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이라는 제목은 다분히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을 의식한 듯 보인다. '추억'이라는 고즈넉한 단어에 '살인'을 붙여놓았고, '살해'란 단어 대신 '살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범인을 주체로 만들었다. 즉 영화의 마지막에서처럼 범인이 옛 범행장소에 나타나 추억을 더듬었다면 그때에 그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살인의 추억'일 것이기 때문이다.

1. 범인은 어디 있는가

@IMG1@화성연쇄살인사건은 '민주화'라는 거대 변환 과정 속에서 어쩌면 자주 잊혀지는 악몽같은 기억이다. 86년부터 91년까지 계속된 10차례의 부녀자 살인사건이 언론보도를 통해 확대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고 밤길을 두려워했다. 대대적 범인 수색작업이 계속되었지만, 결국 범인은 잡히지 못하고 책임자들이 경질되었다고 당시 언론은 보도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지금, 한국판 '잭 더 리퍼'의 흔적이 무척 궁금한 사내가 있다. 과연 그는 어떻게 10명의 여자를 죽이고도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을까? 개발되지 않은 외곽도시 '화성'은 이 사건으로 인해 오명을 얻었다. 왜 화성은 5년 동안이나 법의 사각지대였는가. 당시 경찰은 그를 잡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잡지 않은 것인가.

하지만, 이 영화가 그에 대해 시원하게 대답을 해주리라고 기대하지는 말라. 단지 몇몇 단서만을 흩어놓을 뿐이다. 영화 속에 잠깐 언급되지만 화성의 경찰서장 송재호가 상부에 부대 투입을 요청하자 들려오는 대답은, 병력이 모두 시위진압을 위해 수원으로 투입되어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첫번째 사건현장에서 보듯 당시 책임자들의 안일한 인식과 대처는 수사방식이 얼마나 전근대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송강호식 무대뽀 수사나 김상경식 서류 수사 모두 그다지 과학적이지 못했던 당시 경찰의 현주소에 불과하다.

경찰병력이 모자라서, 수사방법이 비과학적이어서 잡지 못했다. 그게 전부인가? 그러나, 이 영화는 범인을 못잡은 혹은 안잡은 사연에 대한 이야기를 더이상 하지 않는다. 단지 네 형사들의 진정성과 열정에 대한 이야기로 영화를 몰아간다. "범인이 누구일까?"라는 플롯으로 서스펜스를 만들어가고, 클로즈업된 화면에서 감추어진 부분에 대한 호기심과 공포로 관객을 긴장시킨다. 시간이 2003년으로 흐른 후에도 추억은 추억으로만 그칠 뿐 부연설명은 없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에는 공허함마저 느껴진다. 알고 싶던 것은 "왜?"였지 "누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 밤길을 혼자 나서지 마라

<플란다스의 개>에서 느꼈지만 봉준호는 참 디테일에 강한 감독이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굴리는 장면처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무언가 일어나게 만들고 그속에 유머와 위트를 녹아낸다. 장르는 바뀌었지만, <살인의 추억>의 디테일도 상당하다. 송강호와 김상경의 연기 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뒤에는 봉준호의 감각이 있다. 가령 영화의 첫 장면에 한 아이가 송강호의 말을 따라하는데, 처음에 화를 내던 송강호는 오히려 그 아이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보다 더 잘 전달된다고 믿게 되고 이내 아이를 더이상 말리지 않는다. 이 설정은 김상경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싸움도 잘 못하는 김상경을 처음에 무시하지만, 이내 송강호는 그의 방식에 동화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IMG2@<살인의 추억>은 만듦새가 뛰어난 영화이다. 봉준호의 돋보이는 감각은 셀 수도 없다. 경찰서장 변희봉이 술 마시면서 "좆됐다"라고 말하는 다음 장면은 바로 차기 경찰서장 송재호가 들고 있는 신문의 '물거품된 기념촬영' 사진이다. 빠르고 날카로운 편집으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하면서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공포를 필요로 하는 장면에서는 주로 음악으로 관객을 놀래키는데(<수사반장>을 보면서 송강호가 "노래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도 노래(?)로 승부보겠다는 것의 반증 아닌가) 이 과정에서 관객과 두뇌싸움을 한다.

비오는 날 손전등을 들고 마중나온 여자가 주위의 인기척을 눈치채고 도망가는 장면을 보라. 카메라는 여자의 바스트숏까지 서서히 들어가고, 여자는 심호흡을 한다. 관객의 서스펜스가 최고조에 이른다. 그리고 여자가 바로 뒤돌아서려는 찰나 음악이 쾅하고 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화면에는 범인이 나타나기 전이다. 여자가 결심했다는 듯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하면 그녀의 시점샷 안에 그제서야 범인이 휙하고 나타난다. 즉, 한 템포 늦추면서 공포를 극대화하는 전략으로 봉준호는 관객과의 두뇌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기차길 앞에서의 격투신은 또 어떤가. <인정사정 볼것없다>가 이미 기차길 격투의 멋스런 경지를 보여준 바 있지만, <살인의 추억>의 기차길은 또 다르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라는 카피를 떠올리게 하는 송강호, 김상경의 클로즈업과 박해일의 이중적인 표정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에 처절하게 담겨져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있다. 먼저 범인색출의 과정에서 사용된 소재가 너무 평이하다. FM방송국에서 소개되는 엽서들과 그중 공통된 음악인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범행의 유일한 단서가 된다는 것은 그동안 많이 보아온 방식이다. 또, 일회용으로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너무 많다. 피해자중 유일한 생존자는 단 한 번의 인터뷰에만 등장하면서도 수사과정의 단서를 제공하는 큰 역할을 하고, 살해되는 여자들에 대한 정보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는다.

설정은 버디영화이지만, 오히려 송강호가 더 강조되고 있다. 이것이 스타파워 때문인지 선후배 문제인지 잘 모르겠으나 김상경은 그 비중에 비해 파트너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에필로그에서 김상경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 역시 감독이 인물들을 너무 기능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다.

여자들의 이유없는 죽음을 방기한 이 사회에 대한 무거운 시선을 걷어버리고 두 형사의 심리적 갈등과 용의자와의 거듭되는 두뇌싸움으로 러닝타임을 치환시킨 <살인의 추억>은 스릴 넘치는 범인추적영화, 두 주인공의 개성만이 끝까지 강조되어 화해할 줄 모르는 버디영화, 또 디테일에 충실한 경찰영화라는 호칭을 얻을 만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대답되지 않은 "왜?"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봉준호는 그 대답을 다루지 않은 것인가 다루지 못한 것인가.

한 소년이 메뚜기를 잡는다. 그가 일어나면 카메라도 위로 이동한다. 이윽고 너른 보리밭이 펼쳐진다. 한국영화 최고의 오프닝 중 하나로 기억될 이 장면과 클로징에 동시에 등장하는 망망대해같은 보리밭은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의 존재와 잘 어울린다.

덧붙이는 글 씨네라인(cineline.co.kr)에도 송고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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