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치 않게 유명해진 것

이름난 상품 중에는 의도치 않게 유명해진 것이 있다. 레고처럼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으로 개발되었으나 성인층에게 크게 호소하는 경우나, 포스트 잇 같은 것이 그 예다. 본래 포스트 잇은 접착제 용도로 개발되었던 것인데, 연구원들은 개발실패로 약해진 접착력을 응용해 메모지로 만들었다. 영상 콘텐츠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있다. 주 타겟층에 어긋나 흥행에 성공한, 작품설계의 실패를 상품으로 응용해 의문의 승리를 거둔 작품들이다.

어느 상품이든 제품 개발단계에서 특정소비층을 겨냥해 제품을 설계한다. 예를 들면, 화장품 같은 경우는 20대에서 50대의 여성층을 공략한다. 스마트폰 같은 경우는 10대부터 70대까지 전 연령층에 호소하는 제품을 만든다. 특정한 연령층과 성별을 공략하기엔 너무 시장이 좁고, 이에 따른 실패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소비층에 완벽한 취향을 지니지는 못하지만, 각각의 연령층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뽑아 하나로 조합하는 형태를 취한다.

영상콘텐츠 또한 특정 연령대를 공략하고, 위에서 언급한 사례처럼 '의도치 않게' 주 타겟층에 어긋나 흥행에 성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영상콘텐츠는 유독 주 타겟층에 어긋나 성공한 경우가 많다. 자세한 것은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흔히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명탐정 코난'과 '크레용 신짱'이 대표적인 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공 사례에 힘입어 기획단계에서부터 '의도치 않음'을 의도하는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의도치 않게 유명해진 사례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 에도가와 코난> 작품의 한 장면 캡쳐.

▲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 에도가와 코난> 작품의 한 장면 캡쳐. ⓒ 아오야마 고쇼, 소년 선데이, 서울문화사


일단 '의도치 않은 성공을 의도한' 작품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기존의 사례들을 살펴보자. '코난'과 '짱구'시리즈는 소비층이 성인에서 아동으로 이동한 작품이다. 코난의 어두운 분위기와 짱구의 블랙 코미디는 성인으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주류 문화의 이동에 따라 청소년층을 거쳐 아이들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두 애니메이션의 '아동화'는 주류 문화가 하위문화로 변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이유도 있다. 성인층을 대상으로 한 높은 수위의 유머를 아이들이 곧이 받아들이지 않도록 순화한 것이다. 또는 성인 시장보다 아동 시장이 더 큰 수익을 벌어들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인들은 아동 시장으로 이동한 작품을 '여전히' 좋아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기존에 해당 애니메이션을 보던 성인으로서는, 작품의 '아동화'가 질적인 퇴화로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즐겨보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할 뿐, 작품의 코드가 여전히 성인의 그것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아직 속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보이는 겉면은 어리고 순수하게,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성인에겐 일종의 심오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명탐정 코난>(1996~)의 내용은 이렇다. 고등학생 명탐정 '남도일'은 여자친구와 놀이공원에 놀러 갔다가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범죄조직으로부터 약을 투여받고 어린아이가 되어버린다. 이후 범죄조직의 실체를 밝혀내며 부차적인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주요 서사다.

코난이 나온 1996년(원작 1994년)은 일본의 버블경제가 한참 진행 중이던 때다.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인'남도일(쿠도 신이치)'은 17세 고등학생이다. 고등학생이라는 설정은 작품의 주요 대상인 청소년과 성인들이 몰입하기에 딱 좋다. 왜냐하면, 작품이 방영될 당시 코난의 주인공과 같은 나이의 일본 청소년은 버블 경제가 막 시작되던 전인 1977년 생(베이비붐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되고 코난이 만화로 나오자 일본의 거품이 터지기 시작했다. 즉, 코난은 일본의 호황기가 꺼져가던 80년대에 성장해 94년도에는 성인이거나 성인에 근접하여 국가의 붕괴를 목격한 주요 시청자층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와 비슷했던 버블 붕괴 이후의 일본 사회는 자신의 욕망을 대신해줄 대상으로 코난을 지목했다. 작품에서 남도일은 유아기로 퇴행해 코난이 된다. 남도일은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린아이가 되고, 조직을 소탕하고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것은 한순간에 경제 대국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일본의 회복 욕구를 표현한다. 일본은 코난처럼 화려했던 모습의 과거(남도일)로 돌아가고자 하고, 자신은 정의로운 피해자(범죄를 해결하려다 조직에 당함)였음을 강하게 호소한다. 검은 조직이 작품 속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거품이 터진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그저 검은 무언가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어린이 탐정단' 사이에 끼어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며 사건을 추적하는 것은, 떨어진 일본의 경제력과 비슷한 위치의 국가들을 조롱하며 따돌리는 행위다. 또한 여자친구의 아버지인 '유명한' 탐정에게 마취침을 꽃아 사건을 대신 해결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열등감과 경쟁심리를 투영한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유아기 퇴행'이라고 볼 수 있다. 작중의 주인공이 아이의 상태로 퇴보하기도 하고, 일본 사회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강한 충격을 받고 본 인격이 내면 어딘가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일종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정신 분열에 해당한다. 이처럼 코난은 일본 사회의 '유아기 퇴행'을 반영했고, 작품의 아동화 이후에도 성인층에게 인기를 유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이들은 비슷한 나이대의 코난과 그 친구들을 동일시한다. 코난이 사건을 해결해 나가고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과 동일한 쾌감을 얻는 것이다.

비슷하게, 성인들도 코난의 여정에서 버블 경제의 회복을 간절하게 염원한다. 물론 버블 붕괴 이후로 태어난 세대에겐 그러한 회복의 욕구가 없으니, 그 버블 경제라는 것이 다른 것으로 치환된다. 그들은 버블의 붕괴를 사회의 압박으로 치환한다. 94년도에 태어난 아이들이 17세가 되었을 2011년은 일본의 불황이 계속되던 때다. 그들은 치솟는 물가와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를 '검은 조직'으로 칭한다. 부패와 암투가 들끓고 대책 없이 느껴지는 현 사회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유아기 퇴행'의 욕구이다. (그러면서도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건 꽤 한심한 일이다.)

<크레용 신짱>(1999~)의 내용은 이렇다. 짱구와 짱아는 엄마와 아빠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애니메이션은 그들과 주변인물의 일상을 에피소드로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소소한 웃음과 사건을 동반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짱구를 보면서 깔깔 웃기보단 비탄감과 슬픔을 느껴야 정상이다. 짱구도 코난과 비슷한 시기에 탄생했고, 코난과 동일한 정서를 공유한다. 따라서 짱구가 보여주는 해학적이고 현학적인 몸짓은 찰리 채플린이 행했던 블랙 코미디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버블 경제 이후를 생각해보면, 작품 속에 묘사되는 그들의 일상이 얼마나 낙원 같은지 알 수 있다. 짱구 아빠 '신형만'은 도쿄로 추정되는 곳에 차고가 딸린 2층 주택을 보유하고 있으며, 어린아이 2명을 기르고 있음에도 돈에 부족함이 없다. 그들에게 현실적인 문제란 보이지 않으며, 떡잎 마을 방범대가 찾아내는 작은 갈등만이 전부다. 작품 속의 떡잎 마을이란 마치 '유토피아'에 가까워 보인다.

애초에 작품은 이 이질감에서부터 시작한다. 작품 속에 묘사되는 짱구 가족의 평범한 일상은, 당시의 경제 상황으로는 어지간한 경제력이 아니고서야 버틸 수 없는 상황이다. 붕괴 이전까지는 누구나 그렇게 누리고 살았던 '평범함'이, 이제는 만화에서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지닌 특유의 허구성이 그토록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짱구라는 만화가 성인층을 대상으로 시작한 만큼, 작중에 묘사되던 짱구의 일탈행위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짱구는 5살이라는 표면적인 신분과는 달리, 성인 여성을 유혹하기도 하고 공중도덕을 배제한 채로 행동한다. 타겟층이 명백하던 초창기에는 장난식으로 담배를 피우거나 거리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둥 어린아이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짱구라는 캐릭터는, 짱구라는 작품이 현재 성인과 어린아이에게 인기 있는 것처럼 작품 속의 짱구 또한 표면적인 어린아이의 신분과 내적인 성인 신분을 모두 지니고 있다.

코난이 사회로부터의 도피와 원초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의 회귀를 염원한다면, 짱구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이른바 몸과 마음의 불일치라고 볼 수 있는데, 짱구의 몸과 마음은 각각, 아동과 성인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현재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몸과 마음이 불일치 하는 경우는, 정신 분열로 말미암은 유아기 퇴행이나 혹은 꿈을 꾸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짱구의 모습은 코난과 비슷하게, 본래 성인(경제 대국)이었던 사람이 어린아이(유아기 퇴행)의 몸에 갇혀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미친 사람(짱구의 이상한 행동)처럼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마치 작품을 보는 성인으로 하여금 지금의 정신을 온전히 간직한 채로 몸만 아이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사건의 결과를 알고 난 지금은 과거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귀인 한다. 코난이 성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과는 다르게 정반대인 것이다.

어른들의 세계, 아이들의 진입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캐릭터들 기쁨이와 슬픔이는 중앙 뒷부분의 두명이다.

▲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캐릭터들 기쁨이와 슬픔이는 중앙 뒷부분의 두명이다. ⓒ 픽사


어찌 됐든 이러한 작품들의 흥행에 힘입어 일본을 비롯한 세계는 (본문에서 타 국가의 사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의도치 않은 성공을 의도한' 작품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겨울왕국>(2013)이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것이나, <인사이드 아웃>(2015)가 흥행한 것이 그 예다. 두 작품은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성인들도 충분히 공감하면서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우리는 겨울 왕국에서 두 소녀의 자매애를 넘은 무언가를 보았다. 두 소녀의 자매애는 가장 가까운 이도 불신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족'이라는 쉼터를 상기시킨다. 작품은 '올라프'라는 눈사람을 통해 언니 '엘사'의 내면을 면밀하게 드러낸다. 눈사람이지만 여름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밝고 따스한 희망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두 자매 사이의 차가운 감정은 여름이 오고'녹음'으로써 흐지부지되는 만능의 감정이 아니라 그것보다 위대한 '자매애'다. 동생 '안나'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언니를 찾아간다. 언니는 'Let It Go'라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내려놓았던 삶의 무게를 동생과의 만남으로써 되찾는다. 여기서 언니 '엘사'가 부른 노래가 '내려놓다'라는뜻을 지닌 만큼, 위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던 '유아기 퇴행'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겨울왕국이 흥행한 것 또한 현대인들이 얼마나 지쳐있는지를 보여준다.

인사이드 아웃은 사춘기 소녀와 그 변화하는 감정을 유쾌하고 따스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정작 성인인 우리가 그 속에서 보는 것은,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이 그를 구하는 서사가 아니다. 우리는 '슬픔'을 잊어야만 하고, 억지로 '기쁨'이어야만 하는 현대인의 비애를 본다. 작품 속의 주인공은 그 과정에서 건강한 슬픔이 있어야 더욱 성숙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지만, 우리는 그저 슬프게 웃는 개인의 모습을 투영할 뿐이다.

일단 라일리의 내면으로 대표되는 감정들의 모험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빙봉'이라는 존재는 여태까지 계속해서 언급해왔던 '유아기 퇴행'의 코드가 작품에도 있음을 알려준다. 라일리는 무의식 속에 있던 유아기친구 '빙봉'을 계속해서 그리워하며 살아가지만, 이제는 떠나보내야만 한다. 기쁨이는 깊은 무의식 '에고(Ego)'로 떨어진 슬픔이를 구하고, 자신도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계속해서 실패한다. 그 과정에서 빙봉이 주었던 가장 핵심 기억, 유년기의 기억으로 기쁨이는 탈출한다.그때, 기쁨이가 탈출하기 위해 탑승한 기구 뒤에서 나오는 화려한 폭죽과도 같은 그것이, 마치 '리비도 (Libido)'의 폭발처럼 보인다. 에일리가 상상 속으로 좋아하던 남자아이가 기쁨이의 탈출을 도와준 것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좋은 예다.

아이들의 세계, 어른들의 진입

그런데 '의도치 않은 성공을 의도한' 작품 중에 괴짜 같은 작품도 있다. 시장에서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아동용 영상'의 탈을 쓴 채로 그 속에 '성인의 코드'를 집어넣는다. 요즘의 작품들은 한 가지 시장으로는 많은 수익을 벌어들일 수 없으니, 두 가지 타겟층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작품을 만든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Hasbro'사의 'My Little Pony'시리즈와'Transformer'시리즈다. 두 작품 중 후자는 마이클 베이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높은 수익을 벌어들였다. 문제는 전자다. 왜 7세 여아용 애니메이션을 20대 남성 여성들이 보고 있을까? 성인들이 영유아동 영상을 보며 재미를 느끼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서사가 단순하므로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고, 어린아이의 시점과 성인의 시점을 교차하며 찾아내는 의미 작용이 무척 재미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것이 최고라는 말이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복잡해졌고 우리는 피곤하다. 그래서 손가락을 밀어 짧게 볼 수 있는 글이 유행을 타며, 식사도 편의점 도시락을 애용한다. 그런 상황에서 복잡한 인물 간의 관계나 서사를 따라갈 필요가 없는 영유아동 영상은 좋은 즐길 거리다. 영유아동이 보는 만큼 그들의 짧은 집중력에 맞추어 간단해야 하고, 성숙하지 못한 감정과 두뇌에 걸맞은 간소함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경우도 '유아기 퇴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을 회피하고 멀리하는 비겁한 행위가 아니라,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하는 방어기제다. 우리가 영유아동 영상을 보며 받는 복잡미묘한 카타르시스는 '유아기 퇴행'을 영상으로 대체하며 나오는 화학반응이다. 우리는 영유아동 영상을 보며 과거에 자신이 보았던 '추억'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을 상상하기도 하고, 성인이 되고 현실을 깨닫자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기도 한다. 김수정 화백의 <아기공룡 둘리>를 인제 와서 다시 본다면 둘리보다 고길동에게 감정이입이 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막연하게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둘리를 응원하던 과거와는 달리, 시야가 넓어진 만큼 고길동이라는 남자의 고충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이것이 영유아동 영상의 이중성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영상이 아닌 현재의 영상을 볼 때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성인이 영유아동 애니를 보면 유아기 퇴행을 통해 아이의 시점에서도 작품을 해석할 수 있고, 성인의 시점에서도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 더욱이 최근의 작품들은 아예 성인이 작품을 볼 것을 염두에 두고 '성인의 코드'를 숨겨두기 때문에, 그것을 속속히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뽀로로>(2003~)와 <텔레토비>(1997~2001)에서 환상의 나라라는 코드를 읽을 수 있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명백하게 다르며, 마치 놀이공원처럼 우리를 환영 속으로 이끈다. 작품이 보여주는 환영의 공간은 놀이공원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현실문제를 잊게 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유토피아(Utopia)'인 것인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사회주의와도 같다.

그들은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노동하지 않는다. 자신이 만든 것은 꼭 타인과 나누려 하며 광적인 공동분배에 시달린다. 그들에게는 화폐도 없으며 자본도 없다. 텔레토비는 성별의 유무를 배제하고 색의 유무만을 남겨놓음으로써 개인을 획일화하고, 사회를 떠받드는 인민으로 귀속한다. 뽀로로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며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다른 종의 동물들은 먹이사슬에 귀속되지 않고 모두 평등하다.

그외에도 텔레토비와 뽀로로를 둘러싼 수많은 유언비어는, 성인의 관점에서 작품을 볼 때 얼마나 많은 해석의 여지가 주어지는지를 말한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유아기 퇴행'의 코드는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뽀로로와 텔레토비를 멍하니 바라보며 옆에 앉아 같이 티브이를 보는 아이들처럼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어머니의 자궁으로 대표되는 유년기의 편안함은 지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과거로 회귀하며, 마음속의 낙원을 살아간다.

의도치 않은 성공을 의도한 것

텔레토비 속의 등장인물들. 비틀즈의 앨범 자킷을 패러디한 사진이다.

▲ 텔레토비 속의 등장인물들. 비틀즈의 앨범 자킷을 패러디한 사진이다. ⓒ 영국 BBC CBeebies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영상'이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이다. 영상매체는 여타 매체들과는 달리 무척 복잡하다. 영상은 그 속에 시간을 가두어 놓고, 초현실적인 차원을 지닌다. 시각적으로 그것을 표현하여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하고, 매체의 특성에 따라 그것이 실사가 되기도 하고 가상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영상이 가진 경우의 수는 수많은 상징을 만들어내고 의미를 조합해낸다. 관객은 개인의 주관에 따라 그것을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카메라는 현실의 시간을 스크린에 가둔다. 가두어진 시간은 영화 내부와 외부의 시간을 다르게 만들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과거로 회귀해 묻힌 가능성을 되찾는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보았던 영상들은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그곳에' 있다. 작품의 시간은 흐르지 않지만, 우리의 시간은 흐른다. 따라서 우리는 그 괴리에서 개인의 성장을 확인하고 미래를 투영한다.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은 시간이 공간에 선행한다고 믿는다. (시간이 흐른다 혹은 시간이 사라진다.) 그리고 영화를 대표로 한 영상매체에서 시간은 몽타쥬이고 공간은 미쟝센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의 기억 속에 비규칙적으로 배치된 기억의 파편은 몽타쥬이고 우리의 삶은 미쟝센일 것이다. 몽타쥬는 장면의 편집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내고, 우리가 되돌아본 후회 어린 기억들도 그렇다. 인제 와서 보면 별것 아니었던 사건들, 잘못되었다 생각되는 선택,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회한이다. 시간이 공간에 선행하는 만큼, 우리의 삶은 편집된 기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상 매체는 삶의 '기억을 더듬'도록 한다. 우리는 기억을 헤집는 것처럼, 전지적 관찰자의 시점으로 영상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우리의 눈을 대체하고, 기억은 편집으로 재구성된다. 영상의 구조가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영상을 본다는 것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유아기 퇴행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삶을 성찰하는 행위'다. 현재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실패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이처럼 성인들도 영유아동 영상을 보며 알 수 없는 재미와 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동시에 그것을 보는 자신을 자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책해야 할 행위가 아니라 고양 받고 고취 받아야 할 건전한 행위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해당 기자의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중복 게재 됐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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