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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23일 소개된 고종황제 가족사진 - 사진에 있는 인물은 좌로부터 의왕(義王)[이강(李堈). 고종의 다섯째 아들], 순종, 덕혜옹주[고종의 외동딸], 영왕(英王)[이은(李垠). 고종의 일곱째 아들], 고종,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대비, 의왕비인 덕인당 김비, 의왕의 큰아들 이건이다

지난 4월 국내 언론에 고종 황제의 가족사진 한 장이 소개된 바 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사진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왕의 11번째 아들 이석씨(63)가 소장해온 것으로, 그간 공개된 적이 없다고 했다. 또 사진 촬영시기는 1915년경 영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해 창덕궁 인정전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사진에는 무언가 석연찮은 점이 적지 않다. 우선 이미 오래전에 공개된 듯하다. 실례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도 이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사진은 합성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진이 공개된지 한달 뒤인 5월 7일자 <동아일보>에서는 이 사진의 합성 가능성을 거론했다. 비단 <동아>의 기사가 아니더라도 사진을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이상한가? 우선 필자가 알고 있는 군복차림의 영왕의 독사진과 이번에 공개된 사진 속의 영왕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다는 점이다.

고종 황제 가족사진, 합성 가능성 크다

합성 가능성을 언급한 <동아> 기사에 따르면, 이 사진은 원본을 다시 확대해서 찍은 가로 35.5cm , 세로 25cm 크기의 복사본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서울 역사 박물관에 있는 사진의 크기는 가로 24.4cm , 세로19.2cm 이며, 이석씨는 가로 15cm, 세로 10cm 정도 크기의 원본을 1980년대에 미국에 살던 사촌형에게서 전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1998년경 사진작가 허종태씨에게 의뢰해 당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허스튜디오에서 표구를 위해 확대 복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본은 이석씨가 미국 체류중이던 1990년대 후반에 도둑 맞았고 원본을 보았을 허종태씨는 1998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허씨의 유족 및 그와 함께 허스튜디오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허씨가 그런 작업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사진이 출현하게 된 상황을 보면 여기 언급된 '원본'이라는 사진도, 이를 확인해 줄 만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 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사진과 크기가 다른 것으로 봐서 원본으로서의 진위 여부 판명도 쉽지는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 이 사진이 합성이라면 원본이나 복사본 모두 합성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사진의 어떤 부분이 이상하고, 만약 합성이 되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동아>의 기사와 필자의 의견을 종합해 정리해 본다.

첫째 의문점은 빛의 방향이 어색하다는 점이다. 인물별로 빛의 밝기나 각도, 그리고 명암이 조금씩 다르다.

둘째, 사진 촬영 당시 영왕(1897~1970)은 조선에 있었는가? 영왕은 1907년 12월 5일 이토 히로부미를 따라 일본 유학을 떠난다. 영왕이 1911년 7월 생모인 엄비가 숨졌을 때와 1918년 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을 때, 두 차례만 조선에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1981년 김을한의 <인간 영친왕>과 1998년 송우혜의 <마지막 황태자>의 <동아일보> 발췌글 참조). 이는 영왕이 나라를 떠난 1911년 이후 거의 7년 동안은 돌아오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셋째, 촬영 연도가 1915년이 맞는가 하는 점이다. 덕혜옹주는 환갑을 맞은 고종(1852~1919)이 후궁인 양귀인((梁貴人)에게서 1912년에 본 외동딸이다. 사진의 제공자의 촬영 추측년대로 보면 사진 속 덕혜옹주는 만 3세인데 여기 보이는 덕혜옹주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1913년 돌 때 찍은 사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때의 다른 돌 사진과 유사한 점이 많아 보인다.

넷째, 촬영 장소인 창덕궁 인정전이 맞는가 하는 점이다. 배경을 좀 자세히 보면 검은 천막이 내려져 있다. 그리고 카페트 깔린 바닥은 마치 사진관 스튜디오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공간 역시 또 다른 의문점을 남긴다.

다섯째, 인물의 배치와 간격이 어색하다. 보통 왕실 사진을 보면 인물간의 간격이나 의전상의 특징이 있게 마련인데 이 사진은 그런 점이 전혀 없다. 영왕이 1918년 귀국해 고종, 순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와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볼 때 이 사진은 너무 조잡하다.

▲ 1918년 영왕이 귀국한뒤 덕수궁 석조전에서 영왕,순종,고종,순정효황후,덕혜옹주(왼쪽부터)와 찍은 기념사진.(koreanity.com 제공)
이런 의문들을 종합해 보면 합성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위의 사진들이 합성사진이라고 확신을 하는데, 문제는 몇장의 사진으로 합성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아래에서 합성 가능성을 4가지로 나누어 분류해 보았다.

[합성 가능성 1] 영왕의 사진이 합성되었을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은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증거로 아래 사진속의 영왕과 언론에 발표된 사진속의 영왕이 완벽하게 일치함을 들 수 있다. 이 가능성을 생각하면 발표된 사진은 최소 2장의 사진으로 합성된 것이다.

▲ 영왕의 어릴적 모습. 이 사진속의 영왕과 발표된 사진속의 영왕이 서 있는 자세나 표정, 옷주름 하나까지도 똑 같은 모습이다.(koreanity.com 제공)
[합성 가능성 2] 칼을 쥔 의왕 역시 하나의 독립된 사진일 가능성이 있다. 황제와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칼을 쥔 군복 차림이라는 것이 의전상 부합되지 않고, 또 다른 이들과 복장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합성 가능성 3] 순종, 고종, 덕혜옹주 사진이 독립된 한 장의 사진일 가능성이다. 조그만 의자에 앉아 있는 덕혜옹주의 모습은 만 3세가 아니라 돌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순종과 고종의 표정이 그리 굳은 모습이 아니고 가정적인 미소를 볼 수 있는 걸 보면 1913년 덕혜옹주의 돌 때일 가능성이 있다. 또 덕혜옹주의 다른 돌사진과 이 사진속의 옹주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시기적으로 비슷함을 볼 수 있다.

▲ 영왕을 제외하고 순종,덕혜옹주,고종 세사람만 별도로 편집해 보았다.(좌) 덕혜옹주 돌 사진. 발표된 사진속의 덕혜옹주와 시기적으로 비슷하다.(우)
[합성 가능성 4] 순정효황후, 의왕비, 의왕의 큰아들 이건의 사진이 하나의 독립된 사진일 가능성이다. 이 사진은 시선의 방향과 표정 등을 고려해 볼 때 사진을 찍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여자 왕족들의 모습과 마냥 어린양을 피는 아이처럼 치마를 밟고 서 있는 이건의 모습을 볼 때 사진을 찍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잘못 포착된 장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 발표된 사진에서 순정효황후,의왕비,이건의 모습만으로 편집
이런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따져 볼 때, 합성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영왕의 사진을 제외하고는 확실한 물증이 없으므로 몇 장의 사진을 합성했는지에 관해서는 독자의 판단에 맞겨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이런 합성사진을 만들었을까? 고종이나 왕실에서 합성된 가족 사진을 원했을 가능성이 있겠지만 이는 희박해 보인다. 이미 왕실에서는 총독부나 관련기관에서 만든 사진첩이 존재하고, 양질의 사진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화질이 좋지 않은 합성사진을, 그것도 기념사진까지 왜곡했을 가능성은 적기 때문이다.

또 일제 통치기구의 조작에 의해서 합성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일제의 사진 조작이라면 분명 특별한 목적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사진 자체로는 특별한 목적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볼 때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것이, 바로 상업적인 목적으로의 조작 가능성이다. 위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이 사진은 2~4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 당시에 이런 사진을 누가 가지고 있었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치 않을 수 없다.

상업적 목적으로 합성사진 만들어진 듯

이런 점에서 그 당시 사진과 관련 있는 사람의 손에서 합성되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원본 사진을 합성하여 다시 그 합성된 사진을 인화할 수 있는 곳으론 사진관 이외엔 큰 주체가 떠오르지 않는다.

20세기 초기에 프랑스 등 서구 유럽에서는 사진 및 이와 관련한 사업들이 지금의 정보통신처럼 유망사업으로 각광을 받던 시기였고, 사진엽서 발행 등을 통한 관광상품 홍보도 활발하던 시기였다. 일본도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이면서 사진관이나 엽서 제작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도 정치적인 목적과 상업적인 목적으로 많은 사진들이 제작, 유통되었는데 한국의 식민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거나 상업적인 목적으로 엽서를 제작한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이 사진은 뭔가 색다른 것을 만들어 상업적인 수익을 올리려고 한 사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왜곡된 사진이 한국인이 만든 사진인지, 일본인이 합성한 사진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당시 사진기를 만지고 사진관을 운영하던 한국인이 많지 않았음을(한국인들이 제작한 사진들은 1920~193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감안하면, 일본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일례로 최인진의 <한국사진사>에 “일인의 사진업자들이 자국의 정치적 지도자가 피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구해 이것을 복제하여 판매하는 데 열을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영국의 왕실이나 일본의 왕실 이야기가 흥미의 대상이지만, 그 당시 몰락한 우리의 왕조도 꽤 흥미있는 사진의 주제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상업용으로 유통되던 사진들 중에는 왕이나 왕족의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명성황후 사진이나 고종황제 사진 등 많은 왕족 사진이 유통되었다. 다만, 이러한 사진들이 보관이 제대로 되지 않고 사라져 버려 이제는 거의 몇몇장의 사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당시 사람들, 그리고 그 이후로 이 사진을 손에 받아든 우리 후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 사진은, 사진을 채 다 보기도 전에 보는사람을 서글프게 한다.

어떤 목적으로, 누가 합성을 했는지 알아낼 수는 없지만, 합성된 사진 한장으로 인해 우리 지난 역사의 슬픔과 그로 인한 교훈을 되새길 수 있다면, 이번의 언론 발표와 사진 한장이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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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옛 사진과 서양고지도 전문가이면서 수집가이다. 한국해연구소 소장으로 동해 표기와 독도 영유권 문제를 고지도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고, "독도는 한국 땅, 미발굴 외국 고지도 수집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 갤러리 북과바디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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