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극장 산업이 위축됐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진 요즈음, 국내에 몇 안 되는 독립예술영화 전용관들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침체기에서도 나름의 자구책,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예술영화 전용관들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
▲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가 1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2002년 5월 서울 소격동에서 개관하고 3년 뒤 종로 낙원상가, 그리고 서울 중구 정동에 이르기까지. 올해로 21년 역사인 서울아트시네마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시네마테크지만 독립한 전용 건물이 아닌 특정 건물에 세를 내고 운영되어 왔다. 말그대로 셋방살이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서울 내 여러 독립예술영화 전용관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문을 닫았을 때 이곳만큼은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시네마테크'가 중요한 이유는 독립예술영화 전용관 역할을 하면서, 여러 고전 영화 필름 원본이나 DCP(디지털 상영본)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 관객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점도 시네마테크의 특징이다.
단어 자체에서 예상할 수 있듯 시네마테크 운동의 주축은 프랑스였다. 앙리 랑글루아가 세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많은 영화팬들이 영화 예술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탄생했다. 이건 프랑스 누벨바그 및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등 현대 영화 사조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강력한 흐름이었다.
한국 또한 2002년 전국 15개 시네마테크 단체가 연합해 서울아트시네마를 출범했다. 이곳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김보년 프로그래머를 만나 해당 공간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다변화를 꾀하다
서울아트시네마의 존재가 중요한 이유는 1990년대 촉발된 영화 운동, 즉 일반 극장에서 접하기 힘든 고전 및 예술영화를 보고 토론하고 싶어하던 관객들의 갈증을 채워왔기 때문이다. 해당 극장은 한의사이면서도 영화 운동에 적극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고 최정운 대표가 1991년 설립한 '문화학교 서울'의 정신을 잇고 있다.
"1990년대부터 관객 차원에서 이어진 시네마테크 운동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게 우리의 주요 정체성이다. 좋은 화질, 원본에 가까운 영화를 적법하게 극장에서 볼 수 있도록 시네마테크를 만들자는 그 정신 자체는 잘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다만, 더 많은 영화를 소개하고 교류하는 그 에너지를 잘 유지하고 있는지는 점검해 볼 필요는 있다. 제 스스로도 잘하고 있는지 돌아보곤 한다."
예술영화 및 희귀 영화 상영과 영화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서울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램 방향도 몇 번의 변화를 겪었다. 김 프로그래머는 "지금까지 영화 관련 책을 펴면 나오는 작품들, 영화사에 중요한 거장의 작품과 걸작을 상영해 왔다면, 이젠 그걸 반복할 순 없다"며 "여전히 덜 알려진 감독과 작품을 소개하는 데에도 힘을 쏟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 400번의 구타 >(1959)가 최근 한국에서 개봉했잖나. 우리도 곧 틀 예정인데 예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한 트뤼포 특별전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같은 걸 또 하냐고 지적하실 수도 있다. 다른 관점을 제시하거나 혹은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감독들에 집중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더불어 최근 7, 8년 사이엔 영화 범주 바깥에 있다고 여겨진 실험작들, 영상자료도 극장으로 옮겨 와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 중이다. 얼마 전 돌아가신 마이클 스노우 감독도 그렇고, 영화사의 고전, 그리고 고전 영화 외부와 주변의 의미있는 영화를 발굴하고 시네마테크에서 소개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가 1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교육 프로그램 또한 영화 자체만이 아닌 재즈, 오페라와 접목한 강좌를 개설하거나 단순한 감독론이 아닌 작품을 촬영감독 등 실무 스태프들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분석하는 등 다변화 흐름을 보이고 있다.
김보년 프로그래머는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관객분들은 당연히 좋아하시지만 그것만으론 시네마테크에 거는 기대를 다 못 채운다고 생각한다"며 "이제 영화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시대인 만큼 교육 프로그램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다행히 많은 분들이 찾아주고 계신다"고 설명했다.
당장 지금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은 모두 2개. 박홍열 촬영감독이 진행하는 촬영 미학, 그리고 황덕호 재즈음악 평론가가 참여하는 토크 프로그램 등이다. 김 프로그래머는 "이런 프로의 경우 230석의 80% 이상이 채워지곤 한다"고 귀띔했다.
16년째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일을 해온 김보년 프로그래머는 "뭔가 한 번에 크게 주목받는 건 아니지만 끈기를 갖고 꾸준히 진행해 온 장기 프로젝트가 평가받을 때 참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포르투갈 영화를 10년 가까이 소개했는데 처음에 미구엘 고메스 감독도 신인이었다. 근데 이젠 세계적 거장이 됐고 관객분들도 많이 알아보신다. 우리가 소개한 영화들이 시간이 지나 인정받을 때 참 좋다. 그리고 책에서만 접할 수 있던 감독의 영화를 구해서 상영할 때 보람이 크다. 네덜란드의 요리스 이벤스라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있는데, 다큐 영화사 첫 페이지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대사관 도움으로 지난해에 필름을 가져와서 상영했는데 매우 뿌듯했다."
현재 서울아트시네마는 35mm 필름 20여 편, DCP 31편을 소장하고 있다. 절대적 수치로만 따지면 적어 보이지만 김 프로그래머 말대로 꾸준히 새로운 감독을 발굴하고, 구하기 어려운 작품을 찾아다닌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결과물이다.
"특유의 정체성 잘 지켜나갈 것"
하지만 직면한 과제도 만만치 않다. 시네마테크 운동 정신은 지키고 있지만,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고, 공적 지원 또한 크게 늘지 않아 운영을 해나가는 실무진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기준 극장 티켓 수익이 전체 예산의 70% 이상을 차지했고 나머지가 영화진흥위원회, 서울시의 지원이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티켓 수익이 크게 떨어졌다. 더욱이 전체 예산 중 건물 임대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2010년 1년에 6만 명 이상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면, 현재는 2만 명 중반까지 떨어진 상황이다.
"난방, 전기료를 포함하면 1년에 3억 원 이상이 유지비에만 투입되고 있다. 정말 어려울 땐 직원 월급이 밀릴 때도 있었다. (월급 인상은 못하더라도) 앞날을 도모할 수 있을 정도의 예산은 마련돼야 한다. 그러려면 지원금을 안정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물가는 계속 인상되는데 지원규모는 제자리다."
2006년부터 영화계 주요 인사들과 함께 추진해 온 시네마테크 전용관 완공도 지지부진하다. 서울시 충무로에 2020년 들어설 예정이었던 전용관은 이제야 공사가 시작됐고, 올해 말이나 돼야 완공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더불어 해당 공간에 시네마테크가 무사히 들어설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완공되기 전에 운영방식이나 운영주체를 논의해야 하는데 책임 주체인 서울시 등에서 아직 제대로 방향성을 공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가 1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그럼에도 김보년 프로그래머는 시네마테크 운동과 서울아트시네마의 미래를 조심스럽게 낙관했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같은 정체성을 품어 온 극장이 대한극장과 우리뿐"이라며 그는 "서울에서 우리 극장 역사가 가장 길다. 프랑스 시네마테크인 프랑세즈는 그 역사가 매우 길지만(1936년 설립), 우리가 그곳과 비견될 수 있다는 생각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수사적 말이지만 독립예술영화관, 시네마테크는 위기이자 기회 앞에 있다고 생각한다. 청년 인구가 감소했고, 관람 문화 급변은 위기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과 열정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여러 이유로 이제 극장을 찾는 관객이 크게 늘 지는 않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OTT 플랫폼 덕에 영화 문화가 보편화됐다는 장점도 있다. 좀 더 희귀한 영화, 좋은 작품을 집중해서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해질 것이다. 그런 분들이 자연스럽게 서울아트시네마를 검색해서 찾아주셨으면 한다. 우리 또한 그분들이 원하는 걸 찾아드릴 것이다.
지금 달랑 상영관이 1개관만 있는데, 우리 역량을 집중할 기회가 온다면 관객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다. 코로나19 전엔 소모임도 진행했는데, 지금 다시 가다듬어 진행하려 한다. 느슨한 관객 커뮤니티가 잘 형성되면 우리에게도 영광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10대를 위한 프로그램부터 어르신들을 위한 프로까지 다양하게 해보고 싶다. 올해부터 서서히 준비하려 한다."