과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지휘봉을 맡을 당시 당장 눈앞에 놓여있는 월드컵 본선 진출이 시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축구의 핵심 문제는 신태용 감독이 아니다.

신태용 감독 부임 이전부터 지속해서 지적되어 온 전술 부재, 압박 부재. 수비 문제, 골 결정력 문제, 공격옵션 부재, 해외파 기용문제, 측면 장악 문제, 어설픈 협회 운영 등 한국 축구의 심각한 문제들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문제점들이 실제 경기에 너무나도 명확히 드러났다. 지금 한국 축구의 가장 큰 문제는 한국 축구 그 자체이다.

지난 이란전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가득 찬 건 오랜만이었다. 그만큼 팬들은 애정이 있고 관심이 있다는 증거다. 비인기종목이라면 이런 비판과 문제를 지적하는 글이 올라 올 리도 만무하다.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TV를 보지만 끝나면 역시나 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경기에서 실수할 수도 있고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지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졌으면 좋겠다. '졌지만 잘 했다', '아쉽지만 최선을 다했다' 하며, 설사 패배하더라도 누군가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애정 어린 마음으로 TV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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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월드컵 국가대표 한국 신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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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바꿈세상을바꾸는꿈,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그리고 지금은 한반도평화경제포럼 사무처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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