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주(두산), 조인성(LG), 이호준(SK) 등 ‘자유계약선수(FA) 3인방’의 행보가 관심을 끌고 있다. 그동안 소속팀에서 중심선수로 활약을 해온 이들은 특히 FA를 앞둔 올 시즌 저마다 눈에 띄는 성적표를 받아들었기에 기본적인 대우는 이미 보장이 되어 있는 상태다. 소속 구단 측에서도 이미 상당한 금액을 몸값으로 제시했지만 이들은 그보다 좀 더 좋은 대우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생일대 '절호의 기회' FA, 하지만...

 

항간에서는 이들의 지나친 몸값 거품에 대해 걱정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으며, 소속구단 측에서도 난색을 표명하고 있는 상황이라 과연 이들이 원하는 조건을 관철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일생에 다시 오기 힘든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절호의 기회', 오랜 시간을 부지런히 뛰어왔던 선수들에게 FA는 분명 그런 것이다. 새로운 기회인 것이다. 그러나 1999년 한국 프로야구에서 FA제도가 처음으로 생긴 이후 최초로 FA를 신청했던 5명(송진우, 이강철, 김동수, 김정수, 송유석)의 선수들 이후 매년 많게는 10여명의 선수들이 FA 시장으로 나왔지만 모두가 이 절호의 기회를 살려낸 것은 아니다.

 

상품성이 없음에도 눈치 없이 FA를 신청해 오도 가도 못하는 위기에 처한 선수들도 있었고 때로는 시장 상황이 좋지 못해 기대보다 턱없이 적은 금액에 낙담을 해야 했던 선수들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FA 협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날개가 부러져버리는 선수도 있었다. 롯데의 '작은 거인' 박정태가 그런 대표적인 선수라고 할 수 있다.

 

롯데 팬들의 자랑이었던 '작은 거인' 박정태

 

 현역시절 박정태의 독특한 타격자세.

현역시절 박정태의 독특한 타격자세. ⓒ 롯데 자이언츠

동래고-경성대를 거쳐 1991년 롯데 자이언츠에 1차 지명을 받고 입단을 한 박정태는 입단 첫해, 122경기 출장 .285의 타율과 14개의 홈런(14위) 132개의 안타(4위)를 때려내는 놀라운 활약을 펼치며 화려하게 프로무대에 이름을 드러냈다.

 

비록 그해 신인왕은 1.6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9승 27세이브를 올린 조규제(당시 쌍방울)에게 양보해야 했지만 박정태는 데뷔 첫 해 골든글러브를 차지하는 등 누구 못지않게 화려한 데뷔 시즌을 보냈다.

 

박정태의 2년차 시즌은 더욱 화려했다. 1992년 박정태는 .335의 타율과 149개의 안타, 14개의 홈런, 79타점을 기록, 타율 2위, 최다안타 2위, 타점 5위에 오르는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롯데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데뷔 때부터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며 스타로 자리를 잡았던 박정태는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팬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박정태의 이름이 야구팬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던 것은 성적이나 특유의 타격폼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정태는 3년차에 접어들었던 1993년 5월 23일, 사직에서 벌어진 태평양 돌핀스와의 경기에서 2루로 슬라이딩을 하던 중 발목뼈가 산산이 부서지는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선수생활의 지속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을지 여부도 불확실했을 정도로 부상 정도가 매우 심각했다.

 

병상에 누운 박정태는 반드시 재기하겠노라며 투지를 보여줬지만 박정태가 부상 이후 1년이 훌쩍 넘어가도록 그라운드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자 대부분 사람들은 박정태의 복귀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 설사 그라운드에 선다고 해도 예전의 기량을 회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박정태는 부상 이후 2년의 세월을 건너 뛴 1995년 5월 16일, 기어코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가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부상에서 복귀한 그해 50게임에 출장을 해서 .337라는 믿지 못할 타율을 기록한 박정태가 이듬해였던 1996년 .309의 타율을 기록하며 2루수 골든글러브까지 되찾아 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고통을 견뎌냈겠구나' 하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이 작은 사나이의 가슴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뜨거운 불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박정태는 롯데의 상징적인 선수가 되었다. 단지 야구 잘하는 2루수가 아닌, 어디에서고 자랑하고 싶은 그런 특별한 선수로 팬들의 가슴속에 자리를 잡았다.

 

롯데와의 험난한 싸움을 시작하다

 

박정태는 당시의 공백으로 인해 2002년이 되어서야 FA 자격을 얻을 수가 있었다. 당시 나이는 만으로 33세.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10년이 넘도록 롯데 유니폼을 입고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 왔기에 내심 기대를 안고 FA 신청을 했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박정태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2년 이전 10시즌 동안 1000개가 넘는 안타를 때려내며 평균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해왔지만 FA를 앞둔 2002년 타율 .262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낸 것이 걸림돌이 된 것이다. 불과 3년 전인 1999년, .329의 타율과 83타점을 기록했고 2년 전인 2000년에도 .285의 수준급 성적을 기록했던 박정태였지만 최근 성적이 좋지 못한 것은 큰 약점이었다.

 

게다가 롯데는 시즌 중에 이미 박정태를 임경완과 묶어 LG에 내보내고 안병원과 안상준을 데려오는 2대 2 트레이드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계약에 의지를 보이지 않을 것이 빤한 롯데. 박정태의 길고 험난한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박정태는 3년 16억 원을 요구했고 롯데는 2년 6억 원을 제시했으니 입장 차이가 너무도 컸다. 박정태는 4년에서 3년으로 계약기간을 양보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박정태와 롯데는 그해 우선협상 마감시한이었던 12월 9일까지도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롯데의 상징이었던 박정태가 롯데를 떠나 시장으로 흘러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된 바로 그날에도 박정태는 영원한 ‘롯데맨’으로 남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최근 성적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인터뷰를 했으니 다른 팀이 박정태에게 관심을 보일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롯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해 12월 31일 열린 구단 납회식, 롯데는 박정태를 초청 명단에서 제외를 했다. 더 이상 소속선수가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박정태는 당시 무소속이었으니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10여년을 넘게 롯데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선수, 끝까지 '롯데맨'으로 남고 싶다는 선수에게 그것은 할 짓이 못됐다.

 

박정태는 “서운함의 단계를 넘어섰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고 그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라고 담담히 말했지만 이미 회복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아픈 상처

 

 여전히 박정태는 롯데 야구의 상징으로 팬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여전히 박정태는 롯데 야구의 상징으로 팬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 롯데 자이언츠

이듬해 1월 31일은 FA 계약 마감일이었다. 이날까지도 계약을 하지 못한다면 박정태는 1년간 선수로 뛸 수가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박정태의 요구액은 2년 10억 원으로 낮아져 있었지만 롯데는 마감시한을 1주일 앞두고 있던 23일 “박정태가 새롭게 진용을 갖춘 팀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더 이상 계약 협상을 하지 않기로 했다”며 재계약의사가 없음을 발표했다.

 

선수생활의 위기에 놓여 있던 박정태를 살린 건 팬들이었다. 박정태와의 협상에서 보여준 롯데의 성의 없는 행동에 엄청난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롯데는 마감시한을 하루 앞둔 1월 30일 박정태와 구단 측의 당초 제시액인 2년 6억 원에 FA 계약을 맺었다. ‘계약 첫 해 130경기 이상에 출장해 타율 .320이상·타점 80점 이상을 올려야 한다‘는 과도하게 높은 기준의 옵션 2억 원이 포함되어 있는 금액이었다. 치욕적인 계약 조건에 도장을 찍어야 했던 박정태의 가슴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극적으로 그라운드에 돌아왔지만 박정태의 야구는 사실상 거기서 끝나 버렸다. 박정태는 이후 2년 동안 불과 76경기에 나서는데 그치며 2005년 4월 쓸쓸하게 그라운드를 떠나갔다. 선수 시절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큰 부상도 기적처럼 극복해냈던 박정태였지만 가슴속의 상처는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영원히 ‘롯데맨’으로 남고 싶다는 바람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며 박정태는 유니폼을 벗었다.

 

FA 제도는 선수들에게 일생일대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안겨주는 '양날의 검'과도 같다. 가끔 FA 선수들의 계약 소식을 듣고 있노라면 날카로운 칼날을 손으로 움켜잡았던 '비운의 FA' 박정태가 생각이 나곤 한다. 이제 그는 아픈 기억에서 자유로워졌을까.

2007.11.15 09:45 ⓒ 2007 OhmyNews
박정태 FA 프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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