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영웅이 된 재키 로빈슨

극심한 인종 차별로 메이저리그에서 흑인선수들이 사라진 1887년 이후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흑인선수는 재키 로빈슨이다.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LA다저스의 전신)의 단장이었던 브랜치 리키는 재능이 넘치는 선수라면 피부색과는 상관없이 메이저리그에서 뛰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물론 흥행이라는 사업적인 측면을 고려한 일이었지만 브랜치 리키의 이같은 신념은 재키 로빈슨을 만나면서 결실을 맺게 된다.

재키 로빈슨이 관중들의 심한 야유와 모욕을 참아낼 줄 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최악의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야구를 해나가는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면 아마도 브랜치 리키의 위대한 도전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고 메이저리그의 인종의 장벽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재키 로빈슨이 데뷔한 지 50주년이 되는 1997년 그의 등번호 42번을 메이저리그에서 영구 결번시켰으며 2004년에는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했다. 4월 15일은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날이다.

올 시즌 재키 로빈슨 데이는 좀 더 특별했다. 재키 로빈슨의 데뷔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구 결번인 42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이날 하루 원하는 선수들이 입고 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많은 슈퍼스타들이 이날 42번을 달고 경기를 했으며 재키 로빈슨의 팀 다저스는 선수 전원이 42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영웅을 기록하고 기념할 줄 아는 메이저리그의 이같은 노력은 재키 로빈슨이 데뷔한 지 60년이 지났고 세상을 떠난 지 35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게 만들었다.

차별과 싸운 또 다른 영웅 장훈

 일본에 진출한 이승엽 선수를 만난 장훈 선수
ⓒ 지바롯데 홈페이지

일전에 필자는 다른 매체를 통해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선수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지만 그렇다고 장훈에 대한 글 쓰는 것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23시즌을 뛰는 동안 2752경기에 출장해서 3085개의 안타와 504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0.319의 통산타율과 1676타점을 기록한 장훈은 단지 야구 잘하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가 아니었다. 장훈은 60년대와 70년대의 극심했던 재일동포들에 대한 멸시와 차별에 온몸으로 맞서 싸워왔던 선수다.

장훈이 나니와상고를 졸업하고 프로야구팀인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했던 1959년에는 한국인이 귀화하지 않고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어려서부터 차별을 겪으면서 야구를 했던 장훈은 자신이 멸시받는 이유가 단지 조선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훈은 끝내 귀화하지 않았다. 오가와 구단주의 간곡한 설득에 흔들린 것이 사실이지만 '편하게 살자고 조국을 버릴 거면 그따위 야구를 당장 때려치고 히로시마로 내려오라' 며 호통치셨던 어머니 박순분 여사는, 잠시나마 흔들렸던 장훈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단바라의 깡패'라고 불렸던 어린 시절에는 자신을 멸시하는 일본인 학생들을 주먹으로 때려눕혔지만 주먹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것조차 힘들었을 정도로 극심한 차별을 경험했던 장훈이 프로에서 자신이 받을 온갖 멸시와 불이익이 불 보듯 뻔함에도 귀화를 하지 않고 버텨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조국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항상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교시절 처음으로 조국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장훈은 '영혼 속부터 뒤흔들려지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장훈이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장훈은 이유있는 싸움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절대로 피하지 않았다. 장훈은 당연히(?) 심한 견제를 받았다. 하지만 뻔히 눈에 보이는 위험한 투구를 하는 일본 투수들을 장훈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장훈은 수만명의 일본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내가 치는 안타와 홈런은 자랑스런 우리 조선동포들을 차별하는 비열한 일본인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시원한 복수다"라고 수훈 선수 인터뷰를 했을 만큼 불 같은 성격을 지닌 투사였다.

장훈은 선수 생활의 마지막 시기였던 1980년 3000안타라는 대기록에 불과 30여개를 남긴 상태에서 요미우리에서 롯데로 트레이드되는, 이해하기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 1981년 장훈은 3085안타를 끝으로 전쟁 같이 치열했던 그라운드를 내려왔다.

조국에서 초라하게 잊혀져가는 장훈에 대한 안타까움

1990년 7월 24일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지만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존중받는 만큼 그런 존경을 받지는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장훈은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었고 또 때로는 과격하게 일본인들과 맞서 싸운 거친 선수였기 때문에 대기록을 세운 한국인 정도로만 기억한다고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장훈으로 하여금 부당한 차별에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게 만들었던 자랑스러운 조국은 그를 기념하고 있을까? 부끄럽지만 그를 기념하는 그 어떤 것도 이 땅에는 없다. '하리모토 이사오'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였기 때문에 특별히 한국에서 기념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이 나라 야구계는 장훈을 외면하는 것일까.

평생을 차별과 당당히 맞서 싸우면서 3000안타 500홈런을 친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 장훈의 고집으로 이후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이 굳이 귀화하지 않고도 외국인 선수 적용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제 그들이 조국을 바꾸지 않아도 야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장훈을 이렇게 초라하게 잊혀져 가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4월 15일 한국의 거의 모든 신문에서는 '재키 로빈슨 데이'를 보도하고 42번이 영구결번이 된 사연과 재키 로빈슨의 위대한 업적을 보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장훈이 언제 데뷔했는지 언제 3000안타를 기록했고 언제 은퇴를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심지어 장훈의 등번호가 몇 번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서가 아니다. 재키 로빈슨이 세상을 떠난 지 35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살아있게 만든 것은 팬들의 뜨거운 관심이 아니라 재키 로빈슨을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한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배려였다.

장훈의 등번호 1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할 수는 없어도 5월 28일 장훈이 3000개의 안타를 친 날을 한국 프로야구가 '장훈의 날'로 지정을 해서 일년에 하루만이라도 장훈 선생을 사람들이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것은, 필자의 도가 지나친 욕심일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에는 장훈 선생의 자서전 <일본을 이긴 한국인>(성일만 엮음·평단문화사)의 본문 내용 중 일부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장훈 재키 로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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