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민주주의-진화된 기술력에 담긴 경고의 변화

메시지가 도착했다. 남자는 갈등한다. 처음 문자를 받을 당시만 해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조그만 스마트폰 하나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곳곳에 설치된 CCTV

곳곳에 설치된 CCTV ⓒ 김현준


IT 혁명으로 인해 현대 사회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버렸다. 영화 <기프트>에 등장하는 CCTV 역시 마찬가지. 네트워크에 연결된 영상 신호는 얼마든지 해킹과 모니터링이 가능하다. 과거 수많은 영화들은 이것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갔고 거대자본을 바탕으로 소수의 권력이 기술력을 지배한다는 현실을 통해 민주주의 위기 가능성을 경고해 왔다.

곳곳마다 설치된 CCTV는 사회를 통제하고 시민들의 삶을 지배하는 수단이다. 그것을 실현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며 여론수습과 정책을 뒷받침할 권력이 있어야 한다. 필연적으로 소수에게 집중되는 힘과 능력은 민주주의 근간인 평등의 원칙마저 뒤흔든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CCTV와 도청.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 느낌.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CCTV와 도청.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 느낌. ⓒ ⓒ 제리 브룩하이머 필름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라는 영화에는 감시 카메라와 도청으로 인한 통제국가의 위험이 신랄하게 드러나고 있다. 기술력을 지배하는 국가기관과 그것에 대항하여 인권을 지키려는 주인공의 대립. 한층 진화된 기술은 관료들이 아닌 인공지능 컴퓨터에게 권력을 넘겨버린 것일까. 작년 말에 상영된 <이글 아이>와 곧 개봉을 앞둔 <기프트>의 소재가 그것을 고민하게 만든다.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스스로 사고하는 컴퓨터가 국가의 헌법을 재해석하여 시민들을 지배하는 상황. 컴퓨터와 인간의 대립은 <매트릭스>와 같은 극단적인 SF로 풀어낼 수도 있지만 이 두 영화는 그렇지 않다. 일련의 정치적인 흐름들과 IT 생활환경을 통제하는 인공지능 기술에 근거하여 그럴듯한 가정이 전개되고 있다.

바로 시대상의 반영인데 심각한 것은 독재의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과거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과 다른 부분으로, 소수 권력집단에 의한 과두정[각주:1]이 아닌 전지전능한 유일한 대상에 의해 지배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과거 작품들이 언급한 기술과 권력집중화로 인한 위험이 결국 실현된 지금, 새로운 경고인 독재의 가능성은 힘을 얻는다. 비록 기계에 의한 것이지만.

이글아이 Vs 기프트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경우 주인공은 살인사건이 담긴 동영상을 입수하면서 위험에 처한다. 추격자들은 그를 사방의 감시카메라와 무선 감청을 통해 압박해 온다. 어디에도 벗어날 곳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전직 정보부 요원을 통해 감시 전파를 차단하는 대응 방법을 알게 된 주인공이 은밀한 작전을 세워 위기를 돌파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글 아이>나 <기프트>의 주인공들은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다. 특별히 쫓길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도망자가 된다. 왜? 바로 현대인의 필수품이라는 휴대폰 때문이다.

 <기프트>(맨 왼쪽)와 <이글 아이>의 주인공 모두 휴대폰을 통해 음모에 휘말린다.

<기프트>(맨 왼쪽)와 <이글 아이>의 주인공 모두 휴대폰을 통해 음모에 휘말린다. ⓒ 성원 아이컴, CJ엔터테인먼트


같은 소재로 인하여 비슷해 보이는 두 영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글 아이>의 경우 주인공이 평소 지니던 휴대폰에 난데없이 위험한 명령들이 전송된다. 범인은 제목과 동명인 슈퍼컴퓨터. 그러나 <기프트>의 주인공은 신제품 스마트 폰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게 된다. 영화의 제목이 기술발전으로 인한 혜택을 반영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위험을 근거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삶을 윤택하게 하는 동시에 인간의 권리와 행복을 위협하는 기술이 나타난 것이다. 전 세계 경찰국가임을 자부하는 미국의 중앙정보국 슈퍼컴 시스템이 스스로 움직이며 네트워크 환경에 둘러싸인 현실 세계를 뒤흔든다.

<이글 아이>의 경우 평범한 소시민이 정체모를 메시지 때문에 도망자가 되어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구조로 되어있다. 하지만 <기프트>의 경우 사건의 실체가 일찌감치 드러나게 되면서 전현직 FBI 요원들이 주인공과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프트> 자신을 통제하려는 음모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주인공

<기프트> 자신을 통제하려는 음모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주인공 ⓒ 성원 아이컴


또한 주인공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수단도 다르다. <이글 아이>가 목숨을 담보로 협박을 했다면 <기프트>의 슈퍼컴은 인간의 물질적 탐욕을 자극하여 지시를 따르게 만든다. <이글 아이>는 안보와 관련된 대립상황을 폭력적으로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기프트>는 자유주의 이념을 지키고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 금융자본과 소비주의를 이용하고 있다. 증권, 즉 금융자본과 카지노로 반영되는 쾌락적 소비주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 논리와 맞닿아 있다.[각주:2]

미국 안에서만 진행되는 <이글 아이>와는 달리 <기프트>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네트워크라는 특징을 반영, 여러 나라를 오가는 로케이션을 통해 전개된다. 여기에 추격전과 근접 격투, 총격전, 로맨스, 등이 적절히 어우러져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의 재미를 선사하는 점이 만족스럽다. 특히나 긴박한 상황에서도 코믹한 요소까지 절묘하게 담아내는 감독의 센스는 장면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며 빛을 발한다.

감각적이면서도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장면들은 완벽하게 배치되고 적시적소에서 흘러나오는 긴박한 음악들은 마치 첩보 스릴러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까지 전해준다. 실제로 <미션 임파서블>제작진이 참여했다는 이 영화에 이단 헌트(톰 크루즈)의 동료를 연기했던 빙 레임스가 FBI요원으로 등장한다. 다른 조연들 또한 괜찮은 연기를 보여주며 제 몫을 다하고 있고.

이러한 점만 본다면 <기프트>는 괜찮은 액션스릴러로 추천 할만하다. 어디하나 빠질 것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세련된 오락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전체 구성에서 80% 정도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던 영화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절정과 후반부에 이르러 맥이 풀려버린다.

감독의 데뷔작 <pm 11:14>를 통해 드러나는 연출 패턴

 시간 가는 줄 모를 '액션 스릴러'를 원하는 관객에게 <기프트>는 수많은 명장면을 제공한다. 절묘한 추격전과 총격전은 물론 여배우의 액션 연기가 특히 눈에 띄는 부분.

시간 가는 줄 모를 '액션 스릴러'를 원하는 관객에게 <기프트>는 수많은 명장면을 제공한다. 절묘한 추격전과 총격전은 물론 여배우의 액션 연기가 특히 눈에 띄는 부분. ⓒ 성원 아이컴


장점만 나열하니 정말이지 완벽한 작품인 것 같다. 물론 감독인 그렉 마크스는 확실히 스마트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아무런 연관성 없어 보이던 사건과 극적 장치들이 마치 퍼즐을 맞추듯 적재적소에 맞아 들어가며 전개되는 기막힌 연출력. 이것이 과연 지금까지 독립영화 하나만을 연출했다는 사람의 실력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렉 마크스의 전작인 <pm 11:14>을 본다면 저예산 영화 특유의 기발한 구성에 감탄을 느끼게 된다. 각자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들이 인과관계를 형성하며 하나씩 맞아떨어지는 구성. 감독은 천재일까 자문해보게 될 지경이다. 분명 머리가 좋은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아직은 좀 아니다.

<pm 11:14>에서도 발견되는 문제점이 <기프트>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재미있고 짜임새 있는 반면 인간적인 감수성이 부족한 느낌. 이야기의 구성은 마치 벽돌 쌓듯이 정교하고 튼튼하게 이뤄져 있는데 그러한 기술적인 테크닉에 비해 감성적인 부분을 채워주는 카타르시르가 없다. 즉,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속 남녀의 정사신이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흔히 보여지는 익숙한 장치 정도로만 사용되어 별로 낭만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의 절정 지점에서 사건이 해결되는 방식에 있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부분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방법은 매우 타당하다. 그런데 감정적인 동요가 일어나 무언가 짜릿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없으며 한편으론 허무하기도 하다.

때문에 이 감독의 작품을 보면 시나리오를 마치 컴퓨터가 쓰는 것 같다(기프트의 시나리오는 전문 작가가 썼지만 연출자의 취향이 이러하다 보니). 인간이 썼다라고 하기엔 캐릭터의 모습이 확률에 근거하여 전형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의외성이나 모순, 상처 등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구성이 완벽하니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고.

그러나 결말에서 튀어나오는 반전만큼은 (미리 복선을 장치했는데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사건은 분명 주인공 일행이 해결해 왔고 관객과 함께 모험을 했던 것도 그들인데 난데없이 나타난 인물들이 자화자찬하는 모습은 당황스럽다. 이것은 시나리오 상에서 구성의 타당성만을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직접 관람하는 대중의 입장에서 쓴 것 같지가 않다.

더군다나 앞서 칭찬한 영화의 80%정도 역시 비판적 입장에서 볼 경우, 지금까지 익숙하게 쓰이던 클리셰(cliche)로써 관객에게 호응을 얻어 그 효과가 입증된 것들이다. 즉 확률로 증명된 오락적 장치들을 깔끔하게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재미 이상의 감동을 찾기 위해 감독이 갈 길은 아직 멀다는 느낌이 든다.

시도는 좋았으나 어색해진 정치의 반영

컴퓨터가 미국 헌법을 해석하면서 사건의 발단이 되는 <기프트>는 IT기술을 이용한 감시와 통제를 근거로 빅 브라더의 출현을 경고하는데 이것은 현대 정치의 풍자와 맞닿아 있다. 막강한 경찰국가인 미국이 전쟁과 내정간섭의 명분으로 내세워 온 자유주의 확산과 유지가 그것이다. 그러한 목적을 전체주의 수단을 통해 이뤄가는 모습. 얼마나 어이없나. 그런데 현실이 그렇잖나.

미국은 지금까지도 세계 최강국임을 빌미로 다른 국가들에 대한 기준을 정하고 있다. 더군다나 테러관련 법안이라는 자국의 기준을 근거로 하여 국제 법까지 어겨가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납치해 감금과 고문을 자행한다. 이것은 CIA가 수행한 강제실종이라는 작전인데 세계 여론으로부터 국제 범죄라는 지탄을 받아왔다. 중동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 비밀 감금된 것이다.

실제로 관타나모 기지나 바그램 수용소 등지에 존재하는 수백 명의 수감자들은 기소나 재판, 즉 혐의의 입증도 없이 대부분 6년 이상 감금되어 있다고 한다. 오바마가 관타나모를 폐쇄하더라도 그 외 존재하는 수용소들은 그냥 남아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러한 미국을 견제하는 나라가 영화에서 러시아로 등장하다니 조금 웃긴다. 이 부분 때문에 러시아에서 만든 영화인 줄 알았는데 제작 국가는 분명 미국으로 되어있다. 배우도 감독도 다 할리우드 사람들이고. 지금이 냉전시대도 아닐뿐더러 러시아 또한 만만치 않은 인권유린의 역사가 있는 나라다. 그렇지 않은가. 과거 공산당 정권의 만행은 물론이고 최근까지 러시아에서도 CIA와 같은 강제실종이 행해졌다.[각주:3] 그런 러시아가 미국을 견제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혹시 그루지야 전쟁의 속사정에 미국과의 대립이 있어서 이러한 설정이 나온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도대체 참혹한 것은 과연 영화적 상상력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각주
1. 자산 군사력 정치적 영향력 등을 지닌 소수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권력이 집중된 정부의 형태.

2. 금융자본과 카지노를 즐기려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할까.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자유와 평등이 서로 양립할 수 없음을, 즉 동시에 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자유가 존재하기 때문에 소수 권력층의 지배도 정당화 되고 빈익빈 부익부도 정당화 된다.

쉽게 말해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든 부를 쌓을 자유가 있으며 그렇지 않고(못하고가 아니다) 굶어죽을 자유도 있다는 것. 이것이 극단적 자유주의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면 자유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모순인 셈인데 일상에서 당연한 듯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가 영화에서 빅브라더를 등장 시키며 민주주의 원칙과 충돌을 일으켜 갈등을 전개시키는 요소다.

3.
 러시아에서 '강제실종'된 22살의 대학생 Artur Akhmatkhanov

러시아에서 '강제실종'된 22살의 대학생 Artur Akhmatkhanov ⓒ -

2003년 4월, 22살의 청년 Artur Akhmatkhanov씨는 복면을 한 군인들에 잡혀 무장차량에 실려 간 이후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목격자에 따르면, 그들은 그로즈니 학생들과 인권활동 자원봉사자들을 체포했던 러시아연방군(FSB) 소속 군인들이었다고 한다.

국제 앰네스티에 보고된 것에 따르면 다음날 경찰과 FSB는 사건현장에서 빈 탄약통과 피 묻은 옷을 수거했으나 Artur씨의 가족들은 그에게 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다.

Artur씨가 강제로 납치된 지 1년 후에 군 검사는 "체첸지역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어떠한 작전도 없었으며, 군대에 수감되어 있는 민간인은 전혀 없고, 법률 집행기관에 인계된 민간인도 없다."며 러시아 군대가 이 사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체첸지역과 이웃 북부 코카사스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형적인 인권침해 사례이다. 체첸공화국 민간조사기관의 2005년 보고서에 따르면 2000명이상의 사람들이 체첸지역에서 정체불명의 보안기관에 의해 실종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NGO에 따르면 1999년 이후 5000명 이상의 남성과 여성, 어린이들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앰네스티는 이들 중 단 한건에 대해서만 강제납치의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

2007년 6월, 앰네스티는 Artur Akhmatkhanov씨 강제실종 사건과 관련하여 런던소재 러시아 대사관에 4630명의 서명을 받아 러시아 연방내 체첸인들의 실종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전달했다.

러시아 대사관 관계자는 앰네스티와의 대화를 환영하며, 일부 강제실종과 납치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 러시아, 강제 실종된 체첸학생에 대한 조속한 조사촉구 (앰네스티 자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스쿨 오브 오마주>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기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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