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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이 많아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은퇴를 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떠나 있던 엄마랑 비혼 동생, 셋이 함께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씁니다.[기자말]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드라마를 본 적은 없지만, 제목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냉정하고 무자비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성격이 맞지 않는 타인과 정해진 영역 내에서 공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경험해 본 이들은 안다. 오래 떨어져 산 가족들이 어쩔 땐 타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옥문을 열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규칙과 질서가 필요했다.

규칙과 질서 정하기
 
식사때마다 동생은 삼겹살 2만원을 외친다. 화병속의 국화는 우리집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다. 나만 바라보는.
▲ 논란의 가을 국화 식사때마다 동생은 삼겹살 2만원을 외친다. 화병속의 국화는 우리집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다. 나만 바라보는.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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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한 엄마, 은퇴한 큰아들, 비혼주의 작은아들. 셋이 합쳐 160살도 넘는 인생 가운데 교집합으로 엮을 수 있는 건 불과 십 년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 경험과 사고를 토대로 한 여정이었다. 이질적인 생활 습관은 충돌과 마찰을 불러일으킨다. 사소한 실수 하나가 판을 뒤엎기도 하는 법이다. 엄마랑 놀기 프로젝트의 취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생판 모르는 남이면 모를까, 가족인데 무슨 기우냐 여길지 모른다. 예를 하나 들어본다.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꽃집에 들렀다. 가을 국화를 2만 원어치 샀다. 나는 꽃을 좋아해서 자주 꽃집을 찾는 편이다.

한껏 고무되어 국화를 화병에 꽂아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아침 식사를 하며 동생이 묻는다. 꽃은 꺾어왔어? 아니, 2만 원 주고 샀는데. 다음부터 2만 원어치 삼겹살 사 와. 엄마도 동생의 의견에 동조하는 눈치다. 새삼 느낀다. 가치관은 절대적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꽃을 살 때의 상쾌했던 기분이 꽃잎처럼 훅 떨어져 나간다. 나이 들면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분노조절장애다. 하지만, 이럴 때 내 감정대로 행동하면 불협화음이 생긴다. 원만한 가족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꽃은, 2주에 한 번씩만 사기로 했다. 삼겹살도 2주에 한 번.

2만 원 상당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규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비가 온종일 내리던 날, 해물파전을 부쳐 막걸릿를 마시며 우리는 머리를 맞댔다. 주장과 근거와 철학과 고집이 엇갈리는 마라톤 회의 끝에 몇 가지 나름의 생활 규칙을 수립했다.
 
미국에 가본적은 없다. 한식,일식,중식이 아니므로 그냥 아메리칸 스타일이라 이름 붙였다.
▲ 아메리칸 스타일 아침식사 미국에 가본적은 없다. 한식,일식,중식이 아니므로 그냥 아메리칸 스타일이라 이름 붙였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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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개인의 사생활 보호 측면이다. 각자의 자유 시간과 취미 활동을 간섭하지 않는다. 취침과 기상 시간도 제한 두지 않는다. 다만, 일주일 중 하루,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는 날은 혼연일체가 되어 개인 스케줄을 접는다.

엄마는 노래 교실에 다니고, 두 아들은 악기를 연습하러 합주실에 다닌다. 건강을 위해 엄마는 아쿠아 댄스를 배우고, 우리는 동네 헬스장에 다닌다. 운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 항목이어야 한다.

둘째, 가사 노동의 분담이다. 집안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언급조차 잔소리다. 각자 선호하는 집안일 하나씩을 택하기로 했다. 엄마는 설거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 자기보다 깨끗이 설거지하는 사람은 없다고.

그렇다고 매번 설거지를 엄마에게 맡길 수는 없다. 저녁만이라도 계란판에 탁구공 넣기로 정하자고 내가 끝까지 우겼다. 격한 논쟁 끝에 설거지는 엄마에게 몰아주기로 했다. 엄마의 논리와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대신 빨래와 청소는 작은아들, 분리수거와 식사 준비 보조는 내가 맡기로 한다.
 
집에서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해먹는 우리에게 메뉴는 골치덩어리다. 그래서 일주일치 식단을 미리 정했다. 반드시 지켜지지는 않지만 가이드라인을 잡은 것만으로 고민거리 하나가 줄었다.
▲ 냉장고에 붙여놓은 식단표 집에서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해먹는 우리에게 메뉴는 골치덩어리다. 그래서 일주일치 식단을 미리 정했다. 반드시 지켜지지는 않지만 가이드라인을 잡은 것만으로 고민거리 하나가 줄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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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식단표를 만들기로 했다. 나보다 일찍 엄마 곁으로 온 동생이 귀띔해주었다. 뭐 먹을지 고민하다가 감정이 격앙될 때가 종종 있고, 세끼 메뉴가 이렇게 큰 근심거리일 줄 몰랐다고.

아침은 되도록 서양식 스타일로 과일과 달걀, 견과류 등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외식은 지양하되 일주일에 한두 번 맛집 투어는 가야겠다. 일단 냉동실에 쌓여 있는 냉동식품부터 처리한다. 식단표에는 식사를 전담할 담당을 적었다.

넷째로, 조금 민감한 부분인데, 바로 생활비다. 생활비는 그간 각자 벌어두고 모아둔 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비율은 공개하지 않는다. 문제는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세 사람의 소비적 행태다. 가난하게 자란 이들은 과소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수입이 전혀 없는 현실 상황에 대한 무의식적 압박감은 피할 수 없다. 최대한 절약하자. 장은 무조건 재래시장에서 본다. 내 머리는 집에서 동생이 깎아주고 미장원은 두 달에 한 번 간다. 커피는 치과에서 가지고 나온 커피머신으로 내려 먹는다. 술은 1주에 한 번 집에서, 담배는, 일단 끊기 위한 노력은 해보자.

"엄마랑 미친 듯이 즐겁게"
 
손님맞이용으로 쓰던 작은 방 하나가 내 몫이 되었다. 책상 놓을 공간이 없어 접이식 책상을 하나 샀다. 이곳에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 6개월간 기거할 내 방 손님맞이용으로 쓰던 작은 방 하나가 내 몫이 되었다. 책상 놓을 공간이 없어 접이식 책상을 하나 샀다. 이곳에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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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변하지 않는 원칙 한가지. 이 나이에 엄마 고생시키려고 모인 게 아니다. 소설 <고령화 가족> 속의 철딱서니 없는 형제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모인 프로젝트 유닛이다.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우리끼리 신나고 재미있게 놀아보자. 벅차오르는 감정에 합의문이라도 작성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껴두었다. 함께 살다 보면 개정안이 등장할 테니.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몇 자 더 적는다. 동생과 나는 효자가 아니다. 부모님의 이혼 후로, 아버지와는 거의 연락을 끊고 산다. 장남인 내가 그나마 형식적인 안부 차, 일 년에 한두 번 찾아가는 정도다.

그러니 효성이 지극한 형제라는 시선은 일찌감치 떨구어 주길 바란다. 아직은 공개하기 어려운 가정사가 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용서와 화해는 과일처럼 익을 때를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엄마랑 반년 살기, 엄마랑 놀기 프로젝트를 시작해보려 한다. 치과를 접고 엄마한테 간다고 했을 때, 위층에서 일하는 피부과 원장 형이 한 마디 해주었다.

"지금까지 네가 했던 모든 일, 하려고 했던 많은 일 중에 가장 잘한 선택이다. 나중에는 수백억을 들여서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이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가장 후회하는 일이기도 하고. 가서 엄마랑 미친 듯이 즐겁게 지내거라.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이 될 거다. 지금 이 순간, 네가 가장 부럽다."

아주 가끔, 옳은 말을 하는 형이다.

덧붙이는 글 | 추후 개인 블로그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타인은 지옥이다, #엄마랑놀기프로젝트, #엄마랑반년살기, #가을국화2만원, #역주행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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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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