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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이 많아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은퇴를 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떠나 있던 엄마랑 비혼 동생, 셋이 함께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내가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1982년.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고, 프로야구가 창단되었으며, 엄마가 손바닥보다 조금 큰 규모의 칼국수집을 창업(?)했다. 통행금지나 프로야구는 사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기록에 불과하다. 오전 수업을 마친 나는 주방 곁에 딸린 작은 골방에서 숙제도 하고 연습장에 그림 따위를 그리며 놀았다. 슬픈 과거를 회상하려는 게 아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칼국수 한 우물만 팠더라면...

'since 1982'로 시작되는 40년 전통 칼국수 집의 큰아들. 전국에서 몰려드는 여행객들에게 대기표를 뽑아주고, 카운터에서 전표 정리하며, 다음 분점의 장소를 물색하는 2대 칼국수집 사장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랬더라면, 칼국수를 활용한 다양한 상품들로 인터넷 쇼핑몰을 차려서 코스닥 입성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문을 연 놀부집의 장칼국수. 지금까지 지속되었더라면 대전의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을 한다.
▲ 놀부집칼국수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문을 연 놀부집의 장칼국수. 지금까지 지속되었더라면 대전의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을 한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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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엄마가 해주는 빨간 국물에 계란을 풀어 만든 칼국수는 지금 먹어도 전국 으뜸이다. 면을 워낙 좋아하는 탓에 여행지에 가면 반드시 유명하다는 면 집에 들른다. 나름 미식가의 입맛이다. 대기 인원이 길거나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을 아무리 다녀봐도 엄마가 해주는 칼국수를 능가하는 집은 없다. 엄마, 그럼 대체 우리는 왜 그렇게 자주 망했을까? 늘 궁금했다.

엄마의 연골을 고아 먹고 자란 형제

칼국수 집은 집주인한테 쫓겨나서. 백반집은 니 애비가 애먼 짓하고 다녀서. 보신탕집은 세를 너무 많이 올려달라 해서. 구내식당은 회사가 망해서. 야식집은 IMF 때문에. 그렇게 9900원 순살 치킨집을 끝으로 요식업계를 떠나기 전까지, 엄마는 한 우물에 집중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을 이 악물고 견뎌냈다. 치통 같은 20년의 세월이었다.

비록 종목과 체급은 꾸준하게 바뀌었지만, 엄마는 앉아서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 엄마의 무릎 연골은 누구보다 빨리 닳았고, 엄마의 족저궁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엄마가 오래 걸을 수 없는 이유다. 엄마의 연골을 고아 먹고 자란 큰아들이 밥값을 하기 전까지, 고행의 흔적처럼 축적된 엄마의 요리다. 이제 그 요리를 하나하나 배우려 한다. 아니, 배워야만 한다. 시간은, 인간의 편에 서지 않는다.
 
대전에는 아직 재래시장이 많이 남아 있다. 좀 더 싱싱한 재료를 구매하기 위해 대전의 도매시장을 찾았다.
▲ 대전 농수산시장의 풍경 대전에는 아직 재래시장이 많이 남아 있다. 좀 더 싱싱한 재료를 구매하기 위해 대전의 도매시장을 찾았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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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것부터 배워보기로 했다. 톡 쏘는 맛이 일품인 파김치. 엄마를 따라 장보기에 나선다. 아들 둘을 앞세우고 재래시장을 누비는 엄마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개선장군도 주눅들 품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는 버스를 타고 대전역 인근의 중앙시장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일주일 분량의 장을 보고 나면, 자연스레 팔다리에 근육이 붙는다. 나의 기초체력을 키운 건 팔 할이 재래시장이다.

재래시장의 미덕은 뭐니뭐니해도 가격 경쟁력이다. 대형마트와 동일한 가격이면 양은 세 배가 넘는다. 천원 단위로 경쾌하게 끊어지는 가격표도 매력이다. 마트의 1890원 같은 얄팍한 상술이 없다. 천원, 이천 원, 쿨하게 받고 내용물을 꽉꽉 채워준다. 구매 과정에서의 흥정과 덤 또한 우리 민족 고유의 미풍양속이다. 시장을 한 바퀴 둘러 신선하고 머리가 적당한 크기의 쪽파 한 단을 2천 원에 구입했다.
 
재래시장의 상품들은 신선하고 착한 가격이다. 약간의 발품을 팔면 좋은 식자재를 구할 수 있다.
▲ 대전 농수산시장의 풍경-2 재래시장의 상품들은 신선하고 착한 가격이다. 약간의 발품을 팔면 좋은 식자재를 구할 수 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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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파김치 담는 순서를 간략하게 적어본다. 요리의 달인은 아니지만, 엄마표 파김치 담는 법을 기록해 두기 위함이다.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느끼는 맛은 다르겠지만, 산해진미를 맛보고 다닌 내게 최고의 음식은 여전히 엄마표니까. 해보니 절대 어렵지 않다. 특별한 약속 없는 주말에 두 시간만 할애하면 한 달 먹을 파김치를 담글 수 있다.
 
집 앞 재래시장에서 구입한, 한단에 2천원짜리 쪽파. 묶음이 매우 튼실해서 4인 가족 한달치 분량은 된다.
▲ 한 단에 2천원짜리 쪽파 집 앞 재래시장에서 구입한, 한단에 2천원짜리 쪽파. 묶음이 매우 튼실해서 4인 가족 한달치 분량은 된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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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흙이 묻어 있는 쪽파의 뿌리 쪽을 칼로 잘라낸다. 끝부분만 살짝 잘라 흰 머리 부분을 최대한 많이 남긴다. 그 부분이 파김치의 결정적 아삭한 맛이다. 겉의 한 겹을 벗겨내는 것부터 진정한 다듬기의 시작이다. 거실 바닥에 고무 대야를 끼고 철푸덕 앉아서 시작한다. 고수라면 TV로 밀린 연속극이라도 보면서 소일거리 삼아 가능한 일이다. 내게는 고도의 집중력과 끈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30분이 넘게 쪽파를 다듬고 나니 허리와 어깨가 결리고 한쪽 다리에 쥐가 나기 직전이다. 내가 이 시간에 임플란트를 심었더라면 몇 개나 심었을까? 2천원 어치 쪽파를 다듬는 데 30분이 넘는다면 이것은 과연 효율적이라고 불릴 만한가? 인간이기에 이러한 갈등을 겪는 것이 마땅하다. 종종 본질을 잊고 현상에 휘말리는 나약한 존재니까. 고개를 저어 유혹을 뿌리친다.

엄마에게 전수받은 파김치 레시피
 
파김치를 담그는 모든 과정 중에 가장 시간이 오래걸리고 쉽지 않은 작업이다. 쪽파 다듬는 일이 파김치의 70%를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쪽파 다듬기 파김치를 담그는 모든 과정 중에 가장 시간이 오래걸리고 쉽지 않은 작업이다. 쪽파 다듬는 일이 파김치의 70%를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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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은 쪽파는 세 번 이상 깨끗한 물에 씻는다. 엄마는 세 번 이상을 매우 강조했다. 초보들이 처음부터 흐르는 물에 씻기 시작하면, 수도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둘째치고, 심각한 자원 낭비가 발생한다. 두 번까지는 대야에 물을 받아 흙을 떨군다는 생각으로 부드럽게 세척한다. 마지막에 흐르는 물로 깨끗이 마무리하는 것이다. 엄마의 지론이다.

세척된 쪽파가 준비되었다면 이제 풀을 쑤어야 한다. 물 300ml에 밥숟가락으로 수북하게 찹쌀가루를 넣는다. 불의 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끓기 전까지 1분 가량을 열심히 저어준다. 눌러 붙지 않게 하려면 필사적으로 저어야 한다. 냄비 바닥에 구멍을 내겠다는 각오로 임하자.

끓어오르면 불을 끄고 미리 준비해둔 육수(멸치, 다시마, 북어대가리 등등)를 붓고 잘 섞어준다. 그리고나서 완전히 식을 때까지 기다린다. 따뜻한 상태로 양념을 배합하면 재료가 익을 수 있으니, 반드시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풀이란 말 그대로 쪽파와 양념을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이다(풀 쑤기가 귀찮다면 흰밥을 얼린 후 갈아서 육수와 섞어주는 방법도 있다).

풀이 준비되면 이제 갖은 양념을 넣고 섞기만 하면 된다. 까나리, 멸치, 새우 등 선호하는 액젓을 소주잔 2컵 분량으로 넣는다. 매실 액기스는 달콤하고 개운한 뒷맛을 안겨주는데, 역시 소주컵으로 2~2.5컵이 적당하다. 가장 중요한 고춧가루(120~130gm)는 너무 맵지 않은 품종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고춧가루가 너무 매우면 알싸한 쪽파 본연의 맛이 가려진다.

이제 비주얼과 고소함을 위해 통깨 한 숟가락, 감칠맛과 엄마 손맛을 위해 티스푼으로 1/3분량의 화학조미료를 넣는다. 엄마 요리의 핵심이자, 화룡점정이다. 맛있게 먹어야 건강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MSG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면 생략해도 되겠지만,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전후 맛을 비교해보니 확실히 다르다. 한 번 비교해보시라.
 
깨끗하게 세척한 쪽파와 양념을 버무리기만 하면 환상적인 파김치가 완성된다. 엄마의 지도 감독하에 처음으로 손수 담근 파김치.
▲ 파김치 완성 깨끗하게 세척한 쪽파와 양념을 버무리기만 하면 환상적인 파김치가 완성된다. 엄마의 지도 감독하에 처음으로 손수 담근 파김치.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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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이 완성되면 다듬은 쪽파를 가지런히 놓고 버무린다. 파도가 일렁이듯, 파의 배열을 방해하지 않으며 버무리는 것이 핵심이다. 바닥으로 밀리는 양념들을 수시로 퍼 올려서 소외당하는 파들이 없도록 고루 양념을 발라야 한다. 손수 만든 파김치는 소중하니까.

이제 파김치가 완성되었다. 누구나 쉽게 담그는 파김치에 대해 구구절절 말이 많았다. 실천하지 않는 생각은 공상에 불과하다. 이 글을 읽고 도전정신이 용솟음친다면, 지금 당장 장바구니를 들고 재래시장에 나가보자.

덧붙이는 글 | 기사는 발행후 개인블로그인 https://blog.naver.com/irondownbros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태그:#파김치, #놀부집칼국수, #한우물파기, #재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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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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