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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지? 겁나지?"

무대 한가운데 놓여 있는 병풍을 가리키며 그 뒤편에 시신이 놓여있다며 염쟁이 할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묻는다. 그러면서 스스로 답한다. 산 사람이 무섭지, 죽은 사람이 무에 무섭냐고.

가업인 염습(殮襲,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에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어 입관하는 일) 일은 죽어도 하기 싫어 그렇게 피하고자 했지만 결국 평생 그 일을 해온 염쟁이 할아버지가 이제 자신의 생에서 마지막 염을 하는 날이다.

"염쟁이 일은 죽어도 하기 싫었어..."

▲ 연극 <염쟁이 유씨> 포스터
ⓒ 극단 두레
할아버지는 예전에 자신을 찾아왔던 기자에게 연락을 해 염하는 자리로 그를 부른다. 그리고는 염습의 전 과정을 설명하며 보여주면서, 염쟁이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 구구절절한 평생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염쟁이가 되기까지의 일, 시신을 다루면서 보고 들은 일, 귀신들과의 만남, 고인 옆에서 싸우는 가족들, 장삿속으로 시신을 대하고 처리해 버리는 장례대행업자들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관객들은 울고 웃는다.

염쟁이 할아버지가 염을 하면서 중간 중간 들려주는 말은 죽음과 죽은 사람들을 가장 진하게(?) 온 몸과 마음으로 겪은 사람만이 토해낼 수 있는 진짜 죽음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것은 놀랍게도 죽음이 아닌 삶의 이야기이다.

...사실 죽음이 있으니까 사는 게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지는 게여...
...공들여 쌓은 탑도 언젠가는 무너지지만 끝까지 허물어지지 않는 건 그 탑을 쌓으면서 바친 정성이여...
...산다는 건 누구에겐가 정성을 쏟는 게지...
...죽는 것도 사는 것처럼 계획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
...뒷모습이 깔끔해야 지켜보는 사람한테 뭐라도 하나 남겨지는 게 있는 게여...
...죽은 사람때문에 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산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더 소중한 게여...
...죽는 거 무서워들 말어. 잘 사는 게 더 어렵고 힘들어...


염쟁이 할아버지에게 죽음이란...

▲ <염쟁이 유씨>의 한장면
ⓒ 극단 두레
자신의 아버지 염을 하는 것으로 염쟁이 인생을 시작한 할아버지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아들 하나를 길렀다. 밥이나 겨우 끓여서 초상집에서 얻어온 향 냄새 나는 나물과 함께 먹인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한 아들.

이 아들은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염쟁이 일을 하겠다고 나선다. 할아버지는 자기 아버지가 자기에게 했던 것처럼 아들에게 3년의 시한을 정해주고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러나 3년이 다 지나가도록 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후 세월이 흘러 9년 만에 아들 소식을 듣는다...

마지막 염이 끝나고 입관 절차를 모두 마친 할아버지는 고인의 옷과 모자, 어린시절 가지고 놀던 인형을 관에 넣는다. 아버지의 염으로 시작한 염쟁이 인생을 마무리하는 염, 그 사연에 관객들은 흐느끼며 함께 울고 만다.

내가 연극 <염쟁이 유씨>를 본 11월 25일은 서울시에 거주하는 60세 이상 되신 분들을 대상으로 1년 동안 진행한 '아름다운 생애 마감을 위한 어르신 죽음준비학교'(서울시립노원노인종합복지관) 일정을 모두 마친 다음날이었다.

4회에 걸쳐 총 80여 명이 졸업한 '죽음준비학교'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울고 웃었으며, 죽음 준비란 지금 당장 죽자는 것이 아니고, 또한 죽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보다 더 아름답고 의미있게 만들어나가는 일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긴 시간이었다.

평생 함께 했지만... 도대체 죽음이 뭐지?

▲ 연극 <염쟁이 유씨>의 한장면
ⓒ 극단 두레
그런데 어르신들과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목이 아프게 이야기하고, 수많은 토론 시간을 통해 끄집어 낸 죽음과 삶의 이야기들을 연극 <염쟁이 유씨>는 짧다면 짧은 1시간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머리에 쏙 들어오게, 가슴에 깊이 박히도록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죽음준비학교'의 그 긴 수업을 단 한 편의 연극이 다 끌어모아서 보여주고 있었다면 '죽음준비교육 전문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 조금은 지나친 말일까.

그렇지 않다. 죽음을 아무리 다른 단어, 즉 영생, 새로운 시작, 마무리, 이별, 웰 다잉, 웰 엔딩, 해피 엔딩 등등으로 바꿔 부른다 해도 궁극에 도달하는 지점은 역시 죽음일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 시신 염습 과정을 보여주며 죽음을 이야기하는 연극이야말로 참으로 진한 '죽음준비학교'다. 그곳에서 우리의 수업은 죽음의 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삶의 길로 이어지니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시간인지 모른다.

'죽음준비학교' 학생 어르신들과 함께 보았더라면 참으로 훌륭한 수업이 되었으리라는 아쉬움을 간직한 채 공연을 마친 배우와 인사를 나누니, 배우의 웃음이 참으로 수굿하고 한편으로는 허허롭게 느껴졌다. 아무리 연극이지만 죽음이, 염습이, 염쟁이 일이 그의 얼굴에 그런 표정을 남겨놓았으리라. 땀에 흠뻑 젖은 등이 미안하고 고마워 관객에게 베푸는 사진 함께 찍기 서비스조차 과분해 그냥 돌아나왔다. 생각해 보니 아쉽기만 하다. <염쟁이 유씨> 할아버지와의 사진은 내게 좋은 추억이 되었을 것을.

덧붙이는 글 | 연극 <염쟁이 유씨> (김인경 작, 위성신 연출, 출연 유순웅) / 대학로 두레홀 1관, 02-741-5798, Open 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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